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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으로 성경 가리기'축자영감설'은 종교적 자폐증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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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20일 (토) 08:45:03
최종편집 : 2019년 07월 20일 (토) 08:47:02 [조회수 :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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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별한 영감으로 성경 원전은 점 하나 토씨 하나 전혀 오류가 없다는 학설이 축자영감설이다. 이로 인해 그동안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적 이해와 토론이 아예 원천봉쇄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묻지마 주장은 그 부패했던 중세 교회 1000년 역사에서조차 없었던 매우 자폐적 이론이다.

온 세상이 다 아니라고 하는데 오늘날 소위 보수라는 간판으로 치장한 일부 근본주의 교회들이 사실상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이를 신도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가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려면 먼저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굳이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하지 않더라도 성경 원문이 정말 글자 하나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는지 누구나 직접 확인하면 된다.  이를 위해 비록 지면의 제약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아래의 몇 가지 쟁점을 추가적으로 더 논하고자 한다.


축자영감설 추가 쟁점들


1. 노아 방주에 들인 짐승 숫자

창세기 6장과 7장의 서술이 서로 다르다. 전자는 "혈육 있는 자를 매 종류에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이라(창6:19)"고 하였으나, 후자에는 "모든 짐승 중 정결한 자는 암수 일곱씩, 부정한 자는 암수 둘씩 들이라(창7:2)"고 하였다. 논리상 두 구절은 서로 모순이다.


2. 베냐민의 아들은 몇 명인가?

창세기 46장에서는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이들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들이니 모두 십사 명이요(창46:21-22)"로 실제는 10명만 나열하고 모두 14명이라고 했다.

반면에 역대상 7장에서는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사람이며(대상7:6)"로 3명이다.

그리고 그 다음 8장에서는 "베냐민이 낳은 자는 맏아들 벨라와 둘째 아스벨과 셋째 아하라와 넷째 노하와 다섯째 라바이며(대상8:1-2)"로 5명이다. 단순히 숫자만 다른 게 아니라 순서도 다르고 아예 일부 이름도 서로 다르다.


3. 애굽으로 간 야곱의 친족

창세기에는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아들은 두 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창46:27)"로 70명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행7:14)"로 75명이라고 말한다.

만약 동시대에 쓰인 기록이라면 근사치로 서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려 천 년도 더 지난 후대에 무슨 근거로 그들이 75명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4. 모세 장인의 3가지 이름

출애굽기 2장에서는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출2:18)"로 '르우엘'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출애굽기 3장에서는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3:1)"로 '이드로'다.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삿4:11)"로 '호밥'이다. 게다가 민수기에서는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민10:29)"로 이번엔 호밥이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일부 번역본에서는 호밥이 '모세의 처남'이라는 곳도 있다.


5. 분향단(금향로)의 위치

출애굽기에 보면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출30:1-6)"로 분향단은 분명히 지성소 밖에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3-4)"로 지성소 안에 속한 것으로 말한다.

이 또한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거나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향로를 지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식의 애절한 변명이 있지만, 문맥상 차라리 그냥 후대에 쓴 히브리서 원문의 오류라고 인정하는 게 더 솔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향로는 본래 지성소 밖에 속한 기물이다(민16:17-18).


6. 토끼의 되새김질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보면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 11:6)"라고 말한다.

신명기 또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신14:7)."

일부에서는 토끼도 어떤 경우 단백질 배설물을 다시 삼켜 특별한 되새김질을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토끼를 되새김질하는 동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7. 아버지 죄의 상속

신명기 24장에서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24:16)"고 했다.

그러나 신명기 5장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9)"고 말한다. 이 두 구절 또한 논리상 서로 충돌한다.


8. 소바 왕의 마병(기병) 숫자

사무엘하에서는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삼하8:4)"로 1700명이다.

하지만 역대상에서는 "다윗이 그에게서 병거 천 대와 기병 칠천 명과 보병 이만 명을 빼앗고 다윗이 그 병거 백 대의 말들만 남기고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대상18:4)"로 7000명이다.


9. 타작 마당의 가격

사무엘하에서는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삼하24:24)"로 은 50세겔이다.

반면에 역대상에서는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대상21:25)"로 금 600세겔이다.

혹자는 전자의 경우 마당 값만 계산한 것이고 후자는 마당이 속한 산지까지 계산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정황상 지극히 궁색한 변명이다. 

 

10. 요압이 보고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

사무엘하에서는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삼하24:9)"로 80만 명이다.

그러나 역대상에서는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대상21:5)"로 110만 명이다.

게다가 유다 사람도 50만 명과 47만 명으로 서로 다르다. 

 

11. 솔로몬 병거의 외양간

열왕기상은 "솔로몬의 병거의 말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며(왕상4:26)"로 40000이다.

하지만 역대하는 "솔로몬의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요 마병은 만 이천 명이라(대하9:25)"로 4000이다. 10배 차이가 난다.


12. 성전 사역 감독자

열왕기상은 "솔로몬에게 또 짐꾼이 칠만 명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 명이며 이 외에 그 사역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삼백 명이라(왕상5:15-16)"로 3300명이다.

그러나 역대하는 "솔로몬이 이에 짐꾼 칠만 명과 산에서 돌을 떠낼 자 팔만 명과 일을 감독할 자 삼천 육백 명을 뽑고(대하2:2)"로 3600명이다.


13. 바아사 왕과 아들 엘라 왕

열왕기상에는 "유다의 아사 왕 제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디르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그 왕위에 있으니라(왕상16:8)"로 아사 왕 26년에 엘라가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역대하는 "아사 왕 제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대하16:1)"고 말한다.

