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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지방 성지순례 ‘신(新) 사도행전’4 - 이탈리아이탈리아(Italy) 폼페이-로마-아씨시-피렌체-발데제-몬테비앙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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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9월 23일 (월) 21:59:32
최종편집 : 2019년 10월 10일 (목) 23:56:57 [조회수 :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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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13일 일정으로 터키-그리스-이탈리아-스위스를 다녀온 경기연회 군포지방의 성지순례를 소개합니다. 군포지방은 바울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믿음과 선교의 유산을 보았고 이를 계승하려는 열망을 그들이 집필한 순례기 ‘신(新) 사도행전’에 담았습니다. 순례에 참여한 36명중 26명의 목회자와 사모들이 편찬한 군포지방의 성지순례 기록 ‘신 사도행전’을 6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다른 분들의 기고 또한 환영합니다. - 당당뉴스 편집부

차례
성지순례 자료집 편찬을 축하하며 (김경호 감리사)

Part 1 신사도행전 교회사적 배경
1 세계 3대 그리스도교를 찾아 (송병구 목사)
2 동방정교회를 아십니까 (김봉균 목사)
3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과 화해 (이선재 목사)
4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 (천영태 목사)

Part 2 터키(Turkey)
5 비잔틴 문명과 오늘의 이스탄불 (김명환 목사)
6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김경호 감리사)
7 이스탄불의 과거와 현재 (배승룡 목사)

Part 3 그리스(Greece)
8 그리스 한 눈에 보기 (이선미 목사)
9 이콘과 성상에 대해 알아봅시다 (배중장 목사)
10 메테오라와 수도사들 (이은파 목사)
11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정봉용 목사)
12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 도시들 (한희준 목사)

Part 4 이탈리아(Italy)
13 이탈리아 인상기 (주기석 목사)
14 바울과 선교지에 보낸 편지 (우명순 목사)
15 로마 박해와 순교의 역사 (김기흥 목사)
16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임남선 목사)
17 피렌체와 르네상스 예술 (이상국 목사)
18 이탈리아의 발데제 교회를 탐방 한 후 (김종은 목사)
19 아름다움과 슬픔의 일교차 몬테비앙코를 읽다 (조성철 목사)

Part 5 스위스(Switzerland)
20 존 칼빈의 제네바 신정정치를 통한 신정국가 (박흥윤 목사)
21 종교개혁 500년 그 후<스위스 제네바> (최명관 목사)

Part 6 순례후기
22 에그나티아에서 산본으로 (우귀자 사모)
23 행복한 순례길, 소중한 시간들 (푸른초장교회 이혜영 사모)
24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이경미 사모)
25 신사도행전 후기 (김은영 사모)
26. 콜래트럴 뷰티 (이미옥 사모)

 

   
 

이탈리아 인상기

 

청계교회 주기석 목사

장화 같은 모양의 나라,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이탈리아 남부 바리에서부터 폼페이, 로마, 중부 아씨시, 피렌체, 북부 밀라노, 국경지역 몬테비안코(몽블랑)까지 7개 지역에 있는 기독교 성지를 중심으로 문화와 유적 등을 탐방하는 아주 소중하고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식 국호는 이탈리아공화국(Italian Republic)이고, 수도는 로마(Rome)이며. 면적 30만 1336㎢, 인구는 약 5930만 7966명(2018년 현재), 인구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는 이탈리아어이고, 종교는 99%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것으로 조사되어져 있다. 기후는 알프스와 접한 북부 일부 지역은 겨울에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이고 특별히 우리나라와 같은 반도(半島)라는 지형적인 특색이 있는 나라이다.

