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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목사의 최후 순간에 관한 여러 가지 서술들.
김택규  |  petertk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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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9월 01일 (일) 14:06:32
최종편집 : 2019년 09월 03일 (화) 23:47:16 [조회수 :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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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목사의 최후 순간에 관한 여러 가지 서술들.

 

   
 

토마스 목사는 처음부터 ‘선교사’로 승선했기 때문에, 셔먼호가 정박할때마다, 백령도에서부터 평양까지 배가 정박할때마다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과 전도서 등을 반포하며 전도를 열심히 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선교사가 아니었다면, 페이지 선장이 혹시 무역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해서 (당시 조선은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던 나라 아닌가?) 토마스목사의 선교활동을 제지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셔먼호가 불에 타서 침몰할때까지 뱃머리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던저주었고, 최후에는 성경몇권을 움켜쥐고 뭍으로 헤엄처 나가서 계속 성경을 전해주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칼로 처 죽인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전해주다가 순교를 당한 것이다.

토마스목사의 마지막 죽음을 맞는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이 있다. 참수당했다는 설, 참수가 아니라 가슴을 칼로 찔려 죽임당했다는 설, 분노에 찬 관민, 군중에게 맞아죽었다는 설, 칼로 난자당해 죽었다는 설 등이다.

사료(史料)나 기록들이 각기 기술(記述)이나 주장이 다를 경우, 무엇이, 어떤 설이 ‘진실’에 가까운것인가 하는 판단을 하는데 중요한 기준은 (1) 사건에 직접참가자, 혹은 목격자의 직접 증언, (2)사건 발생후, 시간적으로 일찍이 나온 자료, (3)기록자의 진정성 등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토마스목사의 죽음에 관한 기록의 사료(史料)로서, 가치있게 볼수 있는 몇가지 문헌을 찾아볼수 있다.

첫째는 조선 조정의 공식문서인 ‘고종실록’이다. 실록의 토마스목사 마지막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최난헌(도마스의 한국 이름)과 조능봉이 범선 뱃머리로 나와 강물에 뛰어들어서는 자신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서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하여 매맞아 죽었다.” 이문서는 중요한 ‘1차적 사료’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셔먼호 관련 기록은 승자인 평양측의 일방적 보고를 그대로 기술해놓은 것이고, 또 내용 서술이 오류투성이기 때문에 그 정확성, 객관성, 공정성을 신뢰할 수는 없다.

둘째는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안되는 1866년, 10월 30일에, 셔먼호가 처음 조선을 향해 출항했던 항구도시 지푸의 주재 미 영사 E. Stanford가 그의 상관인 북경주재 미국 공사 Anson Burlingame (당시 중국 전체에 나와 있는 미 외교관들의 수장)에게 보낸 ‘보고서’다. 그 보고서에는 “.... 그들은 본토인들에 의해 둘러쌓인후 손이 뒤로 묶여 포박되었으며 그런후 강변에 무릎이 꿀려져 참수를 당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를 포함해서 강변으로 나온 승조원들은 포박당하고 참수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시간적으로 사건 발생후 가장 일찍이 나온 자료임으로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사건의 그 진술은 목격자의 직접 증언이 아니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항로 안내 했던 중국인 우엔타이 정크선장이나, 특히 조선에서 탈출해온 프랑스 캐톨릭 신부들에 의해 전해진 정보였다.

셋째로, 사료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문서는 셔먼호사건이 발생된지 30년후인, 1895년에 나온 James S. Gale의 “The Fate of General Sherman: From an Eyewitness(제너럴 셔먼호의운명: 한 목격자의 증언)이다. 사건 당시 대동강변 현장에서 실제로 사건을 목격했던, 당시 18세의 청년 (게일 선교사가 교인이 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40대 말 장년이었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쓴 글이다. 증언자는 그때 ”백기를 든 한 두명이 강변으로 올라와 백기를 흔들며 계속 절을 했다..... 그들은 결박되어 난자당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백기를 든 한 두사람이란 토마스와 조능봉일 것이다.