바아사의 아들인 엘라가 10년 전에 왕이 되어 2년 동안 통치하고 그 후 시므리가 이미 새 왕이 되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한참 전대의 왕이었던 아버지 바아사 왕이 유다를 치러 왔다고 한다. 아마 타임머신을 타야만 가능할 것이다.      


14. 아하시야가 왕이 된 때

열왕기하는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왕하8:26)"로 22세에 왕이 되었다.

하지만 역대하에선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대하22:2)"로 42세에 왕이 됐다고 말한다. 무려 20세의 차이가 있다.


15.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하시야 왕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만일 역대하의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대하21:20)"가 맞다면, 아버지 여호람은 40세에 죽고 막내 아들 아하시야에게 왕위를 물려준 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즉위 당시 아들 아하시야의 나이가 42세로 죽은 아버지 여호람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더 많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16. 여호야긴 왕의 나이

열왕기하는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간 다스리니라(왕하24:8)"로 18세라고 말한다.

허나 역대하에서는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대하36:9)"로 8세에 왕이 되었다. 10년의 차이가 난다.


17.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의 예루살렘 도착

열왕기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왕하25:8)"로 5월 7일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렘52:12)"로 5월 10일이다. 둘 중에 하나는 오류다.


18. 다윗에게 말하신 기근

역대상에는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대상21:11)"로 3년 기근이다.

그런데 사무엘하엔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삼하24:13)"로 7년 기근이다.


19. 귀환한 아스갓 자손의 수

에스라서는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스2:12)"로 1222명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에는 "아스갓 자손이 이천삼백이십이 명이요(느7:17)"로 2322명이다.

또한 아딘 자손의 수도 454명(스2:15)과 655명(느7:20)으로 서로 다르다. 진정 성경이 글자 하나까지 정확히 영감되었다면 성령께서 이런 실수를 하실 리가 없다.  


20. 목수 요셉의 아버지

마태복음 1장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1:16)"로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다.

하지만 눅가복음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눅3:23)"로 '헬리'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둘이라면 모를까 다른 설명이 피곤하다.  


21. 예수님의 탄생 시기

마태복음에 예수는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2:1)"로 적어도 헤롯왕이 죽기 전에 태어난 걸로 되어있다(헤롯왕은 BC 37년부터 BC 4년까지 이스라엘을 통치, 요세푸스의 기록).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눅2:2)"로 예수가 구레뇨 총독 때(그는 AD 6년에 수리아의 총독이 됨)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십 년 이상의 시간 차이가 있다.


22. 광야 시험의 순서

마태복음 4장의 높은 산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4:8)"로 이는 광야에서 3번째 시험이다.

반면에 누가복음엔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눅4:5)"로 2번째 시험이다. 순서가 서로 다르다.


23. 베드로를 처음 만나신 곳  

마태복음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마4:18)"로 갈릴리 해변이다.

허나 요한복음은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요1:42)"로 요단강이다. 예수는 그 이튿날 갈릴리로 가시려 했다(요1:43).


24. 백부장 이야기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마8:5)"고 했다. 분명히 백부장이 '직접' 나아온 것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7:6)"고 말한다.


25.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마9:18)"로 딸이 '죽은 후'에 야이로가 왔다.

하지만 마가복음엔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5:22)"로 딸이 '죽기 전'에 야이로가 왔다.


26. 토기장이의 밭

마태복음 27장은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마27:9)"로 '예레미야'를 인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은 삼십'을 언급한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스가랴'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슥11:12)." 예레미야서에는 '은 삼십'을 토기장이에게 준 기록이 없다.


27. 예수님의 옷

마태복음 27장에는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scarlet)를 입히며(마27:28)"로 '주홍색'이다.

하지만 마가복음엔  "예수에게 자색 옷(purple)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막15:17)"로 기록되어 '보라색'이다. 축자영감설이 정말 옳다면 성령께서 주홍색과 보라색을 구분 못하실 리가 없다.


28. 성소의 휘장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27:50-51)"로 예수께서 죽으신 후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반면에 누가복음에는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4-46)"로 먼저 휘장이 찟어진 것을 서술하였고 그 다음에 죽으심이 기록되었다.


29. 겨자씨가 가장 작은가

마가복음 4장에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막4:31)"란 구절이 있다. 그러나 겨자씨가 땅 위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니다. 더 작은 씨들도 있다. 축자영감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 또한 오류다.


30.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

마가복음 15장엔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로 제3시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요19:14)"로 제6시 이 후라고 말한다.

이런 차이에 대해 전자는 유대식 시간 표기이고 후자는 로마식 시간 표기라는 등 구구한 변명이 있지만, 그 역시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신약 성경 어디에 유대식과 로마식 시간 표기를 아무런 설명 없이 마구 혼용해서 사용한 적이 있는지 역으로 묻고 싶다.


31. 가룟 유다의 죽음

마태복음에는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고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엔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행1:18)"고 했다. 더구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일부 사본에서는 이 구절이 아예 빠져있다.


32. 하나님을 본 자

요한복음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말한다.

반면에 창세기의 야곱은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고 했다. 이 두 구절 역시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서로 상충된다.


33. 다메섹 사건

사도행전 9장에서는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행9:7)"고 했다.

하지만 사도행전 22장에서는 거꾸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행22:9)"고 서술되어 있다.

정말 축자영감설이 옳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이렇게 읽는 사람들이 헷갈리는 서술로 영감하실 리가 없을 것이다.


