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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과 목사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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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23일 (금) 16:40:01
최종편집 : 2019년 09월 23일 (월) 02:01:48 [조회수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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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그동안 모았던 책들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버리려고 하는데, 그 책들 중에 내게 필요한 책이 있다면 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의 목록을 적어서 가지고 갈 테니 그 중에서 읽을 만한 것을 골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수고스럽게도 20여 권의 책 제목을 적어가지고 왔다. 모두 좋은 책이었지만, 나도 책을 버려야 할 판이기에 그 중에서 5권만을 골랐다.

그 중의 한 권이 법정의 『텅 빈 충만』이었다. 내가 법정의 책을 고른 것은 전에 그의 『무소유』에서 그의 삶에 대한 지혜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안 신학자들의 책과 성경에 매달려 왔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가벼운 글을 읽으면서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교인이 성경을 읽어야지 왜 승려의 책을 읽는단 말이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인이 법정이나 법륜의 책을 읽거나 법륜의 즉문즉답에 귀 기울이고 있다. 왜 그들이 승려들의 책을 읽을까? 목사들도 일반인들이 읽을 만한 책을 낼 수는 없을까? 목사들이 그런 책을 내지 않는 것은 승려와 목사의 삶이 다르기 때문일까? 혹은 신앙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일까? 법정의 책을 읽으면서 이런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법정과 목사의 삶의 차이

나는 법정의 『텅 빈 충만』을 읽으면서 그의 『무소유』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방면에 걸친 법정의 학식과 활동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고, 음악을 좋아하고, 고미술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은 물론 신학자들의 책도 탐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함석헌이나 장준하 같은 인사들과도 같이 일했고, 놀라운 것은 수녀들이나 신부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그 책 여기저기서 성경을 인용하기도 하고 어느 신부에게서 받은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내가 부러워한 것은 그가 산속의 암자에서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한적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는 점이다. 찌르레기가 처음 운 날은 4월 9일이고, 모란이 피어나는 밤에 소쩍새가 함께 목청을 열은 날은 4월 16일이고, 꾀꼬리가 처음 운 날은 5월 6일이라고 수첩에 적어둘 만큼 삶에 여유가 있었다. 이 바쁜 세상에서 부대끼다 보면 우리는 모란이 피는 것도 보지 못하고 꾀꼬리가 우는 것도 듣지 못하는데, 그는 그것들이 처음 피고 운 날짜를 노트에 적고 있었으니 얼마나 여유로운 삶인가?

그는 승려로서 수도에 정진하면서도 가끔 한 달씩 암자를 비우고 여행을 하거나, 한동안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도 하고, 시간을 내서 글을 쓰기도 했다. 혼자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그는 처자식을 위해서 돈을 벌 필요도 저축을 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일을 위해서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산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승려로서의 그의 여유 있는 삶을 대하면서 대조적으로 목사들의 삶은 너무도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은 혼자 살고 있는데, 목사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당회장으로서 교회를 이끌어가는 책임이 그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열 번 이상 공적인 예배에서 설교해야 하고, 새벽부터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고, 경조사에 관여하고, 이사한 집, 개업집, 병원에 입원한 환우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 외에 교인들과의 개별적인 교제나 교인들의 상담에도 응해야 한다. 또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라 비난에 시달리기도 한다.

목사에게는 차의 맛을 음미할 여유가 없다. 마을이나 도심에 살고 있는 목사는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지도 못한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목사에게는 시나 소설을 읽을 시간도, 음악을 감상할 시간도, 미술품을 감상할 여유도, 설교 준비에 쫓기다 보면 한가롭게 글을 쓸 시간도 없다. 그리고 훌훌 털고 한 달씩 여행을 떠날 시간도 없다. 그가 간혹 교회를 떠나 있는 시간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 때다. 월요일에는 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날 교인들에게 일이 생기면 월요일이라도 달려가야 한다.

