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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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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9월 10일 (화) 22:47:44 [조회수 :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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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의 사람들로부터 ‘영광’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강연회 같은 데에서는 강사가 ‘이렇게 여러분께 말씀 드리게 되어 “영광”’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자기를 소개하며 상대방에게 ‘뵙게 되어 “영광”’이라 하기도 한다. 축구의 손흥민 선수의 보모님이라면 아들이 대견하여 가문의 ‘영광’이라 할지도 모른다. 자식이 서울대 같은 스카이대에 입학만 해도 영광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어 얻은 명예 같은 것을 ‘영광’이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의 ‘영광’은 어떠한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또 어떠한 것일까. ‘영광’의 헬라어는 ‘독사(δόξα)’이고 히브리어로는 ‘카보드’(כבוד)인데, 하나님은 그 자체가 ‘영광’이시다. 그 거룩하심, 지존하심, 완전성, 초월성, 탁월성, 장엄, 위엄, 권능 같은 그분의 본질이 ‘영광’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 ‘긍휼’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기저(基底)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시라고 한 적이 있다(출33:18).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름, 불, 우레 같은 간접적인 형태로만 보아 왔기 때문에 직접적인 ‘영광’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을 덮는 구름이라든지 성막위에 머문 구름, 불기둥 같은 것들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며 영광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라는 모세의 말에 “내가 내 선한 모든 것들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19)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한 모든 것’은 그분의 많은 본질적 속성을 대표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 여호와의 전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니 여호와의 ‘선한 모든 것’과 ‘여호와의 이름’은 거의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세가 보고 싶다고 한 ‘주의 영광’, 그러니까 ‘여호와의 영광’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20)이라고 말씀하신다. 거룩하고도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들이 감히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분이신 것이다. 부정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도 살 수 있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이어서 말씀하신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2-23)라고.

하나님의 모세를 향한 사랑이 잘 드러난 말씀이다. ‘반석 위’(21)에 서 있다가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가능성이 크고, 그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반석 틈에 두’셨고,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셔서 당신께서 다 지나가실 때까지 당신의 손으로 모세를 덮어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하셨던 것이다.

인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굴’은 그 사람을 대표하고 ‘등’은 그 사람의 가장 후미진 부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은 결국 당신의 영광은 당신의 얼굴에 나타나 있고, 등에는 그 영광이 그늘만이 드리워져 있다는 말이 된다. 모세가 본 것은 그런 등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것이다.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것, 고유의 것으로 인간들이 어떻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영광을 돌려 드린다 해서 더 커지는 것도 아니다. 태양은 본래부터 빛이 나고, 얼음이 본래부터 차가워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어서 그 속성을 바꿀 수 없듯이 하나님은 태초부터 영광 그 자체이심으로 누구도 그것을 더하게 할 수도 덜하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방법

 

다만 인간들이 영광을 돌려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느끼시고 기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 그분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는가. 바울은 “내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빌1:20)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그러니까 우리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설마한들 예수께서 부족한 데가 있어 그것을 보완한다는 말은 아닐 테고…. 우리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환언하면 주인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 몸 안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인가.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들 한다. 이래도 하나님의 뜻이요 저래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저것도 하나님의 뜻이란다.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정의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고도 한다. 일정부분 맞는 말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별소리를 다 듣는다며 어안이 벙벙해 할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 방대한 성경 66권의 가르침대로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방대한 성경말씀도 단순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해진다. 사랑, 이 한 마디로 요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결국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느냐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것으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라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도움심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예수님의 ‘빛’과 사람의 ‘빛’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착한 행실’의 진수는 ‘사랑’이고, 사랑이 없는 행실은 그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착하지 않다. (사랑 장이라고 하는 고전 13장은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빛’이 곧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사실을 말하면 참된 빛은 사람 스스로는 낼 수가 없다.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요14-13 참조).

예수님께서는 또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마5:14)이라 하실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를 보고도 “나는 세상의 빛”(요8:12)이라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빛’과 예수님의 ‘빛’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빛’을 가리켜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여 비추는 반사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안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빛’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시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 말하는데, 자신의 안에 품은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으로 살 때 우리는 ‘착한 행실’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착한 행실’을 ‘빛’이라 말씀하시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마5:13)이라고도 하시고,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과 ‘향기’의 셋은 의미상에 있어 대부분이 겹쳐진다.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빛’이 되고, 미각적으로는 ‘소금’, 후각적으로는 ‘향기’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살면, 우리 안에 모시고 있는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면 우리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빛이 난다. 향기가 나고 자신을 소금으로 녹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살맛이 나게 하는 맛을 낸다. 내가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그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착하게 사는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기만 한가

 

지난 번 글에도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전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쪽박을 찬 노숙자가 되라고는 하시지 않는다. 부모자식을 버리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사지로 나가 순교를 하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안에 모신 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고 기도하는 가운데 노력하며 살라고 말씀하신다.

교사라면 가르치는 은사를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게 해 주시라 기도 하며 노력하라 하실 것이다. 회사원이라면 회사 일을 자기 일처럼 성실하게 하라 하실 것이다. 문제는 어떠한 일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마6:19)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20)라 말씀하시고는,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21)라고도 말씀하신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것이 됐던 여기에서 말한 보물이 되는데, 그 보물로서의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쓰라는 말씀이다. 사회적 약자와 나누기도 하고 선교를 위해 쓰기도 하며 헌금도 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헌금’이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건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하는 헌금이 정말 요긴한 하나님의 일에 보다 그렇지 않은 데에 쓰이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헌금이 진정한 헌금이 되도록 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살짝 곁길로 빠졌는데, 하여튼 우리는 물질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써야 한다는 것은 재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써야 할까. 다다익선? 아니다. 그러하면 결국 쪽박을 찬 노숙자가 되고 말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 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어렵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쓰기 위해 절약하고 절약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면 된다.