34. 음행으로 죽은 사람의 수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고전10:8)"로 23000명이다.

하지만 실제 민수기의 기록은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민25:9)"로 24000명이다. 이 부분 역시 한참 후대의 기록자인 바울이 착각했을 거라는 견해가 더 상식적일 것이다.  


35. 하나님의 시험

야고보서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고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22:1)"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분명히 시험하셨다. 만일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이 두 구절 또한 서로 모순이다.


성경은 인간들이 쓴 기록

나는 이 글에서 가능한 사본의 필사 오류나 번역상 오류는 최대한 제외하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필사 오류'의 경우라면 극소수의 사본에만 오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본에 동일한 오류가 공존할 때는 그건 일단 원문 오류로 보아야 한다.

물론 위의 구절들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나름대로 다양한 가설이나 조건이나 전제를 동원하여 오류가 아니라고 열심히 변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변증 중에 일부는 타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머지 상당수는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썼다든지, 이름이 두 개 라든지, 서로 다른 두 사건이라든지, 그리고 고대 표현법이 어떻다는 등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궁색한 변명이다.

문제는 여기에 열거한 항목들 외에도 논리적으로 중요한 쟁점들이 아주 더 많이 있으며 그 중에서 단 한 항목이라도 원문의 '문자적 오류'가 사실이라면 축자영감설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대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비판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그는 열왕기서가 역대기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또한 "모세오경이 모세의 친작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다.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전도서 등은 가필자의 손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시편의 부제와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고 했다.

더구나 구약에서는 어느 부문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에스더 같은 책은 빼버리고 외경 마카비서를 대신 넣었더라면 좋을 뻔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심지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였다. 그는 야고보서나 에스더서 등은 정경에서 제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역시 제외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안 틀리신다

나는 지금 루터가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루터든 칼뱅이든 사람은 누구나 오류가 있으니 특정 신학자들의 철 지난 영감설을 지나치게 교조화하거나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계가 아닌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성경 인물인 아브라함, 욥, 모세, 다윗, 솔로몬, 베드로, 마가, 그리고 바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한 기록자들 또한 결함이 있는 인간이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현재의 성경에는 분명히 인간에 의한 원문 오류가 들어 있다. 다만 그 오류가 몇 개인지 그 숫자만 논란의 대상일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은 굳이 인간의 구구한 변증이 필요 없는 책이다. 인간이 부족하더라도 계시는 온전하다. 인간이 틀리더라도 하나님은 안 틀리신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들이 수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잡다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진리는 성경 자신이 스스로 증거하고 지키신다.

그러니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씨도 안 먹힐 그 중세적 축자영감설을 박물관에 속히 반납하고 성경의 객관적 '본문 비평'에 대해 더욱 열린 마음을 지녀야 옳다. 이제라도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도록 인간이 틀린 건 틀린 그대로 솔직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오류'를 감히 '하나님의 무오'라고 과대 포장하지 말라는 거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성경에서 문자(text)만 읽지 말고 문맥(context)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보다 더욱 어리석은 일은 손바닥으로 성경을 가리는 것이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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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호 (184.96.168.249)
2019-08-07 05:39:01
사람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댓글을 안다는군
신씨,
1번: 주께서 부연설명을 하신 것

2번: 바보야, 창세기 46장22절 말씀 14명은 라헬이 야곱에게 낳은 자손 숫자를 말하니 요셉과 베냐민 그리고 그 자손들을 더한 것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 14가 맞고(너 성경 진짜 읽냐? 이런 자가 성경을 비판하고 있으니, 개가 웃을 일이다.)

3번: 바로 그 전 절, 창세기 46장26절에 보면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라고 되어 있으니, 숫자를 셈에 있으니 관점에 따라 누구는 포함하고 누구는 포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4번: 성경의 수없는 인물들이 두 세가지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고 현재도 마찬가지, 미국에서 사람들이 성장기 때 이름, 공식 이름, 비공식 이름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음.

기타 등등, 너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영어, 한글 성경만 대조해서 읽어도 (원어까지 가지 않아도) 모든 부분 그 다른 이유들을 이해 할 수 있다.

너는 그냥 성경이 싫은 거야. 너는 그냥 믿음이 이해가 안 갈 뿐이야.
불쌍하다.... 부디 좀 부끄러울 줄 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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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박광재 (116.127.228.190)
2019-08-04 02:17:40
성경의 원전은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경을 필사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실수로 오자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일점 일획도 가하거나 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필사하는 가운데 실수를 한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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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물이흐르고 (175.214.79.174)
2019-07-30 14:15:58
신집사님
올려주시는글에 많이 배우고 깨우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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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최티끌 (39.7.57.152)
2019-07-23 09:18:16
성경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벧후 1:20-21) :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데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9-07-22 17:11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좋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20】“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충고하고 있다.

“경의 모든 예언”의 “경”은 그라페스(γραφής)로서 본래는 ‘기록물’이라는 뜻이었으나, 여기서는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풀 것”은 에피뤼세오스(ἐπιλύσεως)로서 이곳과 칠십인역에 사용되었고, 그 뜻은 ‘해석’, ‘해방’, ‘용해’이다.