   
▲ 폼페이

이탈리아에서는 모두 5일간의 순례길을 행하였다. 이탈리아 첫 번째 일정은 남부 바리에 도착하여 버스로 이동하여 화산으로 묻혔다가 복원된 폼페이 고대도시의 유적지를 보았다. 그 옛날 성적(性的) 타락지로만 듣고 알았던 폼페이 현장은 빵집 등 시장터, 목욕탕, 야외음악당, 검투사 경기장 등 사람들이 필요한 여러 가지 생활시설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창출했던 슬기로운 고대도시의 모습을 보게 되어 역시 문화적으로 앞서고 뿌리가 깊은 도시, 나라임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던 보디올을 탐방하였다. 보디올은 현지 관광 종사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곳이며 역사적인 곳 이라하겠다.

 

   
▲ 바울의 참수

이탈리아 두 번째 일정은 비장함이 묻어있는 사도바울 참수 터, 쿼바디스도미네 교회,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숨어지내던 지하묘지 카타콤, 아피오, 콜로세움, 바울의 감옥인 마메티눔, 고대 로마 공회장이었던 포로 로마노 등을 보며 믿음의 선진들이 신앙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역사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체험이 되었다. 그리고 순례여정중 주일을 맞아 로마시내에 있는 로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홍기석)를 방문하여 예배드리며 말씀과 찬양, 특별히 이탈리아에 성악공부를 위한 유학생들로 구성된 찬양단과 우리 순례단원들의 특별한 찬양으로 은혜와 축복의 감동예배를 드렸다. 저녁에는 트레비 분수대에 가서 로마의 주일 오후를 즐기는 시민들과 여행객 등 많은 인파가운데 현지 특산품인 아이스크림도 먹어보고 저녁이 되어 멋진 현지식을 제공받으며 모두가 행복하고 소중한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콜로세움 앞에서

이탈리아 세 번 째 일정은 로마 순례길 이었다. 교황이 살고 있는 바디칸, 박물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등 명화가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 성베드로 대성당을 보았다. 특히, 바디칸의 한국대사를 만나서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바디칸 정원등을 돌아 볼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일정에 의거 중부 아씨시로 이동하여 산 아래 마을의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탐방하여 그 영성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성프란시스코 성당

그리고 이탈리아 네 번째 일정이다. 산위 마을의 산장 같은 호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산위 마을을 걸으며 성 프란체스코 대 성당, 성녀 글랄라 성당과 수도원을 순례하며 수도원 구도자의 깊은 영성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피렌체로 이동하여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과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베끼오 궁전을 보고 시내 투어 가운데 이 나라의 특산물이 가죽제품으로 작은 가죽 가방도 사보는 재미도 있었다. 시뇨리아 광장 한켠에는 당시 부패했던 교회에 항거하다가 순교당한 순교자의 작은 흔적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런 순교자들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느끼며 깨달음 가운데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 하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 또리노의 첫 종교개혁자 발데제 동상

이제 이탈리아 다섯 번째, 마지막 일정으로 북부 밀라노로 이동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의 선도자였던 발도, 발대제 교회의 순교 역사지를 보았다.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 바로서기 위한 몸부림, 피흘림의 발대제 교회이다. 빛은 어둠속에서 밝게 빛난다며 현실의 잘 못된 일에 대하여 개혁과 투쟁으로 교회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던 그래서 지금도 그 정신을 우리 감리교와 함께하고 있는 작지만 생명력 있는 교회를 보았다. 알프스의 흰 눈을 거룩한 붉은 피로 물들였던 헌신자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 교회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이날은 이탈리아의 우리나라 광복절 같은 날이다. 마을 마다 남녀노소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가 퍼레이드도 하며 축제일로 보내는 귀하고도 멋진 모습도 보았다. 발대제 순례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알프스의 영봉 몬테비안코에 올랐다. 믿음의 선진들의 숨결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해발 4,400m의 만년설이 덮인 아름답고 멋진 모습을 바라보며 기념하여 사진도 찍어 오래도록 간직해보고자 하는 기쁨과 감격의 시간이 되었다.

