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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이 힘이다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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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8월 01일 (목) 12:27:28
최종편집 : 2019년 08월 02일 (금) 00:58:29 [조회수 :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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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하는 두 여 집사가 이명박 대통령이 보석으로 나오면서 집에 가서 기도회를 가져야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때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교인들의 표를 끌어들여서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대통령까지 되더니만, 돈 문제로 감옥에 들어갔으니 실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람이 보석으로 나오면서 집에 가서 기도회를 갖겠다니 교회 얼굴에 먹칠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천국에 못 들어가.”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그게 무슨 소리야. 장로가 천국에 못 들어가면 누가 들어간데.”라고 응대했다. “아 그분 돈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잖아.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다니. 그러면 우리교회 천 장로도 못 들어간단 말야?” “목소리 죽여! 누가 들을라.” “무슨 소리야. 천 장로가 천국에 못 들어가면 누가 들어간단 말야. 기도 열심히 하지, 헌금 많이 내지, 큰 기업체를 운영하시는 분이 열심히 교회 봉사하지.”

그 말을 들은 그 여 집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기도하고 헌금내고 봉사하고가 문제가 아니야. 성경에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잖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했으니 그게 무슨 말이겠어.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지. 어떻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단 말야.”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말이 없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인지, 미처 그 성경구절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 명박 대통령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한 여 집사는 마태복음 19장 24절의 말씀이 과장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과장법이란 어떤 사물을 실제보다 부풀려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그것은 강조법의 일종으로서 뚜렷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사실을 부풀려서 표현한다. 예를 들면, ‘걱정이 태산이다’, ‘밥을 많이 먹었더니 배가 터질려고 한다’, ‘그 애 좋아서 죽으려고 하더라’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태산, 배가 터진다, 좋아서 죽는다는 말은 모두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고 걱정의 크기, 배가 부르다는 것,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실제보다 부풀려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 배가 터지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병원으로 가야하지만, 그런 말을 문자적 의미대로 받아들여서 병원에 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병원에 가자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25절에 나오는 부자와 낙타에 관한 이야기도 이러한 과장법이다. 23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어려움을 실감 있게 강조하기 위해서 낙타 이야기를 하셨다. 따라서 그 과장된 표현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서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돈 많은 이명박 장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부자는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부자들이 교회에 나와 보았자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런데 부자들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 낙타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25절에서 보면 “제자들이 몹시 놀라 이르되”라고 나와 있는데, 이 놀란 제자들은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앞에서 언급한 여 집사처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과장법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아 그것은 과장법이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래? 너희들은 못 하겠지. 하나님은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응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까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자들이 이 과장된 표현 외에도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자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이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시기도 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도 제자들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자들을 비롯한 청중이 이런 과장법이나 비유적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답답한 마음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그런 독자들이 있다.

이와 비슷한 과장법이 누가복은 22장 22-33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거기서 까마귀와 백합화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기르시는데, 하나님이 새나 들풀보다 귀한 너희를 돌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고 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몽골에 나가 있는 젊은 여 선교사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했더니, 다음날 몽골 청년 두 명이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 전도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들은 선교사에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고 했으니 직장에 나가서 일할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고, 앞으로 하나님만 열심히 믿겠다고 하더란다. 이 말을 듣고 그 선교사가 두 청년을 직장으로 돌려보내느라고 진땀을 뺐단다. 이렇게 과장법을 문자적으로 가르치면 예수님의 진의를 왜곡하게 된다.

이 비유적인 말씀 직전에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5)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어느 부자가 재물을 쌓아놓고 먹고 마시고 즐기겠다고 하는데, 그 밤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가 쌓아놓은 재물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비유 이야기를 하신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을 맺는다.

예수님은 그 부자처럼 재물에 집착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우리를 깨우치시기 위해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과장된 표현을 문자 그 대로 가르치면 먹고 살 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하는 게으름 교인이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은 정말로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겠는가?

예수님 자신이 열심히 일하셨다.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이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한다고 말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3:10)고 말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찬송가에도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 일하라”는 노랫말이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할 부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광신자들이 양산된다. 목사들은 가정생활도 외면하고 교회 일에 매달리는, 아주 열심 있는 신자들을 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런 신자들을 우리는 흔히 광신자라고 부른다.

누가복음에는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14:26)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온전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가정 파괴를 부추기는 분이란 말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가정을 파괴하면서 교회에만 몸 바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보통 이단으로 취급받는다.

그 외에도, 돈 많은 사람이 영생을 얻을 길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가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막 10:21)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느 목사가 교인들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강요한다면 가정을 파괴하는 그 사람은 이단으로 몰릴 수 있다. 여기서 과장법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삭개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세리로서 돈을 많이 번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8-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삭개오가 부정하게 번 많은 재산 중에서 절반만 주겠다고 했는데도 그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다”라는 말씀이 강조를 위한 과장법적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그런 불만은 해소된다.

예레미아스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에 의하면, 예수님이 생존하셨을 때 유대교에서는 자선을 강조했고 랍비 요하난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자선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것은 계명을 철저히 이행하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의 문헌으로부터 입증된다”고 부연하고 있다.

물론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 많고,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진 일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모든 교인이 순교자일 수도 없고 모든 교인이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을 등져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예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받은 은사와 직분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별로 강조하지 않는 과장법을 내가 언급하는 것은 과장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적고,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과장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장법은 비유법의 일종이다.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할 성경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곡될 염려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전에 상징과 우상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구별하는 능력도 문학적 소양과 관계한다.