대형 교회의 목사들에게는 그들을 도와서 일하는 부목사들이 있고 안식년이 주어지지만, 작은 교회의 목사들에게는 그런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사치다. 이렇게 목사들이 눈코 뜰 사이 없이 살기 때문에 한국 목사들의 수명이 미국 목사들에 비해서 짧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쫓기다 보니 신학 서적을 읽을 시간을 내기조차 쉽지 않다. 어렸을 때 들은 대로 혹은 신학대학에서 배운 대로 가르친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에 부임해서 3년 정도 설교하다보면 설교의 내용도 예화까지도 같은 것이 반복된다. 자신이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목사는 답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으니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는 교인들의 불평을 들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어느 목사가 나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은 일이 있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나를 부러워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학년이 바뀌기 때문에, 특정 과목의 내용을 되풀이해서 가르쳐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자기는 똑 같은 사람들을 상대로 10년이고 20년이고 설교를 해야 하니 참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에 법정의 책을 읽으면서 승려들의 삶에 비해서 목사들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천주교의 신부들만 해도 가족이 없으니 부담이 적을 것이다. 그리고 신부들은 5년마다 교회를 바꾸어 가면서 사목을 하니 설교에 대한 부담도 적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읽고 음악을 감상할 시간도 낼 수 있다. 그런 것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없는 목사들은 상대적으로 무식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승려나 신부에 비해서, 무거운 짐에 눌려 사는 목사들의 삶이 너무도 고달프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법정과 목사 사이에는 차이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점도 있다. 우리는  『텅 빈 충만』에 나오는 <밤 나그네>에서 이 유사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법정은 <밤 나그네>에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소개하면서 그 이야기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부득과 박박 이야기

젊은 두 승려가 신라 구사군의 북쪽에 있는 백월산 무등곡에 들어갔다. 박박은 무등곡의 북쪽 고개의 사자바위를 차지하여 거기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거처를 판방이라 했고, 그의 친구 부득은 남쪽 고개의 돌무더기 아래 시냇가에 승방을 짓고 살았는데 그의 거처를 뇌방이라 했다.

이렇게 지내기 3년째 되던 어는 봄날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데, 나이 스물쯤 되어 보이는 자태가 아름다운 한 낭자가 북쪽 암자에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박박은 한 마디로 여인을 거절했다. “수도하는 곳은 청정해야 하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이곳에서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그는 사정없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북쪽 암자에서 거절당한 그 낭자는 남쪽 암자로 찾아가 하룻밤 지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부득은 갑작스런 여인의 출현에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인과 함께 밤을 새울 곳이 아니오만, 깊은 산골짜기에 밤이 어두웠으니 문전박대할 수가 없구려.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니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밤이 깊도록 부득은 자지 않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계속 염불에 몰두했다. 그런데 새벽이 될 무렵 낭자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부득을 불렀다. “내게 갑자기 산기가 있으니 죄송하지만 스님께서 자리를 좀 마련해주세요.” 부득은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을 가엾이 여겨서 촛불을 들고 시키는 대로 거들어주었다. 여인은 해산을 마치자 이번에는 물을 데워 목욕시켜주기를 청했다. 부득은 민망스러움과 두려움이 엇갈렸지만, 산모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겨 목욕할 통을 가져다가 물을 데워서 목욕까지 시켜주었다.

이때 문득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진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물로 변했다. 부득이 크게 놀라는 것을 보고 여인은 말했다. “스님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십시오.” 부득은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고 살결이 금빛으로 변했다. 목욕통 곁에 전에 없던 연화대가 있었는데, 여인은 부득에게 거기 앉기를 권했다. “나는 관세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스님의 뜻이 갸륵한 것을 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어준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여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날이 밝자 북쪽 암자의 박박은 지난밤 일이 궁금해서 남쪽 암자로 부득을 찾아왔다. 미륵불이 되어 연화대에 앉아 광채를 발하게 된 자초지종을 부득에게서 듣고, 박박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것을 부득에게 간청했다. 박박이 통 속에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을 하니 그의 소원대로 아미타불이 되어 함께 구름을 타고 갔다.


<밤 나그네>에 나타나는 논리의 모순

<밤 나그네>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 전에 법정은 이 이야기를 몇 번 읽은 일이 있는데, “읽을 때마다 그 감흥은 새롭다”고 언급하면서, 고전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부득과 박박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 나서 법정은 수행자를 구도형과 봉사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북쪽 암자의 박박은 서슬이 푸른 구도형이고 남쪽 암자의 부득은 온유한 봉사형이라고 설명했다. 봉사형이 이상적인 수행자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런 봉사가 있기까지는 투철한 자기 질서 안에서 거듭 태어남이 전제되어야 한다. 탐구와 사랑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지만, 지혜가 없는 자비는 맹목이기 쉽고, 사랑이 없는 지혜 또한 메마른 관념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구도와 봉사는 손잡고 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어서 법정은 누가복음 10장 41-42절에 나오는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언니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기에 바쁘다. 동생이 바쁜 일손을 거들어주지 않자 마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마리아도 좋은 일을 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법정이 성경을 인용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법정의 마음이 트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누가복음의 내용을 왜곡한 것을 보고는 실망했다. 예수님은 동생의 도움을 요청하는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법정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그 내용을 바꾸어 놓았다.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 법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서 “몇 가지만 하든지”는 생략하고,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를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로 바꾸었다.