이탈리아를 속속히 세부적으로 보지는 못하고 다만 이곳저곳 점찍듯 다니는, 그야말로 ‘수박 겉할기식’의 순례여정이었지만 사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나라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임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나라이다. 오랜 기독교 역사가운데 절대자의 인도하심인지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축복받은 나라임이 느껴지고 인상된다. 특히 우리 개신교의 근원이 되는 발도와 발도제 교회의 작지만 그 생명력이 그 땅 가운데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며 앞으로 그 고귀한 생각들이 협력되어 성취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바라기는 이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나라로, 받았던  첫 사랑을 회복하며 더 멋진 하나님의 나라를 그 땅 가운데 이뤄나가게 되는 나라가 되기를 축복한다.

 


바울과 선교지에 보낸 편지

 

대야미교회 우명순 목사

  우리 군포지방에서 신 사도행정 성지순례 여행을 통하여 받은 감동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이 글을 작성한다.

터키 . 그리스 . 이태리 . 스위스 4곳을 여행하면서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약 2천여 년 전의 교회와 성도들의 복음전도와 순교정신을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일정이었다. 특히 사도바울의 전도 여행의 길을 따라가면서 본 그곳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과 순교 정신을 만 날 수 있어서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 그러나 단점이라고 한다면 지리적인 상황으로 여유롭지 못함의 아쉽고 짧았던 기간이었다. 항상 그렇듯이 성지순례 유적지를 찾아가서 만나는 것이 매우 감동적이고 은혜롭지만 모두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안고 훗날을 기약하고 돌아오게 된다.

 사도 바울의 삶 전도여행

사도 바울은 지금의 안디옥을 거점으로 삼아 3차례에 걸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이용한 길은 로마 시대에 군사 목적으로 닦아 놓은 로마식 가도였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루가와 함께 또한 다른 여러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도하면서 순교하기까지 온 생애를 이방인의 복음사도로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동안 아나톨리아 지역을 포함하여 그리스까지 20,000km의 거리를 당나귀나 노새를 이용하거나 배로 여행했다. 도보로는 하루에 약 20~40km 정도를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1차 전도 여행(45~49년) 제2차 전도 여행(50~52년) 제3차 전도 여행(53~58년경)

   
▲ 사도바울 순교 기념 교회로 들어가는 길

사도 바울의 삶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 할 수는 없지만 사도 바울의 순교정신을 알 것 같은 곳을 방문하여 수없이 많은 길과 장소와 유적지가 있지만 특히 이곳으로 걸어갔던 사도바울의 신앙 고백을 보는 듯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사도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세운 교회들마다 여러 가지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깃들여있다. 또한 그 교회들에서 새롭게 복음을 받아드린 첫 성도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눈물로 쓴 편지를 많은 기도와 함께 보냈다.

유력한 지도층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이방인과 노예 등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등록하게 되므로 이단사상과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무리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한 올바른 신앙생활에 관하여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바울은 모두 13편의 편지를 기록하였다.

바울이 보낸 편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로마서, 에베소서 ,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  그 중에서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살펴본다.

옥중 편지

사도바울은 10년 동안에 제 1차, 2차, 3차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편견과 핍박과 투옥이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에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출발한다. 그가 평소에 늘 복음 전파를 위해 가고 싶어 하던 곳을 죄수의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셋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면서 2년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면서 4권의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여러 방법으로 교회에 보냈다. 이 네 권의 책을 바울의 옥중서신이다..

골로새서 - 이단 문제: 영지주의자, 혹은 이교의 철학자들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기록하였다.
에베소서 -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 동안 머물면서 눈물로 목양한 교회이다(행20:17~35)
빌레몬서 –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권면으로서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라고 쓰고 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값을 지불하셨다.
빌립보서 - 바울의 옥중서신 중 제일 나중에 쓰여진 편지서이다(AD61~63).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유럽의 첫 성이다.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회개시켰으며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거기서 만난 간수를 구원하였다.(전16장). 빌립보에서의 특징은 기쁨과 감사의 편지라는 것이다(1:3,4,18,25; 2:17,18; 3:1; 4:4,10,18).
 