그러나 “이 명사나 이와 같은 어원의 동사(에피뤼에인, ἐπιλύειν)가 다른 곳에서는 기만성에 대한 폭로(Philo, Agric. 16; Sextus Empiricus, Pyrrh. ii. 246)를 의미하거나, 혹은 (더욱 특징적으로는) 난제나 수수께끼(Athenaeus, Deipn. x. 450e; Josephus, Ant. viii. 167), 꿈(창 40:8; Aquil.; Heliedorus, Aethiop. 1. 18), 성경의 난해 구절(P hilo, vit. con. 75)이나 비유(막 4:34; Hermas, Sim. v. 5. 1) 등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J. N. D. Kelly).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ὅτι πάσα προφητεία γραφής ἰδίας ἐπιλύσεως οὐ γίνεται.)에 대해, (1) 어떠한 예언도 개인이 아니라 사도전승과의 연속성을 갖고 있는 교회가 해석해야 하는 것이라는 설(W. Schrage, J. N. D. Kelly, 천주교), (2)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언자들의 사사로운 해석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설①, (3) 예언은 이단자의 소견에 의해 용해할 것이 아니라는 설(“Lange, Spitta”,② 김철손), (4)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해석할 것이 아니라는 설③ 등이 있다.

(1)설은 원문에 그 근거가 없다는 점과, 공관복음서에 보면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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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Calvin, H. Alford, M. Henry, J. A. Bengel, A. Clarke, A. Plummer, J. Wesley, A. Barnes, F. J. Dake, B. C. Chapman, A. E. Barnett, C. S. Ball, M. Bentley, M. Green, A. T. Robertson, NIV.
2) in 이상근.
3) R. C. H. Lenski, A. R. C. Leaney, W. Barclay, C. R. Erdman, B. C. Caffin, B. Reicke, C. Bigg, D. H. Wheaton, 黑崎幸吉, 박윤선, 이상근, AV, RS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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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 자신도 예수님의 변형을 목격했을 때에,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 곳에 있으려고 한 점을 미루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2)설은 그럴 듯한 견해이긴 하나, 다음 구절이 본 문장의 이유를 나타내는 것(원문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이라는 점 때문에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3)설은 원문에 그 근거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을 고찰해야만 한다. 베드로는 앞 구절(19절)에서 성도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라고 하였고, 다음 구절(21절)에서는 본 문장의 이유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누구라도 사적인 생각이나 감정, 경험이나 학식, 욕망 따위에 의하여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원문의 21절 첫 부분에는 가르, γὰρ가 있다.)에 대해,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는 사람이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 소극적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성경이 사람의 뜻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므로 사람의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벧전 1:2의 주석을 보라.)의 ‘감동하심을 입은’(페로메노이, φερόμενοι: 벧전 1:13의 주석을 보라. 그 외에 ‘짐을 지고 가는 것’, ‘<배가 바람에> 밀려가는 것’이라는 뜻도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는, 사람이 사사로이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 적극적 이유와 성경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ἐλάλησαν ἀπὸ θεού ἄνθρωποι;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말한 것이다.’<저자의 역>)는 B, P 사본들과 시리아 역, 아르메니아 역, 콥트 역 등을 따른 것이고; C 사본에는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말한 것이다.”(ἐλάλησαν ἀπὸ θεού ἅγιοι ἄνθρωποι)로 되어 있고; א, K, L 사본들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한 것이다.”(ἐλάλησαν ἅγιοι θεού ἄνθρωποι)로 되어 있고; A 사본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말한 것이다.”(ἐλάλησαν ἅγιοι τού θεού ἄνθρωποι)로 되어 있다.④

어느 것이 본래의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의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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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C. Bi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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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차이가 없다.
베드로에 의하면, 성경이란 사람의 뜻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밀려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과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는 성경의 본질을 밝혀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테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로서 θεός(하나님)와 πνέω(숨쉬다)의 합성어이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생기가 흡입된’ 또는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진’이다. 즉, 성경의 각 부분은 하나님의 생기 곧 성령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경 저자(인간)의 인격을 억제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활동을 보다 고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요 14:26). 그리고 저자(인간)의 개성은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문체와 용어의 폭넓은 다양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W. Hendriksen). 각 성경의 저자 및 내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근원은 하나님의 영감이며, 바로 이 점이 모든 성경을 통일시키는 근본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경건치 못한 사람의 말이나 마귀의 말이 문답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말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즉 성경은 전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종이에 인쇄하여 만든 성경책이나 그 글자 글자가 곧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보다 그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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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으로 말미암아 나타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약성경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증거되었고, 신약성경에는 오신 그리스도가 증거되었으니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나타내어 주시는 이가 성령이시다”(채필근).

웨슬리(J. Wesley)는 “하나님의 영은 성경을 쓴 사람을 그때 한 때만 영감을 주신 것이 아니고, 진실된 기도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주신다.”라고 하였다.

결국 두 성경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성경의 본질적 요소는 신적인 것과 그에 의해 감화된 인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첫째, 저자나 예언자를 연구해야 한다. 같은 낱말 또는 문장이라도 저자 또는 예언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 또는 예언자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둘째, 원어 해석을 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낱말 풀이가 아니라, 어원 및 언어의 변천 과정 그리고 저자나 예언자가 그 용어 속에 부여하고 있는 신앙 또는 신학적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

넷째, 저자나 예언자의 문체와 애용어 그리고 표현 양식들을 연구해야 한다.

다섯째,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주로 저자나 예언자의 삶의 정황과 본문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저자나 예언자의 신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의 내용에 근거한 신학을 정립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할 때에 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 사도전승을 따른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학자들)의 해석들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자의 편견을 막고, 보다 깊고 폭넓은 본문 이해를 가능케 한다.

