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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한인 강제이주 (2)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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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08일 (목) 00:04:27
최종편집 : 2019년 08월 08일 (목) 00:07:55 [조회수 : 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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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정책, 즉 생산을 집단화하고 국유화하자 소련 경제는 괄목할만한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여러 분야에서 산업이 발전했다. 미국과 유럽을 휩쓴 공황도 없었다. 스탈린은 1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하자 1938년 2차 경제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개인을 탄압하고 소비에트 국가건설에 매진한 결과였다.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하고, 집단화로 산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는 없었다. 반대하는 자는 모두 ‘인민의 적’이었다.

스탈린은 불안했다. 국가도 자신도 에워싸임을 당하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있었고, 자신은 ‘일국사회주의’(Socialism in one country)를 반대하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는 세계 혁명 없이 사회주의가 달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처음이고 소비에트 국가도 처음인 마당에, 소련 한 나라가 무너지면 스탈린 자신이 수호하는 일국사회주의도 끝장이었다. 스탈린은 철권을 휘둘렀다.

한인 강제이주가 있던 1937년 전후, 무시무시한 대숙청 바람이 불었다. 대숙청은 1934년 스탈린의 절친 키로프(Sergei Mironovich Kirov, 1886-1934)가 암살된 후 시작됐다. 키로프의 피살은 스탈린의 비밀지령이었을 것이다.

1936년 모스크바에서 공개재판이 열리고 볼셰비키 혁명 동지 16명이 처형됐다. 1938년에도 공개재판이 열리고 혁명 동지 21명이 처형됐다. 인민을 위해 짜르(황제)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들이, 인민의 적이 되어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일으켰다고 할 정도로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는 비중이 큰 혁명가였다. 레닌이 죽기 전 스탈린을 제거하라고 트로츠키에게 말했으므로, 스탈린도 트로츠키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거물이었다. 소비에트 초대 외무장관이었고 붉은 군대의 창설자였다. 트로츠키는 1927년 당에서 제명되고 1929년 국외로 추방됐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그는 1940년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피살됐다.

미친 듯 사람들을 잡아들였던 내무인민위원회(NKVD, 비밀경찰)의 수장 예조프(Nikolai Ivanovich Yezhov, 1895-1940)는 1938년 서서히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같은 해 연해주 한인이주 책임자였던 류시코프(Genrikh Lyushkov, 1900-1945)가 모스크바로 소환됐다. 숙청될 것을 직감한 그는 1938년 6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망명했다.

획득한 정보로 일본이 소련 공격계획과 스탈린 암살계획을 세웠을 정도로, 류시코프는 고위급 정보소지자였다. 그는 명령대로 극동지역에서 한인 18만 명을 이주시켰고, 이주 전 2500명을 숙청했다고 불었다. 류시코프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만주 관동군 특수정보국에 파견됐다. 그리고 8월 소련군이 만주에 들어오고서 사라졌다. 만주에서 소련과 일본 간 첩보전이 있었을 테지만, 사라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연해주의 한인들을 일본국민이라고 우겨댔던 일본이, 한인 강제이주를 속속들이 알게 된 후 소련에게 항의를 했을까? 한인들이 연해주에서 사라졌으니, 소련과 일본은 한동안 부딪칠 일이 없게 됐다. 반면 강제이주를 당한 한인들은 소비에트 체제 아래서 숨죽이며 지내야 했다.

연해주 한인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계획은 1937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주계획은 1922년부터 1932년까지 매해 계속 있었다. 1930년에는 실제로 한인 2500명을 아무르강 하류와 하바로프스크주 북쪽으로 이주시킨 적도 있었다. 연방 차원의 이주위원회는 1924년부터 이미 있었다. 이주위원회의 임무는 소련 전 지역 인구와 토지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연방 재정의 3분의 1을 쏟아 부을 만큼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주사업의 주안점은 사람들을 연해주와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이주시키는데 있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실제로 사람들을 대량 이주시키는 일은 어려웠다. 농민들의 집단화 반대, 가뭄과 대규모 굶주림 때문이다.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한 한인 이주 명령서의 목적은 일본 간첩이 연해주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본 군대가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한 1918년부터 철수한 1922년까지, 일본은 한인 조직을 해산하고 친일 단체들을 세웠다. 연해주 한인들은 혁명군(적군)과 연대하고 일본과 싸웠지만, 친일파 한인도 있었고 일본군 주둔지에서 백군(반혁명군)을 돕는 한인도 있었다. 소비에트 당국의 처지에서 보면, 한인들 중에 자신들과 함께 싸운 혁명군 동지도 있었고 일본을 도운 반역자도 있었던 것이니,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했다.

1930년 들어 동북아시아에 변화가 생겼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고 1933년 만주국을 세웠다. 1935년에는 나치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1차 세계대전 후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군 병력을 급속하게 늘리기 시작했다. 소련은 전쟁의 위협을 느꼈다. 1937년 일본은 중국 본토를 침략했다. 스탈린은 일본이 소련으로 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가장 염려했다. 소련은 동에서나 서에서나 전쟁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36년 이주위원회가 내무인민위원회로 이관됐다.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위함이다. 경작지 개발이 목적이었던 이주정책은 점차 ‘국경지역에서 다른 민족을 몰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소수민족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이주 대상은 어느 민족이었을까? 자기 국가가 없는 민족이었다. 자연히 연해주 한인들이 첫 대상이었다. 1937년 이주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이주였다. 일부가 아닌, 연해주 한민족 전체가 깡그리 이주하는 것이다. 한인들로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두만강을 너머 포시예트 만에 반도처럼 돌출한 지역이 포시예트(Posyet)다. 포시예트는 우수리스크 지역과 더불어 한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다. 지금 고려인들 중에는, 증조부 때 포시예트에서 중앙아시아로 간 이들이 많다. 고향도 가깝고 농사짓기도 좋고, 대다수  주민이 한인이었던 이런 곳은 ‘한인 자치지역’을 만들자는 노력이 있게 마련이다. 1937년 강제이주가 가까이 오면서, 이런 노력을 하는 한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가 되어 ‘인민의 적’으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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