 

   
▲ 바울참수교회

로마 . 박해와 순교의 역사


하늘충만교회 김기흥목사

 초대교회가 형성되고 성장하게 된 강력한 원동력은 죽음을 동반한 핍박과 고난, 그 고난을 담대하게 헤쳐 나가고 그 결단을 영광으로 만들어 가는 성령의 사역에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 박해의 원인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기독교와 로마제국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이자 소수의 유대교 인줄로만 알아왔는데 헬라인과 로마인들 까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자 불법종교로 낙인을 찍었다. 또한 로마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서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기독교를 국가의 적으로 여기고 포악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기독교 반대파들은 기독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기독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2. 박해의 과정과 방법

 로마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3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00년경까지의 제1기는 기독교에 호의적이다가 로마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기독교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박해는 대체로 정신적인 박해와 육체적인 박해로 이루어졌다. 먼저 정신적인 방법으로는 사업을 방해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사회에서 쫓아내는 등 정신적인 고민을 주어 기독교를 배반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기독교 교인 사이에 내분이 생기게 만들어 서로 박해하도록 만들기도 했고 기독교인을 증오하고 죄인 취급을 하여 정신적인 고통을 주었다. 둘째로 육체적인 방법으로는 십자가형, 태형, 화형, 참수형, 수장, 생매장, 맹수형 등 폭력적이고 극도로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3. 순교

‘순교자’라는 말은 μάρτυς(마르투스)에서 비롯된 말로 본래 증인(witn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죽음으로 신앙을 증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실로 교회의 기초이다. 죽음으로서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했던 2세기의 라틴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의 관찰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다 예언적 진술이었다. 지난 2천 년간의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자 순교의 역사였고, 그 피의 터 위에 복음은 확장되었다. 그래서 순교의 역사는 교회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와 순교의 현장에서 취했던 길은 무엇이었는가?”이다.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증거 하면서도 자신들이 당한 수난과 환란, 그리고 핍박을 어떻게 이겨나갔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최후 심판과 승리, 부활에 대한 소망이었다. 더불어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카타콤으로 내려 가는 길

 
4. 카타콤

 초기 기독교의 지하 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카타콤은 본래 죽은 자들을 매장하기 위한 지하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로마 주변에는 약 45개 이상의 카타콤이 있으며, 미로처럼 뚫려 있는 터널 길이는 모두 합쳐서 약 900km에 이른다. 카타콤은 로마제국의 박해시기에 순교자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또 기독교인들이 은신할 곳이 필요하면서 한층 더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 카타콤의 구조는 사각형 모양의 방들이 격자형으로 배치되는 구조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비정형적이고 복잡한 미로처럼 조성되었다. 또한 지하 묘소들이 발달하자 다양한 장식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사각형 묘지에 넣어 두었지만, 부유층들은 아치형 무덤을 만들어 안치하기도 했다. 묘실은 침실을 연상시킬 정도로 침대처럼 조성되어있으며 벽면이나 통로에는 다양한 상징물과 벽화가 조성되었다.

 당시 순교자들의 시신은 매장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훼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제국의 참혹하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순교를 당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원동력은 부활에 근거한 믿음, 부활 신앙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박해와 죽음은 새 생명을 얻기 위한 통과 의례에 불과했으며, 박해와 순교를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카타콤은 새로운 삶을 기다리며 쉬는 안식의 공간이자 부활을 기다리며 잠자는 휴식처였다.

 이처럼 카타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 신앙공동체의 순교 정신을 보여주는 박해의 산물이자, 기독교 승리의 상징, 부활 신앙의 중요한 증거이다.

  만약 이 시대가, 우리나라가 당시의 상황과 같았더라면 우리는 순교자가 될 각오가 되어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명예도 없이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의왕제일교회 임남선 목사

4월 22일 화요일 로마에서 아시시로 이동하였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방문 후, 그랜드호텔에 묵은 후, 성프란체스코 성당을 방문하였다. 성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 작고 고즈넉한 마을. 양쪽으로 고풍스런 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지나 한참 언덕을 내려갔다.

