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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없는 교회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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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18일 (목) 14:49:56
최종편집 : 2019년 08월 01일 (목) 12:32:21 [조회수 : 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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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식물들은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면 좋아한다. 요즘 반려견을 키우는 것이 유행인데, 개는 자기를 예뻐하는 주인을 반기고 따른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고 한다. 화초도 사랑을 받으면 더 잘 자란다고 하고, 농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칭찬 받기 원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적 욕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보통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고 말하면서, 아이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라고 한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능력을 인정해주면 더욱 열심히 일하고 칭찬을 들으면 좋아한다. 그런데 목사들 가운데에는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으려고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칭찬이 중요하지만, 사람의 칭찬을 무시해도 좋은가?


인간을 보지 못하는 목사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교회의 야외 농구장이 설치된 지 10년이 넘어서 탄성포장재로 입혀진 바닥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탄성포장재에 중금속 성분이 들어 있어서 몸에 해롭기 때문에 학교의 탄성포장재 트랙을 없앤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교회학교 부장이 농구장 바닥 공사를 다시 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교회에서는 계속 미루기만 했다. 토목공사를 하는 김 집사가 그 말을 듣고 들뜬 바닥을 걷어내고 우레탄으로 말끔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자 김 집사의 헌신에 감동한 부장이 그동안 주일학교의 숙원 사업이었던 농구장 리모델링을 김 집사가 자비를 들여서 해주었다고 담임목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광고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광고시간에 목사는 농구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장은 목사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김 집사가 칭찬을 듣기 위해서 이 일을 한 것은 아니겠지만, 교회 측에서는 이런 헌신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부장이 예배 후에 목사를 찾아가서 “목사님 농구장에 관한 광고를 하지 않던데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목사는 “내가 광고를 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이 중요하지 사람의 칭찬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요!”라고 대답했단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 부장에게 “아마 목사님이 깜빡 잊은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잊지 않았다면 광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잊었으면 잊었다고 말하면서 오후 예배 때나 다음 주일에 광고하겠다고 대답하면 되지, 사람에게 칭찬 받기를 원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라고 응대해 왔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목사는 동식물까지도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주고 칭찬해주면 좋아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목사는 아이들을 칭찬하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교인들도 그들의 수고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주면 더욱 열심을 내서 봉사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 칭찬해주면 개인에게도 좋고 교회 부흥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왜 그는 그런 아주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있을까?

신앙이란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사람의 칭찬을 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몇 십 년 씩 교회를 다닌 집사나 권사나 장로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사람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쯤 모르는 사람도 없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가 어떤 힘든 일을 했을 때 그 수고를 인정해주는 말 한 마디가 우리에게 새 힘을 준다. 우리는 그런 것을 흔히 가정이나 직장에서 경험하는데,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교인들을 칭찬해주지 않는 목사는 교인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사는 하나님이면 혹은 예수님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하늘만 보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를 암송하면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즉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런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목사는 설교 시간에 믿음만을 강조하고 행위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율법이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혁자들의 주장이 구원의 문제에 관한 것이지 신앙인의 삶 전반에 걸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사람을 전적으로 타락하고 전혀 자유의지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만, 기도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주신다고 배운 우리에게 그런 믿음은 아주 모범적이고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행동을 외면하는 사람을 본회퍼는 ‘값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성경에는 노력하라고 가르치는 구절이 많다.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는 예수님의 말씀은 결단과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한다고 말한 바울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인가?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는 바울의 말은 분명히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믿음과 행위 어느 한편만을 강조하지 않고 양편 모두를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들은 그 두 가지 중에서 믿음만을 중시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원론에 근거한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서 서양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분법적으로(either/or) 사고했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남자와 여자 같이 대립되는 것들 가운데서 앞선 것들을 중시하면서 뒤의 것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간, 땅, 육체, 여자도 중요하다고 보는 양면수용(both/and)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양면수용적 사고는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학자 박봉랑은 1960년대의 신학적 기류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서, 맨 먼저 ‘이 세상성’을 언급했다. 이것은 특히 본회퍼의 신학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해방신학이나 생태신학 같은 상황신학에서도 세상성이 강조된다. 그 결과 현대신학에서는 하늘뿐 아니라 이 세상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소위 ‘아래로부터의 신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의 변화에 주목하면, 우리는 바울과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양면수용적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바울의 글에서 플라톤의 이원론적 영향에만 주목하지만,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은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난다. 그리고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는 예수님의 말씀은 의인만을 사랑하지 않고 죄인도 사랑하신다는 양면수용의 선포였다.

예수님의 양면수용적 태도는 이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서 힘쓰셨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사랑에만 치중해서 인간인 부모에게 드릴 것까지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뿐 아니라 부모에게도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셨다. 한 서기관이 하나님 사랑을 염두에 두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뿐 아니라 인간 사랑도 중요하다고 대답하셨다.

