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화평의 왕 예수가 검을 주러 왔다고?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9년 09월 06일 (금) 13:29:05 [조회수 : 35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2장 51절에는 “검” 대신 “분쟁”이라고되어 있는데, 검은 분쟁 혹은 싸움의 환유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예수를 화평의 왕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를 화평의 왕으로 보아야 하는가, 싸움의 왕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성경에 두 가지가 모두 나와 있으니 예수는 동시에 두 가지 왕이란 말인가?


화평의 왕 예수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가 화평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야서에서는 메시아를 가리켜서 “평강의 왕”(9:6)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탄생했을 때,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했다. 마태복음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라고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하게 하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서 그가 화평을 주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러 가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쳤다. 용서를 가르치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했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겸손을 가르쳤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쳤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웃 사랑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에 주목해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화해, 용서, 사랑을 가르치고 몸소 행한 예수는 분명히 화평의 왕이다.


검이 필요한 경우

그런데 왜 예수는 자기가 화평의 왕으로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했을까? 그 말의 취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마태복음 10장 34-39절을 들여다보아야겠다. 예수는 36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언급한 다음 37절에서 자기 집안 식구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마지막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 집안 식구라도 예수를 따르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그 식구와는 싸워야 한다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검을 주러 왔다는 말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혹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과는 그들이 자기 식구들이라도 그들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때로는 그들과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언급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정의 며느리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시부모와 대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혹은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아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제사를 드리지 않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의절을 선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수가 말한 대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싸웠다.

예수 자신도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자기 식구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마가복음 3장을 보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를 붙들어가려고 나왔다. 그러자 예수는 그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훼방하려는 식구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말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는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려는 식구들과 절연한 셈이다.

이 일에 앞서서 예수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말하면서 그의 사역을 훼방했다. 예수는 실상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마 12:28)데,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방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마 12:31)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했다.

예수는 이렇게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사람들과는 타협하지도 그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보면, 예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위선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교회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그들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교인들을 오도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들이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을 박해할 것이라는 미래형의 언급에서는 그들이 앞으로 많은 복음 전파자들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아주 격앙된 비판을 가한 것은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그를 몰아세우는 그들이 예수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을 예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화평을 위해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가르쳤지만, 일면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에는 단호하게 비판할 뿐 아니라 생명을 걸고 싸우라고 가르쳤다.

이런 비타협적인 가르침은 특히 요한복음 14장 6절에 명시되어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강조할 때 흔히 인용된다.

특히 초대교회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이방민족과 맞섰던 것처럼, 유대교와 맞서서 예수가 메시아임을 변증해야 했기 때문에, 대립 혹은 투쟁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에 스데반으로 시작해서 야고보, 베드로 등 사도들이 순교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던 이방신과 맞서야 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 들어가는 선교사들은 순교를 각오한다.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혹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방해하는 자들과 맞서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이웃과 타협하지 않는 교인들

이런 비타협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에 대해서는 물론 정치적인 상황이나 일상생활에서도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 대해서 흔히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한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교인들은 흔히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이웃과 타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신실한 교인일수록 이런 비타협적인태도가 강하다.

우리는 그런 예를 한나라당의 대표가 된 황교안 전도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절의 행사에 가서 합장하지 않은 것은 불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가 황 전도사의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광복절의 대통령 경축사에서 박수하지 않은 데서도 나타났다. 그가 한나라당의 대표로서 장외투쟁을 반복하면서 강경투쟁을 일삼는 것도 그가 받은 배타적인 신앙교육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우리가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예수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구해준 것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온 그가 그 여인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불신이나 타종교와는 맞서되 불신자나 타종교인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죄와 죄지은 사람을 구분해서 대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해서 이 세상에 왔고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우리가 진정 예수의 제자라면 그의 이 사랑을 본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인들끼리도 반목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대화를 표방하고 보수적인 교단은 비타협적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만, 실상 진보적인 교단의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에게서도 타협하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학생들이 “공부는 진보적으로 목회는 보수적으로”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진보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목회 현장에서는 보수적으로 목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적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의 사람들도 보수적 교단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타협할 줄을 모른다. 그런 비타협적인 예는 진보적인 신학대학들에서 일어나는 분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학들의 이사들은 모두 목사들인데, 그 이사들이 상대와 타협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학들에서 분규가 자주 일어날 뿐 아니라 그 분규가 장기화한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분규가 해결되지 않고 관선 이사들에 의해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동료들과도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렇게 이웃과 타협할 줄 모르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예수가 죄인들을 사랑한 것, 그리고 원수를 용서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무색해진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화평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


마치면서

성경에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배타적인 가르침과 이와 상반되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화평의 가르침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배타적인 태도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을 만족시키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이타적이어서 우리의 이기적인 본능에 역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배타적이거나 비타협적인 데에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휩쓸리지만,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애써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행하는 것보다 믿음이 우선이기 때문에, 우선하는 것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화평의 왕으로 왔다고 말하면서도 화평을 이루는 일에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다 보니 화평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어서 대립하는 것 중에서 하나만을 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가 와해된 시대, 상반되는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양면수용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심지어 종교간의 대화를 촉구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지금은 대립보다는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시대다.

예수는 이미 2천 년 전에 검뿐 아니라 화평도 가르치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말했다. 이 다른 것 두 가지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시대의 요구이기도 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0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