네째로 60년후인 1927년에 나온 F.E. Hamilton의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 (한국의 첫 번째 개신교 순교자)를 들수 있다, 해밀턴은 토마스를 칼로 죽였던 ‘군인’의 후손들에게서 들은 증언을 토대로 토마스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 군인의 ‘조카딸의 아들’ 이영태는 숭실대 졸업생으로, 당시 ‘성경개정위원’인 레이놀즈박사의 비서로 일하며,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중요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해밀턴의 서술은 다음과 같다. ” ...토마스는 2주간동안 성경을 손에 들고 강변에 있는 군중들에게 소리치며 전도했다. .....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남은 성경을 강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자기손에 남은 한두권의 성경을 가지고 물에 뛰어들어 강가로 걸어나갔다. 토마스는 그를 죽이려는 한 군인을 만나 그에게 성경을 건네주며 받으라고 간청했으나 그 사람이 거절했다. 토마스는 모래에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아 기도를 하였다, 그런후 눈을 뜨고 그 군인에게 미소를 띄며 성경을 받으라고 다시 권하였다......드디어 그 군인은 칼을 들어 토마스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그가 후에 자신의 가족에게 말했던것처럼 그는 한 선한 사람을 죽였다고 느끼고 그가 죽인 그 사람이 떨어트린 성경을 집어 자기집에 가지고 왔다.”

다섯째로 오문환의 1928년에 나온 ‘토마스목사 전’을 들수 있다. 오문환은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서면호사건의 직접 참가자들 혹은 목격자들을 직접 만나 생생한 증언들을 수집했다. 또 그때까지 나온 그 사건에 관련된 문헌들을 집중 연구하였다. 특히 그는 영어에 능숙하여 학교에서 영어교수로도 활동했다. 그래서 그때 초기 선교사들이 기록한 셔먼호에 관련된 여러 문헌들을 참고할수 있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토마스 목사전’이기 때문에 그의 책은 셔먼호 사건과 토마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오문환은 토마스 목사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뱃머리에서, 한손엔 백기를 들고, 한손엔 성경을 들고, ‘야소(예수)’라고 소리치며 강변에 있는 군중을 향하여 성경을 뿌렸다. 이것은 당시 20대청년으로, 후에 평양의 항 장로교회 초대신자가 되고, 지금은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교회에 다니는 80 고령의 황명대씨가 그 증언을 한 것이다...... 화염에 쫓겨 마지막으로 1권의 성경을 손에 들고 배에서 내려 언덕으로 나아가자, 한 군인이 달려든다. 토마스목사는 인자한 태도로 그 군인에게 성경받기를 권하매, 그 군인이 들었던 칼을 잠간 멈추었다. 그동안 토마스목사는 두 무릎을 꿇고 머리숙여 땅에 대인후 얼마동안 최후의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서 다시 군인에게 성경받기를 권했으나.....마침내 칼을 그 가슴에 대어 하나님의 충복 토마스목사의 생명을 빼았고 말았다.” , +)

위에 열거한 토마스의 최후 장면 기록들은 대부분 목격자나 그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그리고 비교적 일찍 나온 것이기 때문에 서로 서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자료들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서술들 일부를 인정한다면, ‘토마스목사의 마지막 순간’들은 대체로 다음과같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우선 승조원들이 성난 군중에 의해 무조건 맞아죽었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거기에는 각지에서 차출되어온 군인들의 수가 엄청 많았다. 평양감사의 지휘 아래 군인들이 현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백성들이 죄인들을 맘대로 처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추정해볼수 있다. 조선 시대에 실제 참수를 집행하는자는 ‘망나니’라고 따로 있었다. 그들은 단칼에 목을 쳐 죽이는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그때 대동강변에 있던 군인들은 사람의 목을 쳐본일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형을 집행하는 군인이 칼을 들어 목을 첬어도 금방 죽지 않았을수도 있다. 그러므로 추후에 다시 칼을 들어 가슴을 찌르거나, 또 다른 군인이 여러번 칼질을 했을수도 있다. 그래서 ‘칼에 찔려’, 혹은 ‘난자당해’ 죽었다는 증언이 나왔을 것이다.