어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기도하며 노력하는 가운데 검소한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물질을 쓰는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인데 그리 쉬울 수가 있겠는가. 쉽지 않으니 남다른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 쉽지 않으니 기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예수 믿기 참 좋은 시대의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가 빈들에 말라비틀어진 풀 같이 고생에 찌들어 살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그런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우리가 어떠한 더럽혀짐도 상실됨도 없이 온전하게 충실함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한 송이의 장미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 말할 수 없이 그윽한 향기를 발할 때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듯 말이다.

필자는 앞에서 헌금을 말하며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교회가 고쳐 나가야 할 것이 어디 헌금뿐인가. 교회들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향기를 발할 수 있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교회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성도들이 그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특히 대형 교회의 성도들은 갈수록 거대해져가는 조직의 위력에 위축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의 성장 아닌 몸집불리기의 부품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는 경향이 있다. 몸 된 교회라는 말을 앞세워 교회 아닌 조직을 우선시하며 천하보다 귀한 성도 개개인의 존재는 무시되기 일쑤가 아닌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이다. 교회의 부품이 아니라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다. 지체인 내가 건강해야 몸인 교회가 건강하여 성장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내가 건강하여 아름답게 꽃을 피워 향기를 내야 하는 이유이다. 교회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존재로 여겨야 하는 연유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피워야 할 꽃은 세상 사람들이 피우는 꽃과 다르다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명성을 얻고 자식들이 출세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인생의 꽃이라 생각하고 영광이라 여기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피워야 할 꽃과 누려야 할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요13:31)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가 당신을 팔아넘기려고 나갔다는 것을 알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영광을 받은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이 된다.

넒은 의미로는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를 가리켜 영광이라고 한 것이 맞지만, 방점은 역시 죽음에 찍혀 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라는 말에 이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을 기록한 기자 요한이 예수님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것을 말해 준다. 유다가 나간 후에 가장 먼저 일어난 큰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고 승천도 있을 리 없다. 예수님의 죽음이 ‘영광’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라고는 하시지 않는다. 전술한대로 사지로 가서 순교하라고 하시지도 않는다. 삶 속에서 순교하라고 말씀하신다. 생활의 순교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세상적 손실을 아까워하지 말고 감수하라는 말이다. 출세를 위해 부정한 방법을 쓰지 말고 옳지 못한 이익도 탐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렵지만 그리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믿기 참 좋은 시대의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당했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핍박 아닌 칭찬이 따른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사랑으로 사는데 비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날 기독교가, 교회가,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비난을 받고 욕을 먹는 것은 ‘착한 행실’의 향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떠난 종교의 고질적인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예수 믿기 참 좋은 시대의 참 좋은 곳 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왜 이 모양일까. 우리 신앙의 조상, 선배들은 그 어려운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죽을지언정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고기를 살아 있는 채로 멀리까지 옮기려면 그 물고기의 천적을 수조 안에 넣는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물고기가 스트레스를 받아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죽어 버린단다. 그러나 천적이 같은 수조 안에 있으면 잡혀 먹히지 않으려 죽을 둥 살 둥 도망 다니느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목적지까지 도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데에 너무 장애가 없다보니 애먼 데에 정신이 팔리는 것이다. 보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라면 남을 발판으로 삼는 것은 예사요, 돈 몇 푼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비난의 대상도 되지 못한다. 천적 없는 수조 안의 물고기가 죽듯이 너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광, 나의 영광

 

출세하면 안 되고 돈도 모으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의 문제이다. 출세를 하건 돈을 모으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면 된다. 높은 지위에 있다면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요, “하지 아니 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 한 것”(45)이라 말씀하신 그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물질은 또 더불어 사는 데에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야만 그리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제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억만장자의 몇 억의 나눔이 일반서민의 단돈 몇 만원의 나눔보다 더 큰 건 아니다. 온 우주의 소유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질이 없어 우리에게 나누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힘이 없어 우리에게 사회적 소외계층을 도우라 하신 것 또한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믿음으로 성장시키시기 위해서이다.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한한 능력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쯤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바른 생각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본주의를 비판하며 인본주의를 말하여 인간중심의 삶을 강조하는데, 일견 그럴 듯한 것 같지만 언어도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겠지만 제 눈썹 하나 자의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결국 인간중심은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를 양산하여 오늘의 인간사회를 만들었다.

누가 인간을 하나님만큼 사랑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시다(요일4:16).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놓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할 것 같지만 아니다. 나의 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나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인본주의 어쩌고 하며 자신을 붙잡고 이기주의로 빠질 것인가. 지옥행을 탈 것인가.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이다. 누더기 같은 나를 하나님께 바치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나로 만들어 주시는데 왜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나를 바쳐 하나님의 마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나의 안에 품으면 나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빛이 난다. 향기가 나고 자신을 소금으로 녹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살맛이 나게 하는 맛을 낸다. 내가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그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하고 거룩하여 영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나의 영광이다. 그런 영광의 하나님을 나의 안에 모신 사실만으로도 크나큰 나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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