여덟째, 끊임없는 기도로 성령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모든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산물이므로, 해석자는 앞서 열거한 모든 과정을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수행해야 할 것이다(고전 2:13. 그리하면 앞선 모든 과정을 바탕으로 하는 영해가 가능해진다.

출처: 최세창, 야고보서․베드로전후서(서울: 글벗사, 2001, 3판 1쇄), pp. 560-565.

필자의 사이트 : newrema.com(T. 426-3051) 저서: 신약 전체 주석/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7권/ 다수의 논문들/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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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1:18:57
감게에서 퇴출되었다 하시더니 감게의 글은 잘도 퍼 오시는군요. ㅎㅎ

최세창 목사님의 글은 스스로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 모순이라 함은 이렇습니다.

1) 성경해석의 단정: 성경의 말씀은 사사로이 해석(풀어서)해서는 안된다.
2) 성경해석의 방법:
첫째, 저자나 예언자를 연구해야 한다.
둘째, 원어 해석을 해야 한다.
셋째,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
넷째, 저자나 예언자의 문체와 애용어 그리고 표현 양식들을 연구해야 한다.
다섯째,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
여섯째,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일곱째, 사도전승을 따른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학자들)의 해석들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여덟째, 끊임없는 기도로 성령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1) 사사로이 푼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의 생각이나 개인의 방법으로 풀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 8가지의 성경해석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8가지 성경해석의 방법이 사사로운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1)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된다 하였지만 2) 사사로운 방법을 열거하여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1)과 2)는 서로 모순입니다.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된다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가 그나마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에게는 자신의 한계가 있습니다.
즉 언어적 표현의 한계가 있으며 인식의 한계가 있어 성령의 감동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성경상에 기록된 문자의 차이 문장의 차이는 그러한 의미에서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 흐르는 서로 공명이 있습니다. 즉 성령의 감동이며 영감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표현이 조금 다르지만 그 표현을 굳이 비평을 함으로써 흠집을 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동일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와 저기가 다른 것일까? 그에 대한 성령의 감동을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 다른 표현인 것같고 표현의 모순인 것 같아 보이지만 구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선을 통해서도 악을 이루지만 하나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문학비평을 통해 서로 다름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서 흐르는 동일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서로 다름이 더욱 큰 은혜가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무조건 같아야 한다. 또는 동일해야 한다는 것으로 그 잣대를 삼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처음부터 모순투성일일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동일한 또는 같은 모습이 되길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누구보다 비슷한 모습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너무도 달랐다 하였습니다. 이 서로 다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서로 다름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볼수 있게 하심이 있습니다.

서로 다름은 악이 아닙니다. 서로 다름은 선도 아닙니다.
서로 다름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 생각한다면 서로 다름은 선이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악하다 한다면 서로 다름은 악이 될 것입니다.

사사로이 풀어선 안된다 단정을 하고서 사사로운 8가지의 방법을 열거하며 마치 그것이 정답인것처럼 주장을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사사로움인 것입니다.

첫째, 저자나 예언자를 연구해야 한다. - 듣기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나 선지자에 대한 연구자료는 극히 제한적이며 극히 적은 량의 정보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자와 예언자에 대한 연구 자체가 사사로운 해석이 될 것입니다.

둘째, 원어 해석을 해야 한다. - 이 또한 듣기에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원어 자체가 죽은 문자가 되어 그 원어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합니다. 만약 원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온전하게 해석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원어 자체가 갖고 있는 제한적인 표현 때문에 단어나 문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는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원어.... 현대의 언어도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 오해가 발생하는 일이 부지기 수인데 어찌 원어를 통해 성경의 바른 뜻을 이해할 수 있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학자들 특히 원어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의 교만이며 자기 자랑이며 성경 해석에 제한을 두는 것으로 스스로 특별한 자리에 앉기 위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주장일 뿐입니다. 만약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구원은 원어를 아는 이에게만 열리는 특별한 일이 될 것입니다.(종교 개혁과 성경 번역 출판의 정신을 퇴보하게 함)

셋째,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 - 위 원어 해석에 대한 설명으로 문법적인 해석이 그리 쉬문 문제가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문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문법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나 예언자들은 문법을 연구한 이들이 아닙니다. 언어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문법에 얽매이는 것은 오히려 실 생활에서 사용되는 살아있는 표현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 살아 있다면 문법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는 살아 있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속상한 부모가 자여를 향하여 '나가 죽어라.' 하였다 하여 그 말이 진심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죽은 문장과 살아 있는 언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때론 큰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

넷째, 저자나 예언자의 문체와 애용어 그리고 표현 양식들을 연구해야 한다. - 이것이야 말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밝혀졌다 하여도 그의 글들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한 장의 편지로 그 사람의 모든 면면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입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분별의 은사)을 받은 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여섯째,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 성경무오설이나 축자영감설이나 문학비평이나 역사비평이 바로 신학입니다. 지금 당당에서도 신학적인 논쟁이 있음인데.. 어떤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할까요? 정통주의신학? 자유주의적 신학? 글쎄요... 신성남 집사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전 그것이 아니라 생각을 합니다.

일곱째, 사도전승을 따른 기존의 교회 지도자들(학자들)의 해석들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 이거야 말로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소문이 돌고 돌면 바르게 전한다 하여도 문장 그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소문은 때론 오해를 만들어 내고 소문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이 되기도 합니다. 사도들의 전승에 대한 기존 교회 지도자들의 해석을 연구한다? ㅎㅎㅎ 신학대학교의 교수들도 할 수 없는 일을 설교자에게 원하고 있음입니다. 최세창 목사님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생각을 합니다. 그것으로 최세창 목사님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계심인지는 모르지만 모든 설교자를 그리고 성경을 읽는 대중들을 최세창 목사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함은 옳지 못함인 것입니다.