  그 언덕 위에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당 안에 걸려 있던 성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담은 성화들과 기다란 창문의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들이 기억에 남는다. 성화나 스테인드글라스에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새들이었다. 지금도 성프란체스코 동상에는 비둘기 두 마리가 둥지를 틀고 있다. 새들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창조의 섭리에 감탄하며 그 은혜를 노래했을 성 프란체스코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 아씨씨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프란체스코는 1181년 아시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상인이었기에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상인이나 기사가 되는 꿈을 꾸었으나 1202년 뻬루지아와 아시시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 감옥생활을 하던 프란체스코는 죽음의 위기 속에서 복음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은 180도 변화된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 앞을 지나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 나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프란치스코야, 쓰러져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여라." 그 말씀은 그리스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프란치스코는 글자 그대로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다.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꾸중에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주교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지금까지 나는 베드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가족들과 이별을 하였고 주교는 그에게 망토를 건네주며 십자가를 걸어 주었다.

 그는 가난과 결혼한 청빈한 삶을 살아갔으며, 자연과 새들에게 설교하며, 늑대까지도 감화시킨 영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삶은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 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작은 형제회를 구성하였으며, 수도회를 조직하고, 수도원 생활과 규칙을 작성하여 교황의 재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며 청빈한 삶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사역의 모범이며, 그의 평화를 위한 기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마더 테레사는 “가난한 삶, 단순한 삶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런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식사는 간소하게, 소유물은 옷 두 벌, 샌들 한 켤레, 물통 하나, 기본적인 가재도구, 빈약한 침대 하나가 전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가난과 청빈인가 하는 물음을 물어야 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축복의 통로로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할 사명을 주셨다. 개인적인 물질적인 부요함이 욕심이 될 때, 빈부격차가 벌어지며, 계층간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그것이 최선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 시대에 적용할 때는 새로운 물음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
 
 세상 속에서 나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 누구나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도와 법과 조직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피렌체의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두오모)

피렌체와 르네상스 예술  


   
 산본제일교회 이상국 목사

피렌체라는 도시는 ‘꽃’이라는 뜻을 가진 르네상스가 활짝 꽃핀 도시이다. 유럽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기독교가 널리 퍼지면서 인간보다는 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세 시대가 있었다. 신을 위해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과 생각을 억누르다 보니 예술, 학문, 사상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발전하기가 힘들었다. 문화의 암흑기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14~16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중세 동안 억압받았던 고대 그리스 · 로마 문화의 부활, 즉 재탄생을 의미한다. 십자군 전쟁, 흑사병의 창궐을 비롯한 여러 혼란을 거치면서 서구인들은 기독교 공인 이래 1,000여 년을 이어온 ‘신에 의한, 신을 위한, 신의’ 세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의 자리를 ‘인간’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르네상스는 중세 내내 이교도의 것으로 홀대받았으나 상대적으로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고대 그리스 · 로마 문화를 이상적인, 마땅히 추종해야 할 ‘고전’으로 삼고, 이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탄생했다.르네상스라는 말은 ‘다시 태어남’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15세기 무렵 과학과 사회의 발달과 함께 시대가 바뀌면서 옛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과 문학, 사상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이다.

   
▲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시내

이탈리아에서 피렌체는 많은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중 가장 으뜸은 뛰어난 천재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이다. 화가이며 조각가,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는 1452년 4월 피렌체 근방의 산간 마을에서 태어났다. 〈최후의 만찬〉, 〈수태고지〉, 〈암굴의 성모〉 등 그가 남긴 명작들 가운데 피렌체에서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모나리자〉이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모습에 우는 듯, 웃는 듯 알듯 말듯한 묘한 미소를 짓는 모나리자!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 다른 감동을 갖게 하는 이 그림을 천천히 보노라면 레오나르도가 얼마나 뛰어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피렌체가 낳은 두 번째 예술가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화가이며 조각가, 건축가, 작가, 학자였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예술 분야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다.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천장 벽화로 그린 〈최후의 심판〉에는 그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벌거벗은 모습에 옷을 입히라고 했어요.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정중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수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교황께서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세상을 적절하게 먼저 바꿔 주시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력을 쌓아 가던 교회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자기 주장을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이 끝내 덧칠로 누드 위에 옷을 그려 넣어 반쪽짜리 벽화가 되고 말았다.