성경의 기록은 그대로 있지만, 우리의 지식의 수준이 높아지면, 성경을 보는 눈이 변하게 마련이다. 특히 성경은 서양의 수사법을 사용해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서양인의 수사적 표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서양의 문학과 그들의 문학비평에 익숙해진 오늘날 우리의 문학적 소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장법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대와 많이 달라졌다. 지식의 수준이 2천년보다 현격하게 높아진 지금, 성경을 보는 우리의 눈이 과장법을 이해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선교 초기에는 목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영수나 장로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담당했다. 그리고 목사들조차 서양의 수사법인 비유나 강조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배운 대로 가르쳤다. 이것이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서 오늘도 선교초기의 지도자들에게서 배운 대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신학대학에서 ‘성경과 문학’을 가르치면서 과장법을 설명하다가 마태복음 21장 21절에 나오는 믿고 기도하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를 언급하면서, 이 구절도 기도의 힘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법적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그것은 과장법이 아니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구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기네 교회 교인이 그 말씀을 믿고 산이 있는 자리에 공장을 짓고 싶어서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토지공사에서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그 산의 흙을 파가는 바람에 힘들이지 않고 산이 있던 자리에 공장을 짓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답했다. 그 학생이 그런 예를 들어가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과장법을 가르치다가 나는 졸지에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 학기에는 학생 수가 많이 줄었다.

이 학생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 교사나 목사에게서 과장법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배운 사람이다. 신앙인들은 어릴 때 배운 것을 완전한 진리로 확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릴 때 배운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나선다. 그가 받은 잘못된 가르침을 진리로 확신하는 그 학생의 귀에는 과장법을 설명하는 교수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전도사로 나가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과장법을 문자적 의미대로 가르칠 것이다. 목사가 되어서도 대학 다닐 때 믿음 없는 교수를 자기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가르칠 것이다. 그런 목사는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은 물론 성경해석에 관한 공부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르는 것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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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19.135)
2019-08-04 11:56:12
모르면 용감해 진다.!!!

앞 자리라 장로가 쓴 것 같다.

헌금 봉투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낙서를 해 났는데

그걸 사진을 찍어 대예배 시간에 영상을 올려

공개적으로 질책하면 어쩌자고 하는 겁니까?

또 뭐? 사도바을이 지 보다 한수 아래라고?

애라~~~ 방이동 나라도둑놈 아들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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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최티끌 (39.7.15.110)
2019-08-02 20:14:08
천국에 갈 사람은 세상에선 알 수 없다.

심판대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만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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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김경환 (222.100.38.174)
2019-08-01 19:21:45
축자영감式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한 후 살짝 왜곡해 자기 배를 불린 신옥주 목사
1. 성경구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17)

2, 과장법(비유법)으로 읽어야 할 성경구절을 문자적(축자영감설)으로 받아들여 적용한 경우

예배시간에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타작마당이 설치된다. 신옥주가 먼저 아무개를 불러내어 타작(구타)을 한다. 아무개의 아들에게 아무개를 타작(구타)하게 한다. 신도들도 아무개를 타작(구타)한다. 타작(구타)하는 건 쭉정이를 골라내는 작업이므로 신성하게 여겨진다. 타작(구타)을 잘하면 잘할수록 알곡을 많이 건질 수 있으므로 모질게 타작(구타)하여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때리고 맞으면서 성경말씀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타작마당에서 목사, 목사아들, 목사추종자도 빠짐없이 타작(구타)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일진대 왜 이들은 빠지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든 신도 몇몇이 타작(구타)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지옥을 탈출하여 피지國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목사아들이 엄청난 뇌물로 구워삶아 피지國을 신옥주天國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별 도움도 받지 못했다. 뭣 모르고 보무도 당당하게 귀국한 신옥주는 국내에 있는 피해 신도들의 고소로 붙잡혔고, 엊그제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이 떨어졌다.

3. 축자영감式 성경해석에 충실하다면 타작은 곡식에게만 해당

성경구절을 축자영감式으로 받아들여 타작마당이 필요하다고 하는 건 신옥주와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의 자유이다. 그들이 타작마당을 개설하는 데 대해 다른 사람이 “배, 내 놓아라!, 감, 내 놓아라!”고 할 성질이 못된다. 축자영감式 성경해석에 대해선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이것도 엄연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옥주가 타작마당을 곡식이 아닌 인간으로까지 확대시킨 건 축자영감式의 성경해석의 범주에도 완전히 벗어난다. 축자영감式 성경해석에 충실하다면 타작은 곡식에게만 해당된다. 신옥주는 자기의 필요에 따라 축자영감式으로 성경구절을 인용하였다가 어영부영 살짝 곡식과 사람을 바꿔치기하여 혹세무민하여 자기 왕국을 건설한 사기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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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노재신 (121.154.74.229)
2019-08-01 13:28:14
진정 모르는 것이 힘이라 믿는다면
이처람 당당에서 자신의 알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진정 모르는 것이 힘이라 믿는다면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이다.
그러니 아는 척 하지 않고 알고 있음을 말할 것이다.
그러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조용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될 것이다.

구도자는 모르는 자이어야 한다.
모르는 것이 진정 힘이 되는 자가 구도자인 것이다.
아는 척 하는 이는 구도자가 될수 없으며 지혜자가 될수도 없음이다.

최고의 앎은 모른다는 것이다.
재주가 남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자이다.
석수쟁이는 모형이 없는 돌에 형태를 새기는 자이니 이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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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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