만약 모든 이들이 최세창 목사님과 같이 된다면 지금의 혼란보다 지금의 다툼보다 더 큰 다툼이 있고 갈등이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선생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 같지만 실상은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덟째, 끊임없는 기도로 성령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 구해서 된다면 모두가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한다고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기도... 십계명보다 어려운 현대의 또 다른 율법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기도라는 계명을 옳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빼앗아 스스로 부자유케 하는 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절대 그렇게 행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성령의 영감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사함을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영감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고백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려 하십시요. 그러면 성령은 은혜로 주님이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는 스스로 숨을 쉬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니 숨이 쉬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은 거듭난 성도가 자연스럽게 쉬게되는 숨과 같습니다. 숨을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숨을 쉬듯 성령의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해하면 되는 것입니다.
숨을 쉬기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뭔가 큰 문제(영적인 질병)이 있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알려하지 마십시요.

때가 되면 알게 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중에 있는 아이가 굳이 숨을 쉬려 한다면 오히려 생명이 위태로와 질 것입니다. 태중에 죽는 아이가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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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최티끌 (220.78.60.203)
2019-07-23 11:37:47
베드로 와이프는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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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1:43:55
별 걱정을 다하시는군요.
베드로의 아내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최티끌님은 베드로의 아내를 걱정하지 마시고 최티끌님 자신과 사모님에 대한 신경을 쓰시면 좋을 듯 합니다.
자기 아내에겐 무관심 하고 남의 아내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남편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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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2:17:25
노재신목사님.^^

목사님 성경 지식은 컬럼 쓰실 능력이십니다.

컬럼 등록하셔서 글을 쓰심이 좋을 듯 합니다.

사람에서 나오는 열정 이상으로 나오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목사님에게 병은 의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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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2:42:38
최티끌님은 의사신가요?
진단도 하시고 처방도 하시네요.

열정 이상으로 나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표현이 최티끌님의 영적(영의 세계)인 처방인가요?

그렇다면 저와는 다른 영을 갖고 계심인 듯합니다.
제가 왠만한 이야기는 알아 듣겠는데 최티끌님의 이러한 표현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은 목사님에게 병은 의사에게..... 라 하시니 최티끌님에게 제 병에 대한 진단을 받아 보아야 할 듯 합니다.

질병을 갖은 자가 칼럼을 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 당당에 칼럼을 쓰시는 분들....
대부분 영적 질병을 갖고 계신 분들 같더군요. 신성남 집사님을 비롯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저라도 줄여야지 저까지 칼럼을 쓴다고 나서면 되겠습니까?
사람에게서 나오는 열정 이상으로 나오면 뭔가 문제가 있음이라 하셨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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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2:52:15
예수님은 병자를 알아보시고

사람은 병이 들면, 같은 병에 걸릴 사람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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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4:04:59
그렇군요. ㅎㅎ
병이들면 같은 병 걸린 사람을 알아본다 하시니 그 병은 독심술 내지 분별력인가 봅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암에 걸린 사람을 진정 알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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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4:17:49
아내가 6년전에 유방암에 걸렸는데

그 몽올을 만지니 '암이다'라는 음성이 들렸지요.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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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4:28:25
일반사람이 그냥 알아보는 병이 있습니다. = 정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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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4:37:32
저는 댓글 놀이 해도 월급이 나오는데,

목사님은 온 종일 댓글 놀이 해도 사역비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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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5:16:06
좋으시겠네요. 댓글놀이가 취미시니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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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5:17:35
진정 취미시라면 이젠 그만 멈추십시요. 취미로 하기엔 댓글놀이는 그 무게감이 너무도 큼 입니다. 짓지 않아도 될 죄를 지을 수도 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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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4:42:43
혹시 댓글이 사명? 사역은 아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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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4:59:56
최티글님은 어떠하신가요? 사명 혹은 사역?
저는 사명이라하기엔 그렇고 사역이라 하기에도 좀 그렇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 하는 것이라면 사명이고 이해를 시키려 함에는 사역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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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5:06:07
감리회 본부 행정으로 상처를 받으신 것 같은데

미움 버리시고

본 사역으로 돌아가심이 좋을 듯 합니다.

댓글놀이는 저 같은 놈이 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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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5:11:04
감리회 홈페이지에선 회원정지 시키더니 4개월이 지났어도 회원말소를 시키려 준비중이라 회원자격을 회복시켜 주지 못하겠다 하더군요.

전명구 목사는 제가 보기 싫다고 휴직을 시켜버리더군요.
그런 면에서 제가 돌아갈 사역지가 현재엔 없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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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20.141)
2019-07-23 15:18:28
좀 쉬시고, 건강 챙기시고, 10%안에 드는 목사님 되시고

목회 승리하시길 기도하고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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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5:21:02
최티끌님이 생각하시는 10%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이젠 댓글놀이 그만 하실 때가 되었다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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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4:36:43
정신병이 걸린 것 같지만 그 모습이 건강한 상태일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제자들에게 새술에 취했다 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미치지 않고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말도 통용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말이 제대로 된 표현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일반인들이 그냥 알아볼 수 있다는 정신병이 어쩌면 천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폐아 중엔 천재들이 있다더군요.