피렌체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외에도 보티첼리, 라파엘로, 단테 등 유명한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했는데, 이것은 당시 피렌체의 세력가였던 메디치 가문이 적극적으로 이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렌체는 그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잘 만들어진 르네상스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베르디, 푸치니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 역시 피렌체가 낳은 인류의 보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발데제 교회를 탐방 한 후

 

선한이웃교회 김종은 목사

  12박 13일 동안 사도 바울의 선교발자취를 밟는 영적인 학습 학생스럽게 3끼를 꼬박 먹는 에너지 보충도 한 몫 하여 무탈하게 깊이 묵상할 여유는 없었지만 순간순간 나 자신을 한 인간이자 목회자로 숙연케 하는 경험들이 충분히 있었다. 참으로 선교탐방 과정의 발자국마다 감사할 뿐이다.

 이스탄불의 소피아 성당으로부터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원형극장 콜로세움, 바티칸의 그 웅장한 베드로 성당 등에 놀라움과 함께 가이드 말대로 “조상 덕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감상을 맘 놓고 느끼기엔 내 마음 한 편의 무거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나는 토리노 토레펠레체의 발데제 교회를 방문하면서 소박한 예배당 건물과 산업화 되지 않은 우리네 시골마을 같은 평온함, 수많은 성상과 성화에 치인 내 눈 어디에도 발도의 초상화나 동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순간, 차량이동 중에 들려 준 홍 목사님의 발데제의 순교역사가 교차되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마음의 체증이 확 뚫렸다.

 

   
▲ 또리노 시 토레펠리체의 발데제 교회

 눈 덮인 몬테비앙코,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움에는 발데제 성도들의 고귀한 순교의 피가 있었다. 발도는 종교개혁운동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1517년보다도 400여년 전에 종교개혁운동을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발데제 교회를 태동케 한 발도는 리용에서 1135년에서 1140년경으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포목상을 하는 아버지의 생업을 이어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유한 상인이 되었다.

유럽에 기근이 심했던 해인 1176년 5월 어느 일요일,  여행중인 어느 방랑 음유시인이 길거리에서 부른 마태복음 19:21에 관계된 노래를 듣고 회심을 하게 된다. 그 후 발도는 라틴어로 쓰여 진 성서를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직접 읽는 가운데 오직 성서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성서에 근거하여 평신도 설교와 여자들의 설교를 허락하였고,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으며, 중보자는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며 성인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순회 설교를 통해 선포하였다.

결국 교황 루키우스 3세는 1184년 11월 4일에 칙서를 발표하여 발도파들을 파문하고 리용에서 추방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발도파를 은닉하여 주거나 음식물을 제공하거나 그들의 설교를 듣는 자는 모두 재산을 몰수당하고 불경죄로 고발될 것이며, 발도파에 가담한 자는 사형과 신체절단을 제외한 어느 형벌이든지 내릴 수 있다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발도파는 극심한 탄압을 피해 알프스 남단 이탈리아의 피에몬테(Piemonte) 골짜기에 피신하여 700여년 동안 숨어 살았다. 발도파 교인들은 동굴사이의 비밀통로들을 통해 박해를 피할 수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군대에 의해 포로로 잡혀 절벽 위에서 거꾸로 집어 던져지거나, 그들이 숨어있던 굴 입구에 나무더미를 쌓아올려 불을 붙여 연기에 질식해 죽거나 타 죽었다. 불이 꺼진 후 군대들이 굴 안을 수색해 보니 1000명 이상의 시체들이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시체도 많았다. 이 도피네에서의 십자군 공격으로 적어도 3000명 이상의 발도파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한 예일 뿐 수 백 년에 걸쳐 박해는 지속적이었다.

