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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를 조선에 온 '선교사‘로 볼수 없다.(?)
김택규  |  petertk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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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19일 (월) 12:51:31 [조회수 :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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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는 영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1839년 9월 7일 태어났다, 1863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학사와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된후, 1863년 12월에 중국 선교의 뜻을 품고, 런던 선교회 소속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다. 중국 말을 공부하며 선교도 하다가 ‘지푸’ (현재, 옌타이)에서, 운명적인지, 조선인 2명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로서 박해를 피하여 그곳에 피란 와 있었다.

 

그들에게서 조선에 대한 사정을 자세히 듣게되자 토마스는 이 미지의 땅 조선에 대한 선교의 꿈을 갖게되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조선 말도 좀 배웠다. 그리고 2년후인 1865년 9월 13일, 정크선(선장: 우웬타이)을 타고 황해도 연안에 있는 창린도라는 섬으로 갔다. 거기서 12월까지 약 3개월간 머믈며 조선말도 배우고, 가지고 온 성경을 나누어주며 전도를 하였다. 태풍을 만나 표류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위험을 만나기도 했지만, 간신히 북경으로 귀환할수 있었다.

조선 ‘선교차’ ‘승객’으로 셔먼호에서에 승선하다.

 

토마스목사는 1866년, 북경에서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으로 무역, 교역차 떠나게 됨을 알게되었다. 교역을 위해 셔먼호와 계약을 한 메도우회사의 주선으로 토마스 목사는 조선선교의 목적으로 그 배를 타게 된것이다. 그런데, 그의 승선 ‘자격’에 대한 한국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셔먼호에 대한 많은 책이나 글들은 토마스 목사가 ‘통역사 또는 항해사’ 자격으로 승선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함선에서 ‘항해사’의 직책이나 위치가 어떤지 아는가? 배에서 항해사는 선장 다음의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다.

 

저 유명한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야기를 알 것이다. 거기보면 항해중 선장이 죽는 돌발 변이가 생겼다. 그때 누가 ‘선장대리’가 되어 배를 운용했는가? 젊지만 그 배의 당시 ‘1등 항해사’였던 에드먼드 단테스가 선장 대리가 되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학공부를 한 목사 토마스는 절대 ‘항해사’가 아니었다. 그는 항해사 교육을 받은적도 없고, 항해사 자격이나 경력도 없다. 그배에는 윌슨이라는 공식 항해사(Chief mate)가 승조해 있었다. 유명한 이만열교수도 토마스를 ‘통역사 겸 항해사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의 학문적 자세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대부분 한국의 모든 글들은 토마스가 ‘통역사’로 승선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그가 한문에 익숙하고, 또 조선말도 약간 할수 있었으므로, 조선의 관리들이 셔먼호를 ‘문정’(조사)할 때, 혹은 소통이 필요할 때 토마스가 대체로 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종실록’에 이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있다. 셔먼호가 황주목, 송산리에서 조선관리들에게 처음으로 문정(조사)을 받았는데, 항주목사는 그 결과를 자세히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보고서에는 셔먼호의 승조원 전원의 자격과 신분을 조사한 ‘명세서’같은 것이 있다. 토마스에 대해서는, “최난헌(토마스)은 중국말을 잘하고, 우리나라 말도 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말은 알아들을수 있는 말도 있으나 어떤말은 알아들을수 없는 말이 있어서 의사소통은 잘 안된다.”고 하며,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팔행(李八行)’이 맡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팔행이 누구인가는 분명치가 않다. 하지만 통역은 전적으로 그가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역사’는 이팔행임이 분명하다.

 

(고종실록은 이 팔행에 대해서, 조선 관리의 첫 문정(조사) 결과 보고서에서는 ‘중국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후에 중국 정부 ‘예부’에 11월5일 보낸, 셔먼호 사건에 대한 해명서에서는 이팔행을 ‘덴마크’인이라고 했다. 고종실록은 선주 프레스톤을 ‘덴마크’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팔행’은 선주 프레스톤일까? 그렇지만 프레스톤은 조선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통역은 토마스가 아니라, 이팔행이 전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토마스는 ‘선교 목적’으로 그 배에 승선했다. 그는 중국어를 잘하고 또 조선말을 좀 할 수가 있었으므로 ‘통역’ 관계를 도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여기 한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장사가 목적인 상선이 왜 선교사를 데리고 갈 필요가 있는냐는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그 당시 미국이나 영국 사회는 전국적으로 ‘세계 선교의 열’이 펄펄 끓고 있던 때이다. 선주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어떤 선교사가 선교목적으로 가겠다고 할 때, 특별한 지장이 없는한 얼마든지 태워줄수가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던 때이다.