신성남 집사님도 어쩌면 종교적 천재성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자기만의 세계속에 갇혀 과거의 일들을 들축이며 자유신학에 심취하여 마치 자신이 제일인냥 주장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신성남 집사의 눈에 볼때는 제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정신병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치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지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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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39.7.57.152)
2019-07-23 06:51:24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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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3 11:38:25
성령의 영감이 있는 사람은 굳이 앞의 7가지의 방법을 주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사사로운 것이 되며 이미 그 자체가 자유를 속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현대의 율법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8번째도 그리 강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강조를 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성령의 감동이 없는 사람은 니고데모와 같이 세례식을 강조하고 강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세례를 받는 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구원의 빛)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거듭남이라 하기도 하고 빛의 자녀의 삶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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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7-22 19:54:16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구약개정권을 부여한 의미를 곱씹어봐야, 성경해석에 관한 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통행, 하나님은 성경해석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도 제공하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구약을 업그레이드 하였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하나님이 재림 예수님을 통해 신약을 업그레이드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실제 적용상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구약을 업그레이드 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령 안식일을 무조건 지키려는 융통성 없는 율법주의자의 답답한 구약 적용에 대해 웅성웅성 불만이 일어나자 하나님이 인간들의 애절한 간구를 들으시고 예수님을 보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참뜻을 명확하게 밝히면서 아예 차제에 구약을 업그레이드 하여 신약이 나온 것이지요.

성경해석에 관한 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고 쌍방통행!

신약시대의 율법주의자(축자영감설로 밥을 먹고 사는 현대판 율법주의자)의 관점을 통해 신약을 읽어본 이 게시판의 신성남, 무릇돌, 최재석, 김경환 등과 다른 곳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불만이 일어나자 쌍방통행을 중시하는 하나님이 그대로 가만히 있을까요?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을 보내 인간들의 웅성웅성 불만에 답을 주셨습니다. 인간들이 더 많이 웅성웅성 할수록 더 빨리 재림 예수님을 보내셔서 신약을 업그레이드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성경을 붙들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인간과 쌍방통행하시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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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23:16:37
성경해석에 있어 쌍방 통행이라 하시니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라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물론 죄를 범하기 전 아담은 그러한 능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범하고 죄가 세상에 들어와 오아노릇을 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헤아릴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웨슬리는 전적인 타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 인간은 전적인 타락을 함으로써 쌍방통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다가오심을 통해 인간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 인간과 하나님의 협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인간과의 쌍방통행이 아니라 일방적인 은혜로 행하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애프터 서비스를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르시고 세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 부르심에 응하여 아멘으로 화답을 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르심과 세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앞장서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랐던 제자들과 같이 선행하시는 주님의 뒤를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성경을 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니 이것을 영감 또는 감동이라 하거나 울림이라 하고 이러한 울림의 현상이 한 사람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니 성령의 공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여명의 제자들에겐 이 모든 것이 일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선행의 은총에 이은 성령의 감동과 울림, 그리고 영감에 의한 공명현상이 땅을 진동케 할 만큼 강하게 역사하였던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쌍방통행으로 성경을 이해시키려 하고 애프터 서비스까지 해서라도 성경을 이해시키려 하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감동이 없다면 울리는 꽹가리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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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09:46:15
문학비평으로 성경 가리기
제발 성경은 성경으로 인정하고 받아드리자.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성경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비판하거나 비난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니 말이다.

성경이 인간 문학작품인가?
그렇다고 할수도 있고 아니라 할 수도 있다.

비기독교인이라면 성경도 인간 문학작품의 하나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문학자품으로 대하기보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대할 것이다.

신성남 집사님,
성경이 문학작품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가요?

신성남 집사님,
아직도 집사라하시니 기독교인이신가요?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 스스로 생각을 하시나요?
인간 문학작품? 아니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어디 시원하게 답이라도 하고 갑시다.
신성남 집사님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 분입니까?

스스로의 세계속에 갇혀 있는 분은 아니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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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09:03:38
왜곡된 진리는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한다.
축자영감설이 왜곡된 진리라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문학비평도 왜곡된 진리라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성경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읽어야 합니다.
축자영감설이란 색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어선 안됩니다.
축자영감설이란 감언이설일뿐입니다.
왜냐구요?
축자영감설이란 단어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이에 의해 축자영감설이 주창되었을 까요?
저는 아니라 봅니다. 왜냐구요? 성경은 축자영감설이라 표현을 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학비평의 색안경으로 성경을 읽으려 해선 안됩니다.
문학비평이란 감언이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성경엔 문학비평을 통해 성경을 읽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문학비평을 배우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만이 주창을 하고 있는 세속학문의 방법을 신학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축자영감으로 읽지 말아야 하고 문학비평으로도 읽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감동으로 읽으려 해야 합니다.
감동이 없다면 굳이 억지로 해석을 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비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하나님을 비판할까요?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 했는데 사주지 않았다고 부모를 비난해야 할까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였다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아직 때가 아니라면 감동이 없을 것이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림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때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왜곡된 진리는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곡된 소리는 진실을 보아도 그 진실을 바로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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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1 23:53:35
문학비평은 인간 지식인의 자폐증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보다 더욱 어리석은 일은 손바닥으로 성경을 가리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사람이다.

성경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하셨다.
성경을 손으로 가리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까?
아니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려는 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까!

성경을 손으로 가릴 수 있다 생각을 하는가?
축자영감설이 손으로 성경을 가리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본문비평'은 어떠한가?
본문비평은 손으로 성경을 가리려하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의 방법이며 수단이며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과 능력으로 성경을 가릴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믿고 행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를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교황이거나 주교이거나 그가 감독회장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인간의 방법과 수단과 능력은 성경을 가릴 수 없다.
다만 그렇게 착가하는 이가 있을 뿐이다.