그러다 1848년 2월 17일 카를로 알베르토(Carlo Alberto) 사보이 공작에 의한 해방법령이 공표되고서야 비로서 모든 인권이 영구히 보장 받게 되었다.  1979년부터 이태리 내의 발데지 교단과 감리교단은 같은 시노도 안에서 서로 한 교단으로 연합하였고, 1993년 이후부터 이 연합체는 < Chiesa evangelica valdese, Unione delle chiese metodiste e valdesi >라는 이름을 가지고 공식 종교단체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현재 발데지-메토디스테 연합체는 이탈리아 안에 약 30,000명의 성인 신자들이 있으며 어린이를 포함하면 약 50,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약 140여개(발데지 교회가 90여개 감리교회가 40여개)가량 있고, 목사는 100여명 가량 되는데, 여기에 한국교회인 로마연합교회도 회원교회로 등록되어 있다.
 

   
▲ 발데제 총회에 그려진 나무그림

 방문한 발데제 예배실 옆 회의실안 정면 벽을 채우는 그림이 있다. 나무를 자세히 보면 잘린 가지가 듬성 듬성 있는데 순교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순교자의 피가 무성한 잎처럼 복음으로 활짝 폈다.

로마의 박해조차도 발데제 성도들의 복음을 막지 못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은 저항이 아닌 모두가 하나 되어 연합된 평화의 중심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나무 중앙에 성경이 있고 그 말씀은 “죽도록 충성하라”이며, 그 밑 라틴어에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이 탐방 후에도 여전히 내 마음에 거룩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 이탈리아쪽의 알프스 산맥 몬테 비앙코

  아름다움과 슬픔의 일교차 몬테비안코를 읽다.

 

선한목자교회 조성철 목사

  이탈리아 여정 다섯째 날, Western park 호텔을 향하여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기대로 가슴이 떨려왔다. “킹스맨 : 골든타임”에 나온 그 유명한 곤돌라가 있는 몬테 비안코를 올라간다니 이건 기적이다 기적이야!

가는 길에 창밖으로 펼쳐진 이탈리아의 대지는 물을 머금고 자란 보리밭 같다. 드넓은 푸른 초장위에 금방이라도 달려와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플랜더스의 개가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다. ‘파트랴슈~~’ 하고 부르는 소년 넬로의 목소리가 언 듯 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조금 지나자 저 멀리 기대하던 아름다운 몬테 비안코가 먼 산과 함께 겹쳐 보인다. 바위 하나하나에 푸른 이끼를 입힌 듯한 산 너머로 만년설이 어우러져 펼쳐졌다. 산 끝자락 작은 마을들이 미니어처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전경에 봄꽃과 푸른 초원이 만년설과 함께 어우러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마치 초코바에 흰 눈을 뿌려 놓은 듯한 산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호텔에 도착하니 눈앞에 산이 더욱 선명하다. 저산을 오르면 킹스맨에서 보았던 그 곤돌라를 드디어 타는 구나!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이토록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은 몬테비얀코에 대한 기대도 있겠지만, 그 만큼 공기가 깨끗하다는 이야기일께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도착한 몬테비안코, 우리는 표를 끊고 들뜬 소녀와 같이 곤돌라로 향했다. 이곳 이탈리아에서 타는 곤돌라는 360도 회전하면서 올라가기 때문에 어느 쪽에 타도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금 48유로가 정말 전혀 아깝지 않은 명소라고 할 수 있다. 곤돌라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온다.

   
 