토마스 목사의 경우는, (1) 토마스가 백기를 들고 강에서 올라오자, 한 군인이 그에게 닥아왔다. (2)칼을 든 군인에게 토마스는 절을 하며, 부드러운 태도로 성경받기를 권하였다, (3) 군인은 성경받기를 거절하며 토마스를 결박했다 (4) 토마스는 참수되기전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를 했다. 사람들은 그가 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 보았다, (4)기도를 마친후 토마스 목사는 미소를 띄고 군인에게 성경받기를 다시 권했다. (5) 군인은 칼을 들어 토마스의 목을 쳤다. 쓰러진 토마스가 즉사하지 않자, 군인은 다시 칼을 들어 그의 가슴을 찌름으로, 토마스를 숨지게 했다. (6) 그 군인은 자기가 선한사람을 죽인것이라는 자책을 하면서 땅에 떨어저있던 성경책을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군중들에 의해 ‘매맞아 죽었다’는 기록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고종실록에 수록되어있는 “그들 모두는 체포되어 묶여져 강변으로 끌려왔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곧 성난 백성들과 군인들에 의해 매맞아 죽었다“ 라는 기록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먼저 짚어 보아야 할 것은, 당시의 조선 문서들은 오류나 혹은 거짓 기록들이 있어서 그 정확성을 신뢰할수 없는것들이 많다는것이다. 추후 조선정부가 중국정부의 예부’에 보낸 셔먼호사건 해명서에서도 ”미국배가 불에 타버렸다거나 선주와 선원 24명이 붙잡힌 일은 없다.... 와전된것이다“라는 거짓말을 했었다.

고종실록이 기록하고 있는 셔먼호 승조원들의 죽음에 대한 서술도 일부 거짓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사건에 참가했던 당사자나 그 후손이나 또 현장 목격자들이 ”칼에 맞아 죽임당했다”고 추후에 진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종실록은 왜 그런 기록을 남겼을까? 한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그 실록의 기록은 평양 감사 박규수가 조정에 보낸 ‘보고서’ 에 있는 내용이다. 우선 그 기록에 모순이 있다. 먼저 ‘승조원들 모두를 체포, 포박하여 강변에 끌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 승조원들을 체포, 포박했겠는가? 군인들이다. 죄인들을 체포했으면 군인들은 응당 그들을 상관에게 데리고 가야 한다. 어떻게 군인들과 백성들이 맘대로 죄인들을 때려죽일수 있겠는가? 그때 총 지휘를 했던 박규수 평양감사에게 죄인들을 일단 끌고 갔었다는 서술도 있다,

그러면 평양 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승조원들을 참수해 죽였는데, 왜 ‘모두 성난 군인들과 백성들에 의해 모두 ’매맞아죽었다’라는 보고를 했을까?

박규수 감사는, 암행어사 활동을 뛰어나게 할 정도로 우수한 머리를 가진 관료였다. 그는 중국의 수도에 갔을 때, 거기서 발달된 서양문물들과 서구국가들의 강한 힘의 일부를 보고 온 사람이다. 또 그때는 대원군이 프랑스 천주교신부들을 죽인것에 대한 응징으로 중국에 와 있는 로즈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조선으로 처들어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실제로 그때 프랑스군은 조선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그때 그 함대에 승조하여 조선으로 가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반란이 발생하므로 그 계획이 연기되었었다.

그런데 셔먼호의 승조원들은 그 당시 강대국인 영국과 미국의 시민들이다. 상국으로 모시는 청국인들도 16명이나 된다. 지금은 집권자 대원군의 명령으로 셔먼호 승조원들을 다 죽였지만, 차후에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알수없는 것이다. 혹시 살해당한 승조원들이 속한 강대국들 측에서 책임을 묻는 일이 생길수도 있는 것이다. 청나라 백성 16명 살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청나랄로 끌려갈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후일 개화파의 우두머리가 될 정도로 국제 정세를 좀 알고 있는 정치인이다. 박규수로서는 그런 차후에 생길수 있는 어떤 문제에 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난 병졸들과 백성들이 승조원들을 다 때려죽였다’라고 보고를 한 것이다. 승조원들의 살해 책임을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 추후에 생길수 있는 ‘책임문제’에 모면을 시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추후에 미국측에서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과 손해배상등을 거론할 때 조선정부측은 ‘그것은 셔먼호가 악행을 저질러, 성난 군중들에 의하여 배가 불탔고 승조원들이 죽임당한 것이다, 정부는 관여되지 않았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보면, 실록의 기록도 그런 차원에서 거짓으로 기록해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아닌가?