축자영감설이 인간의 손바닥인가? 그렇다면 축자영감설이 성경의 진리를 가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괜한 논쟁을 하지 말길 바란다.

분문비평은 언떤 영감인가? 영감이 아니라고? 그러면 무엇인가?
인간의 능력이며 지식이며 방법이며 수단일 뿐이다.
본문비평이야 말로 인간의 손바닥인것이다.

본문비평을 해야만 성경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할수 있다 생각을 하는가?
그렇다면 역사비평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정경사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이는가?

본문비평은 듣기엔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 또한 손으로 성경을 가리려는 행동일 뿐이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행위일 뿐이다.

축자영감설을 무너트려야 본문비평이 살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남을 무너트리려 하지 말고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본문비평을 무시해야 축자영감설이 살 수 있는가?
그렇다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야 할 것이다.

축자영감설이 정의의 문제인가? 그리고 진실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정의를 축자하지 말길 바란다. 진실을 축자하지 말기를 바란다.
정의와 진실은 축자되지 않으며 축자로 온전히 표현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본문비평이 정의의 문제인가? 그리고 진실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정의를 비평하려 하지 말고 진실을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정의와 진실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믿고 따라야 할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모르는가?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여기 하나님의 진실이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란 정의와 진실말이다.

진실로 이 정의와 진실을 믿는가? 그렇다면 축자하여 정의와 진실을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 속에 담겨진 정의과 진실의 소리를 듣길 바란다,

진실로 정의과 진실을 믿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본문이 들려지는 대로 믿고 따르려 해야 할 것이다. 정의와 진실은 인간의 비평의 대상이 아니며 정의와 진실은 하는로부터 이 땅에 내려온 감동이여 울림이니 말이다.
인간의 비평을 통한 인간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본문 속에 가득한 하나님의 감동을 느끼길 바란다.

감동은 감동으로 읽는 것이다.
영감은 영감있는 사람만이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울림은 곧 공명이 되는 진실한 성도만이 아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진실한 성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스스로 속이려 하는 자가 아님이다.

자신의 지식에 스스로 자신을 감추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지식의 세계에 스스로 자신을 갇아두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폐는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자신의 세계에 갇아두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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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36.220)
2019-07-21 15:00:03
회개 하셨는지요.?

성령세례 받으셨는지요.?

그 후 성경을 읽으셨는지요.?

성경 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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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36.220)
2019-07-21 15:27:36
육은 영 세계를 알 수 없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영의 세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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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75.223.36.220)
2019-07-21 16:00:46
맞는 것도 틀리고, 틀린 것도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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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5
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09:50:09
제가 회원정지 당한 것도 맞고
제가 회원정지 되었다고 비웃는 것도 맞습니다.
누가 맞고도 틀린 것이며 누가 틀리고도 맞은 것인가요?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나요?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이라 최티끌님에게 말씀하시던가요?
제가 회원정지 당한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옳은 일이라 하시던가요?
제가 회원정지 당했다고 비웃은 것도 맞습니다. 그러한 비웃음도 성령의 감동하심인가요?

어디 한번 영의 세계로 답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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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220.78.60.203)
2019-07-22 11:42:52
성령 훼방죄.

개인적으로
노재신목사님은
예수님보다 휴식이 먼저로 사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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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220.78.60.203)
2019-07-22 11:54:39
참고로

저는 감리회 탈퇴, 감리회 게시판 퇴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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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13:22:40
제가 성령 훼방죄를 짓고 있음으라 하시고 계신인가요? ㅎㅎ

그렇다면 감리회 본부는 성령충만함으로 행정업무를 행하고 있음이라 생각하시는 듯 합니다.

제가 예수님보다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을 하시나요? ㅎㅎ
도리어 너무 많이 쉬고 있음인 것 같은데요?
더 쉬어야 한다면 쉬죠... 뭐....

최티끌님의 말씀대로라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행정을 보고 있는 감리회 본부로부터 탈퇴가 되었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게시판 퇴출이 되었다니 그 또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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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39.7.57.152)
2019-07-22 13:29:28
미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리스페달'로 페이스 조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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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2 23:02:39
웨슬리는 미쳐야 예수를 바도 믿을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미쳐야 예수를 바로 믿을 수 있음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했습니다.
저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해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교리화 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다만 감리회가 여타 교단과 다른 점이라 할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성령을 통한 회심이며 성령을 통한 회복된 이성이며 온전한 자유의지이기도 합니다.

혹자는 예수를 믿으려면 미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혹자는 진짜 자신의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선 빤스를 벗어보라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미쳐서 예수를 믿는 듯합니다.

빤스와 예수님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나 빤스와 교주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목사는 교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미쳐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그제서야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한 구원의 길을 달려갈 수 있는 자격과 권세를 얻게 된 것입니다.

원래 감리회는 돈선거로 감독회장이 되려하거나 뽑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친 목사들이 그리한 것인데.... 감리회 안에도 미쳐야 예수를 믿는다는 식의 어리석은 이들이 부흥사가 되고 대형 교회의 목사가 됨으로 감리회 전체를 미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감리교인은 그러한 미친 소리에 아니라 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는 이들과 영적인 씨름을 합니다.
이것은 혈과 육에 대한 씨름이 아닙니다.
오직 영적인 씨름으로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신실한 믿음의 삶입니다.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가 주님께 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의의 최후 승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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