간혹 곤돌라가 급속도를 내기도 하고, 멈추는 바람에 급기야 사모님 한 분은 등반을 포기하시고 말았다. 그러나 사모님께는 미안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만년설에 모두가 즐거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몬테비안코는 이탈리아어로 몬테비안코이고 프랑스어로 몽불랑인데 정상은 4,810미터이다. 숫자에 약한 우리에게 잘 다가오지 않기에 말로 풀어보자면 아파트 한층 높이가 대략 2.6M이니 아파트 1,850층의 높이가 이 산의 높이이다. 이탈리아어 Monte와 Mont는 산이라는 뜻이고, Bianco와 Blanc는 하얀(白)이라는 뜻으로 제일 높은 산이라서 만년설에 사계절 내내 눈이 녹지 않아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드디어 곤도라를 타고 도착한 정상, 눈앞에 펼쳐진 만년설에 모두가 들떠 비명을 질렀다.
아, 이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그런데 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산에 눈물이 고여 있고 피가 묻어 있다니 놀랍다. 어느 곳 하나 아름답지 못한 곳이 없거늘 그 산이 눈물을 머금고 슬픔을 담고 있단다. 발데제교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골짜기에 피신하여 700년 동안 숨어 살면서 온갖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집을 짓고 농장을 개간하며 살다가, 탐욕스런 가톨릭교회에 의하여 그들 대부분이 노략당하고 학살당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깊은 알프스 계곡으로 쫓겨 들어가 지내다가, 끝끝내 혹독한 겨울 추위로 인해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순교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라니……. 흰 눈에 뿌려진 선혈이 자욱한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라니……. 배고픔, 내려놓음, 고난, 순교 이것은 우리들에게 꺼려지는 십자가지만 바울에게는, 그리고 이곳에 피를 뿌린 발데제교도들에게는 그것이 면류관이요, 자랑이었음을 이곳에서 눈이 시리게 배워본다.

  『백년의 고독』으로 198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라는 말로 정리했다면, 이들 순교자들은 그들의 인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라고 정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고, 또 앞으로의 나의 인생은 어떤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우리 주예수를 위하여 살고 있는 인생으로 정리되어져 가고 있는 것인가? 이곳 아름다운 몬테비얀코에서 다시 한 번 목회 여정을 정리하며 물음표를 달고 돌아온다.

이공일팔년 4월에 군포의 선한목자교회 지킴이가...

 

   
▲ 그리스 파트모스 항구를 떠나 바리항구에 도착
   
 
   
▲ 바리항구
   
 
   
 

 

   
▲ 폼페이
   
▲ 폼페이
   
▲ 폼페이

 

   
▲ 포로된 바울이 도착한 보디올 항구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찌에 교회
   
 

 

   
▲ 바울의 참수
   
▲ 사도바울 순교 기념교회로 들어가는 길
   
▲ 바울순교기념교회
   
 
   
 
   

▲ 쿼바디스 도미네 교회

   
▲ 카타콤 입구
   
 
   
 
   
▲ 베드로가 로마로 돌아간 아피오 길
   
 


 

   
 
   
▲ 바울이 갇혀 있던 마메르티눔
   
 
   
 
   
 

 

   
▲ 중앙연회 유럽지방 로마연합감리교회 주일예배
   
 
   
▲ 설교하는 김경호 감리사
   
 
   
 
   
 

 

   
▲ 트레비 분수와 로마의 휴일
   
 
   
 
   
▲ 베네치아 광장의 통일기념관

 

   
▲ 바티칸
   
▲ 바티칸 안뜰.
   
 
   
▲ 바티칸 박물관
   
 
   
 
   
▲ 바티칸내의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그림
   
▲ 최후의 심판
   
▲ 바티칸 베드로 교회
   
 
   
▲ 바티칸 정원
   
 
   
▲ 바티칸 한국대사와의 만남
   
 

 

   
▲ 성 프란시스코
   
▲ 아씨씨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 아씨시 산타 마리아 대성당
   
 
   
 
   
 
   
 
   
▲ 산타 끼야라 성당
   
 
   
▲ 성 프란시스코의 부모 동상
   
▲ 성 프란시스코 성당
   
 
   
▲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 피렌체 광장
   
 
   
▲ 피렌체의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두오모)
   
▲ 피사의 사탑

 

   
▲ 또리노 시 토레펠리체의 발데제 교회
   
▲ 또리노의 첫 종교개혁자 발데제 동상
   
 
   
▲ 발데제 문화원
   
 
   
▲ 카사 발데제(발데제의 집)
   
   
▲ 매년 8월 마지막주에 열리는 이태리 발데제-감리교 연합총회장 시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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