법정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놓음으로써 예수님이 마르다의 수고는 실상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음식을 가리킨다면,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말은 마르다가 괜히 부산을 떨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르다의 행동이 중시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수고는 무의미하고 마리아의 선택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수고를 인정하시면서 마리아의 선택 역시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법정은 예수님의 진의와는 달리 마리아를 두둔하고 있다. 그러면 법정은 왜 여기서 예수님의 언급을 왜곡해서 구도형인 마리아를 두둔하고 있는가? 그 답은 누가복음의 이야기 바로 다음에 나오는 그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언급한 후에 법정은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었다. “밤늦게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가 관세음보살 아니라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가차 없이 쫓아버리겠다. 예절을 모르는 보살과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내 질서, 투철한 내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법정이 봉사보다는 구도를 앞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서 마르다를 두둔한 것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했다는 것을 알아채자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상 법정의 이 마지막 말은 <밤 나그네>의 문맥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자기 질서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부처까지도 내치겠다는 자기중심적인 이 언급은 그가 소개한 이야기의 주인공 부득이 저녁에 찾아온 여인을 도와준 것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의 마지막 주장은 그가 앞서서 언급한 자기 자신의 말과도 맞지 않는다. 그는 봉사형이 이상적인 수행자로 보이기 마련이라고 말하면서, 실상 구도와 봉사는 모두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에 와서는 자신은 삶의 질서를 위해서 밤늦게 찾아오는 나그네를 가차 없이 쫓아버리겠다고 말하는가?

마지막으로, 법정은 박박과 부득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감흥이 새롭다고 말하면서 고전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자신의 삶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자비를 외면하는 그가 자비를 베푼 부득의 이야기에서 감흥을 느꼈다니 앞뒤 말이 맞지 않는다. 그의 이 말은 진정인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법정의 <밤 나그네>에서 몇 가지 실망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특히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을 왜곡한 것과 자비를 강조하는 부득의 이야기에서 감흥을 느꼈다는 언급에서는 구도자로서의 성실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한 가지 더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글에 논리의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에드가 엘런 포우는 그의 <단편소설론>에서 단편소설에서는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든 문장이 단일한 효과를 위해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단편소설이 아니더라도 글쓰기의 기본은 논리의 일관성이다. 그런데 법정의 <밤 나그네>에는 이 일관성이 없었다.

더구나 <밤 나그네>에서 논리의 일관성을 해친 자비와 구도의 대립이 『텅 빈 충만』 전체에서 그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텅 빈 공간』에 나타나는 자비와 구도

법정은 『무소유』에서와 달리 『텅 빈 충만』에서는 부처나 선사들의 가르침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지혜에 관해서 많은 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재물을 탐하지 말라거나,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거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종교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는 그의 말은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상기시키는 것이어서 내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인 나도 부담 없이 그리고 재미있게 그의 책을 읽으면서 배울 만한 것이 많았다. 실상 그의 책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가 곳곳에서 번득인다. 많은 사람이 법정의 책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책에서 이런 삶의 지혜를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법정의 자비에 대한 말과 구도에 대한 그의 소신이 맞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정이 <밤 나그네>에서 자비를 실천하는 부득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그 글의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구도를 앞세우는 것을 보고 나는 아연했었다. 그런데 『텅 빈 공간』 여기저기서 그런 모순이 나타났다.

<큰마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화엄경』에 나오는 이웃에 대한 자비를 언급했다. “보살은 이웃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웃이 없다면 보살은 결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법정은 『화엄경』을 인용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가 깨달음의 결과가 아니라 깨달음의 기본 조건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법정의 이 말은 구도를 앞세우는 그의 삶과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화엄경』에 나오는 이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란 바로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뻗어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배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박박이나 법정처럼 구도에 전념함으로써 관념적인 세계에 갇혀 있으면 자비를 실천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복의 힘>이라는 글에서도 그는 자비를 강조한다. “자비란 기쁨을 나누어주고 슬픔을 거두어준다는 뜻이다. 좋은 일에는 함께 기뻐하고 괴롭거나 슬픈 일에는 함께 신음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의 중심에 자비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이런 언급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자비를 베풀 태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이것이 문제다. 우리는 <밤 나그네>의 마지막에서 법정의 그런 태도가 표명되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출가에는 공덕이 없다>에서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법정의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말했다. “밤중에 출가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나는 열이면 열 하나같이 다 문전에서 쫓아버린다.”