 

특히 셔먼호측과 용선 계약을 맺었던 ‘메도우 회사’측이 주선했다면 선주는 그것을 받아드려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중요한 문서가 하나 남아있다. 메도우회사가 북경주재 미국공사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에게 보낸 편지에, 결정적인 토마스의 승선 자격이 명시되어 있다. 거기에는 그를 단순히 ‘선객’(steerage)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여러 책이나 글들에는 토마스를 배 전체를 지휘하는 ‘리더’나, 혹은 ‘선장’같은 파워가 센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토마스가 셔먼호를 이끌고 평양까지 들어왔다고 기술한 글들도 많다. 이것이야말로 쓰레기’(junk) 수준의 글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함선 운용’의 시스템이나 선내 ‘위계 질서’에 대한 전적 무지에서 나온 소리들이다. 함선에서 ‘선장’(captain)은 그 배 안에서는 일종의 ‘왕’같은 위치의 사람이다. 셔먼호에는 페이지라는 노련한 선장이 있는데, ‘선객’으로 탄 토마스가 선장처럼 파워를 행사할 수는 절대 없다.

 

‘고종실록’의 기록이 그런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고종실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살펴보라. 고종실록(황주목사의 보고)에서 토마스에 대한 신상 설명에서 “토마스의 나이를 48세, (그는 그때 만 27세였다), ‘문직(文職- 문관) 4품 관리’라고 했다. 페이지 선장에 대해서는 나이 48세의 데마크인, 무관 1품관리라고 했다. 그들은 전혀 정부 관리가 아니지 않는가? 이런 고종실록이나 또 다른 잘못 기재된 문헌들의 내용을 그대로 복사(copy) 한 글들은, 모두 ‘엉터리(junk) 작픔들’임에 틀림없다.

 

토마스목사는 조선에 온 선교사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80년대 후반부터 일부 학자들에게서 토마스목사를 ‘선교사’로 볼수 없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1) 제국주의 미국의 조선 침략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배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2) 그 배에서 통역사와 항해사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왔기때문에, (3) 평양성 앞 대동강에서 조선군과 싸울 때 셔먼호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4) 그가 조선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대동강 강물에서 20여일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조선땅에 들어온 선교사로 볼수 없다, 는 등의 이유에서다.

 

하지만 분명히 토마스 목사는 조선땅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임이 틀림없다. 이미 설명했지만 그는 셔먼호를 타고 오기 1년전에 황해의 섬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며 복음을 전했었다. 셔먼호를 타고 올때도, 토마스 목사는 처음부터 ‘선교사’로 승선했기 때문에, 배가 정박할때마다, 백령도에서부터 평양까지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과 전도서 등을 반포하며 전도를 열심히 했다. 어떤 곳에는 배에서 보트를 타고 육지에 내려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만일 그가 선교사로 그배에 타지 않았다면, 페이지 선장이, 혹시 무역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해서 (당시 조선은 기독교 신앙을 금하고 있던 나라 아닌가?) 토마스목사의 선교활동을 제지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배가 정박하는곳에서는 꼭 복음을 전했고, 셔먼호가 불에 타서 침몰할때까지 뱃머리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던저주었었다.

9월 초 대동강에서 평양측 조선군과 셔먼호측 간에 무력충돌이 있었을 때, 토마스목사가 셔먼호측에 가담하여 싸웠다는 증거는 없다. 셔먼호에 있었으니 으레히 그랬을것이라는 추측일뿐이다. 오히려 오문환의 책에 보년 토마스는 페이지 선장에게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 것을 극력 주장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시실은 추측성 기록일 것이다. 왜냐면 셔먼호의 생존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셔먼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수 없는 것이다. 토마스는 최후에 성경 몇권을 움켜쥐고 뭍으로 헤엄처 나가서 계속 성경을 전해주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칼로 처 죽인 군인에게까지 성경을 전해주다가 순교를 당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미국의 모교회들은 토마스 목사를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토마스목사의 마지막 죽음을 맞는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이 있다. 참수당했다는 설, 참수가 아니라 가슴을 칼로 찔려 죽임당했다는 설, 분노에 찬 관민, 군중에게 맞아죽었다는 설, 칼로 난자당해 죽었다는 설 등이다. 이에 대헤서는 다음에 적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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