이러한 양면수용적 태도는 놀랍게도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육신을 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도, 육신도, 세상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세상에 오셔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분법적 사고의 해체를 체현하신 분이다.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양면수용의 시대에 와서도 예수님이 이미 2천 년 전에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이분법적 사고의 틀 안에서 사람의 칭찬은 대수롭지 않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칭찬을 먹고 사는 사람들

우리는 보통 축하할 만한 일은 여럿이 축하해주면 기쁨이 배가된다고 말한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선배 한 분이 귀한 상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같이 저녁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둘이서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좋은 논문들을 쓰고 저서를 내더니 이런 좋은 상을 받게 되어서 축하한다고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분이 술을 몇 잔 드신 후에 축하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옛날 일을 털어놓았다. “수년 전에도 내게 좋은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장남에게 이런 좋은 일이 있어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더군.”

사람들은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신앙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하고, 축하받기를 바라고, 칭찬을 좋아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칭찬을 받고 인정받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칭찬을 듣는 것과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누가복음 7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마가복음 12장에서는 한 여인이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9)고 예수님이 그 여인의 행위를 극찬하셨다.

예수님이 어릴 때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기록이나 예수님이 사람들을 칭찬하셨다는 기록을 보면 교회에서 교인들을 칭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어린 아이들만 칭찬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는 칭찬을 먹고 산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존재로 지으셨다.


세상과 천국

사람의 칭찬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나님의 칭찬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목사는 이 세상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우리의 소망은 오직 천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목사는 흔히 요한1서 2장 15절에 나오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런데 그 말씀은 16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세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목사는  『천로역정』의 주인공의 삶을 본받으라고 말한다. 그 주인공은 이 세상은 장차 망할 곳이라고 믿고 처자식을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천국만을 바라보고 나아간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가정도, 직장도, 재물도, 명예도 모든 세상적인 것을 내려놓고 천국만을 소망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정말로 이 세상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축복이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오래 사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일부 목사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삶은 아주 중요하다. 계시록에는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20:13) 받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세상에서 선을 행한 사람은 낙원에 가고, 악을 행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 달리 말하면, 세상에서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악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사람은 하나님도 악하다고 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칭찬은 당신은 천국에 갈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는 축복의 말이다. 따라서 어떤 교인이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그를 칭찬하고 그의 착한 행실을 인정해 주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주고 축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 착한 일을 한 교인을 칭찬하는 데에 인색해야 한단 말인가?


마치면서

하나님의 칭찬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교인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신본주의적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신본주의를 강조하고 인본주의를 이단시했다. 신본주의자들은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그리고 무가치한 존재로 본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으시고 세상에 살도록 허락하신 사람이 정말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그를 축복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축복을 받은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들을 다스리라고 위임받은 청지기들이다.

그리고 구약에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인간이 전혀 무가치하다면 그런 무가치한 존재가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기쁨이 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을 기쁘게 받으실 만한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다.

문예부흥기 이후로 인간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제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나 존엄성을 내세우는 사상가들의 주장이 그러한 정치적 변화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확대는 성경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축자영감설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지만, 그 기록 과정에 기록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셨지만, 일정부분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적극적으로 표명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근본주의자들이나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크게 반발하려 하겠지만, 신학자들의 진지한 연구의 결과에 의한 이러한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이 바뀐 뒤에도 옛것을 지키려는 과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옛것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신앙은 확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옛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하나님의 칭찬만이 중요하고 사람의 칭찬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목사는 옛날의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다. 사람의 칭찬을 무시하는 사람이 평신도라면 그것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자기만의 신앙적 신념을 지키는 것을 아무도 시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혹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교인들을 가르쳐야 하는 목사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옛날 교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면서 나를 돌보지 않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사람들처럼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자아의식이 강하다. 그들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으려 하고 칭찬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도 같은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람의 칭찬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그들의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들의 내면에 불만이 쌓인다. 그러면 점차 교회에 나가는 그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결국 그 교회를 떠난다. 요즘 가나안 성도가 2백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교회에 안 나가는 이유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이유들 중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란다. 그런데 그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개야 짖어라 기차는 간다’ 식의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많으니 참으로 걱정이다.

나는 교회가 현대문화에 영합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즘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끄는 복음주의 목사 팀 켈러는 교회가 현대사회 안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의식을 파악하지 않고는 그 사회의 문제점을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의 말에 동감한다.

인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옛사람들과 달리, 그들의 수고가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기본적인 소망이 무시되는 것을 발견할 때, 다시 말해서 교회에 인간이 없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교회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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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20 23:40:16
교회는 원래 인간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원래 성도가 있는 곳이어야 하며 성도가 되길 원하는 인간이 찾아와 회개하여 거듭나는 곳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인간은 제아무리 도덕군자라 하여도 교회에 걸맞지 않은 자이며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제 아무리 똑똑한이라 하여도 교회에 걸맞지 않은 자이며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제 아무리 권력을 갖고 있다 하여도 교회에 걸맞지 않은 자이니....