 

1980년대부터,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 역사학자들의 행보가 ‘좌향 좌’가 되면서 토마스 선교사 연구에서 그를 ‘순교자’로 볼수 없다는 반론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이만열(당시 숙대 교수)이었다. 그는 1985년, ‘한국교회사 특강’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것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1988년 출간한 ‘한국기독교회 100년사’에서도, “대포로 중무장하고 들어온 상선의 ‘통역사, ’항해사‘인 토마스를 순교자로 평가할수 있느냐”는 식으로 의문을 제기 했다.

그런데 그의 ’특강‘이나 그의 책에서 이만열은 학자로서의 토마스 연구 과정에 의심이 가는, 한 기초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토마스의 선내 신분을 ’항해사, 통역사‘라고 했고, ’그 배의 인도자로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논한대로 토마스목사는 그 배에서 공식 통역사도 아니고, 더구나 ’항해사‘는 아니었다. ’항해사‘는 함선에서 선장 다음의 중요 간부인데, 토마스는 항해사 자격이나 경험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또 대동강 항행에 전혀 경험이 없는 토마스목사가 ’배의 인도자‘로 왔다는 것도 ’엉터리‘서술이다. 토마스목사의 제너럴 셔먼호에서의 신분은 ‘승객’이었다.

1994년에 한 좌파 역사연구회가 발간한 ‘한국역사’에서는, “미국은 ...태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면서 조선도 개국시키고자 하였다. 1866년 7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열강중 최초의 침략을 도발하였다.“ 라며, 이 사건은 전형적 ‘미제국주의 대외정책 반영’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일개 상선이 무역을 하려고, 미국정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 조선에 들어온 것을 ‘미국의 침략’이라고 외곡하고 있다.

2005년 한규무(광주대 교수)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문제 검토’에서 ‘대포를 장착하고 중무장을 한 선박을 타고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다고... 선교로 볼 수 없다.’, ‘불법으로 입국해서 전투를 벌이다가 죽은사람을 순교자로 둔갑시킬수없다’ 는 논지의 글을 발표했다.

이와같이 토마스목사의 조선 입국동기와 과정에 대해 ‘선교’라고 볼수없다는 주장 및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순교가 아니다라고 판단하는데는 그들이 사료(史料)나 자료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볼수 있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하는 글을 쓴이들이 보여주는 역사 인식 저변에는 ‘오도된 민족주의’와 ‘반미적’인 ‘평향적’ 시각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좌편향 학자들의 셔먼호와 토마스목사에 대한 시각은 북한의 것과 일치되는 부분들이 많다. ‘셔먼호 사건에 관하여는 북한이 더 깊이있게 연구했다’며 북한측 자료들과의 연관성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한다. 이미 언급했지만 북한의 셔먼호사건에 대한 역사 서술은 ‘반미’, 오도된 민족주의. 김일성 우상화‘라는 기초위에 세워진 외곡, 허위, 날조의 ’가짜(fake)역사‘다.

기독교인 및 사역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를 ‘순교자’로 인정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국가’가 아닌 나라에서는 국가나 ‘상아탑’이나, 어떤 다른 기관이 간여할 사안이 아니다. 어떤 ‘죽음’에 대하여 공(公)교회가 그것을 ‘순교’라고 정하고 기념할 때는, 그에 관한 충분한 근거나 연구없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의 활동을 ‘한국에 온 첫 선교사’, 그의 죽음을 ‘한국에서의 첫 순교자’로 단정한 것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과 또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미국의 모(母)교회였다. 그때 한국에 파송되어 왔던 미국 선교사들은 학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신학) 석사학위소지자들이다. 박사학위를 소지한 선교사들도 많았다. 선교초기에 미국 교단 선교부측에서 우수한 목사들을 조선에 선교사로 보낸 것은 그때 조선을 ‘독립 왕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선교사들이 충분한 근거나 연구없이 토마스 목사를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첫 순교자’로 단정했겠는가?