예절을 앞세우고 그의 삶의 질서를 지키려는 법정은 그들이 왜 밤중에 찾아왔는지 그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그에게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여인이 밤에 부득을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 여인이 그에게 목욕을 시켜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 여인은 예의를 지켰는가? 그리고 그 여인은 부득의 삶의 질서를 뒤흔들지 않았는가? 부득이 예의와 자기 삶의 질서의 틀에 매어 있었다면 자비를 베풀 수 없었을 것이다. 부득이 미륵불이 된 것은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서 자비를 베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법정의 말대로, 자비란 만나는 사람마다 손을 뻗어 보살펴주는 것이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마다”에는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법정은 자비가 몸과 마음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예의와 삶의 질서를 앞세우는 그에게는 자비가 몸과 마음에 배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마치면서

『텅 빈 충만』을 읽다 보면 법정과 목사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지만, 그 두 지도자에게는 유사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목사들이 말은 풍성하게 하는데 그들의 말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주장에 맞는 성경구절만을 선택하거나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은 법정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비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지만 실상 그는 자비를 베풀 마음의 태세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구도를 앞세우는 그의 마지막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목사들의 아전인수 격인 성경해석을 생각나게 한다. 법정과 목사의 유사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법정은 자비가 중요하다고 그리고 종교에서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구도를 위해서 자비를 제쳐놓는다. 개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믿음을 중시하고 행위를 외면해왔다. 그런데 법정이 추구하는 구도는 목사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해당하고 그가 등한시하는 자비는 목사가 외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런 면에서도 법정과 목사가 유사하다는 것은 의외다.

이렇게 보면 종교를 불문하고 종교 지도자들이 행위보다는 말을 앞세우고,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기네 경전은 물론 남의 경전까지도 왜곡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위선자라고 혹은 성실하지 않다고 비판받는다. 이런 비판은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신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특히 종교지도자들이 실수할 때 재빠르게 그것을 지적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들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실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실수가 지탄받을 만한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전능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그리고 승려들이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를 닦는다. 소승불교에서는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도를 닦는 일에 몰두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성불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대중의 계도에 힘쓰고 행함을 중시한다. 한국의 불교는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대중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일이 승려들이 해야 할 중요한 임무다. 그래서 승려들이 삶에 대한 지혜가 담긴 책을 쓰는 것은 그들의 주요 임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중시하면서 인간의 삶을 소홀히 한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앞세우면서 인간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목사들은 인간의 사회적 삶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세상 지식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폭넓게 책을 읽지 않고 인간의 삶에 대한 책을 쓰지 않는 것은 바쁜 생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독교 교리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도 삶에 대한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사업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한 문제는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중요하다. 더구나 예수를 믿는 자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는 일반인들보다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에서는 법적인 죄(crime)와 도덕적인 죄(sin)를 구별하고 도덕적인 죄까지도 지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도덕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창세기로 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도덕을 중시하셨다.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위가 악한 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불과 물로 그들을 벌하셨다.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행위에 따라서 심판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법정의 책들에 단골 메뉴로 나오는 자비, 탐심 버리기, 겸손, 용서 등은 성경에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개혁자들의 주장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에서는 믿음에 치중하고 행위를 외면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삶에 대한 이런 가르침을 등한시했다.

삶에 대한 법정의 가르침을 읽다 보니 성경에도 삶에 대한 기록이 아주 많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정말 그렇게 많다면, 지금부터라도 교회에서 성경에 기록된 삶에 대한 말씀을 간과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목사들도 설교집이나 간증집뿐 아니라 삶의 지혜에 관한 책도 써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법정과 목사의 삶이 다르고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다르다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법정과 목사 사이에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법정을 읽다가 성경에서 간과된 것이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와 많이 다른 외국을 여행하면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우리의 우수한 점뿐 아니라 부족한 점도 알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외국에 나가면 우리를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귀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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