한국에 온 미국교회의 첫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토마스가 한국에 온 첫 선교사요 첫 순교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평양지역 선교의 개척자. Samuel A. Moffett 은 1909년 ‘한국의 전도사역’이라는 논고에서 토마스목사를 ‘한국에 들어온 첫 선교사’라고 밝히고 있다. 인천 및 강화지역 선교개척자인 감리교회 선교사 Herbert Jones 등도 토마스를 한국에 온 첫 선교사요 첫 순교자라고 했다. 1927년, Floyd E. Hamilton 은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라는 논고를 ‘Korea Mission Field'에 실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토마스목사를 ’한국에서의 첫 순교자‘라고 단언하였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인 그는 당시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활동했던 지성파 목사다.

1925년, ‘평양노회지경 각교회사기’가 강찬규, 김선두, 변인서의 편찬으로 나왔는데, 거기서도 토마스 목사를 한국의 첫 순교자라고 단정하였다, 1926년 제 14회 장로교 총회에서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정하고,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듬해인 1927년에는 ‘토마스목사 순교 기념전도회’(회장, Moffettt 선교사)가 설립되었다, 1928년엔 오문환의 역작 ‘토마스목사전’이 나왔다. 1932년에는 평양 조왕리에 ‘토마스목사 순교기념교회’가 세워졌다, 1934년에는 ‘미 북장로교회 선교사 1권,1884-1934’이 나왔는데, 그 서두에 토마스목사의 한국선교와 그의 순교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기재되어 있다. 한국 선교를 시작했던 모교회가 토마스의 선교와 순교를 인정한 것이다.

특히 1966년에는 한국의 장로교회, 감리교회 등 여러 교단들이 토마스 선교사 ‘순교 100주년’을 기념했다. 일부 좌편향 학자들은 마치 어는날 갑자기 토마스목사가 ‘순교자’로 둔갑된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것처럼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일관되게 토마스목사를 한국땅에 온 첫 선교사, 최초로 이땅에 피를 뿌린 첫 순교자로 인정하고 기념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입구 벽에는 토마스목사 순교 장면을 그린 대형 그림이 지금도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1866년, 그때 토마스 목사는 최초로 한국땅에 구원의 복된 소식을 뿌린 ‘복음의 개척자였다. 그가 대동강변에서 뿌린 성경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되었다는 것은 그후에 나온 초기 선교사들의 글이나 ‘토마스 목사전’ 책 등에 수록되어 있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토마스를 칼로 죽인 군인까지도 토마스가 죽기전에 건네준 성경책을 집으로 가져가 읽으므로 예수를 믿게되어 평양 교회의 초대신자가 되엇고, 그 가정이 다 믿는자가 되었으며, 조카 손주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를 도와 한글 성경번역에 헌신하는 교회 역꾼이 되었다,

그때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받았던 12살 소년 최치량은 그후 평양지역 교회 초기교인이 되었으며, 오문환이 ‘토마스전’을 쓸 때 그는 평양 인근 교회의 장로였었다. 사건때 본부 응수로 활약했던 박영식은 땅에 떨어져있던 성경책들을 주워 모아 집으로 가져가서 벽지로 사용하여 도배를 하였다. 그후 그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집을 그후 최치량이 사서 여관을 경영했는데, 추후 그 여관에 언더우드, 마포삼열 등이 그 여관에서 묵으며 성경책을 찢어 도배된 그 벽을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최치량은 그가 목격했던 장면 등을 선교사들에게 얘기했었다.

셔먼호 사건때 (퇴역)교졸로 ‘화공’작전 등으로 크게 활약하여 나중에 조정으로부터 ‘오위장’ (혹은 진장) 특전을 받았던 박춘권은 역시 토마스 목사가 던저준 성경을 집어들고 집에 가서 읽으므로 기독교인이 되어, 평양교회의 초대 신자가 되었고, 그후 교회의 ‘영수’까지 되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다 초기에 나온 토마스목사에 대한 글이나 책에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본인 혹은 후손들에 의해 살아있는 ‘증언’으로 수록되어 있는것들이다. 그후 평양에는 수많은 교회가 들어섰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붙을정도로 한국 신잉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 용인에 있는,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마당에는 하나의 커다란 돌 비(碑)가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교부 터틀리언이 말했다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이 새겨져있다. 1866년 10월 5일, 평양 대동강변에 뿌려진 27세의 젊은 목사 Robert Jermain Thomas 의 순교의 피는 그후 한국땅에 기적적인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의 밑거름과 씨앗이 된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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