교회는 권력과 지식을 내려 놓는 곳이며
교회는 그 어떠한 세상의 명예심과 도덕심도 내려 놓아야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도 없으며 오직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신 곳이기에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성전은 성령이 거하는 곳이며 성도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 자이니 성전과 성도는 이름은 다르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성전(교회)은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성전)은 성도들이 머무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머무는 곳이며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교회-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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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7-18 19:19:45
농구장 보수공사를 자청하여 실행한 교인을 칭찬하지 않은 목사에 관하여
저는 지금 가나안교인이고 일반교회에 출석하지 않은지 제법 되었습니다. 교제하고 있는 가나안교인 십여 명이 일주일에 한번 씩 모임을 갖습니다. 번갈아가면서 한 사람이 간사를 맡아 그 사람 집에서 일주일에 한번 씩 시간을 정해 모이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간사를 맡게 되면 ‘성경공부’ 위주로 진행하고, 다른 어떤 사람이 간사를 맡게 되면 그 사람 집에서 간단한 기도만 드리고 ‘먹자판’을 벌이고, 또 다른 사람이 간사를 맡으면 ‘찬송가 음악회’ 위주로 진행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음식 재주가 있는 사람은 음식으로, 노래실력이 있는 사람은 노래로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가나안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와도 소통하는데 두 달에 한번 정도는 둘이서 식사를 같이 합니다. 이분이 바로 농구장 보수공사를 본체만체한 목사와 비슷한 유형입니다.

즉 농구장 관련 목사 曰 “내가 광고를 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이 중요하지 사람의 칭찬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요!” 라는 유형의 목사입니다.

내가 만나는 목사는 비록 유식하지는 않더라도 사실은 무식하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분 나름의 믿음에 대해선 두발손발 다 들 정도로 진실합니다. 꽉 막혀있긴 하지만 그 한계 내에서는 정말로 진실합니다. 교인이 떠나가도 붙잡지 않습니다. “교인이 떠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무슨 수로 막느냐?”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목사가 좀 무식해보였고, 좀 우습게 보였습니다. 저는 저의 짧은 생각으로 신도들이 하나 둘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이 교회에 다니던 사람 중 자유의지와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고, 인간 간의 교제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우리 쪽 가나안교회에 오고, 이른바 꽉 막힌 걸 추구하는 사람들은 목사 교회에 그대로 남은 겁니다. 세월이 흘러 우리 쪽은 겨우 십여 명인데 목사 쪽은 바글바글합니다.

웬만한 사람은 <자유의지>보다는 <종교적 권위>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쪽은 종교적 권위가 없으니까 딴따라집단이고 제멋대로 하나님을 믿는 거지같은 자들이라는 인식이 깔려있고, 목사 쪽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교회인데 아무렴 딴따라집단보다는 못하겠느냐는 인식이 깔려있어 게임이 안 됩니다. 우리가 이단인거죠.

교회 목사가 꽉 막힌 것하고 신도가 떠나는 것하고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다는 증거인 셈이죠. 오히려 목사가 꽉 막히니까 김삼환 목사도 뜨고, 조용기 목사도 뜬 것이죠. 권위 있는 목사가 복을 준다고 하니 그기에 몰입되는 거죠. 어차피 저와 같은 부류는 이 세상에서 소수파입니다. 다수파를 상대로 해야 교회가 번창하는 겁니다. 그게 바르냐? 그르냐? 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농구장 보수를 본체만체한 목사의 교회는 그런대로 될 겁니다. 물고기 많은 데 낚시 줄을 놓았으니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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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줍잖은 (1.243.174.148)
2019-07-23 22:09:59
x김경환님 저희들도 나름의 가나안성도 모임을하고있습니다
어떠케하면 개별연락을 드릴수있을까요? 연대나 정보공유를
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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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7-24 15:38:22
우리 모임의 대표간사는 6개월마다 순번제로 추대되며 사실상 일반교회의 목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간사가 자기의 임기 동안에는 전권을 행사합니다. 방금 현재의 대표간사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전에 다니던 교회와 우리는 자매관계이고 그 교회와 상호 교류하는 모임인데 다른 가나안교인과 연대하는 건 무리가 아니냐고 하였고, 다른 교회에 다니다가 가나안교인이 된 분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지 않으냐? 순혈주의도 장단점이 있고, 혼혈주의도 장단점이 있지 않느냐는 저의 주장과 의견이 대립되었습니다. 대표간사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대충 어떻게 운영되는지 간략하게 소개해드릴게요.

1. 대표간사는 모임에 참여한 후 1년이 경과하면 당연히 자격이 주어지고, 자격이 주어진 당사자가 거부하지 않는 한 6개월마다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한다. 현재까지 사실상 3명이 대표간사를 교대하고 있습니다.

2. 매주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간사와 대표간사가 협의하여 매주 모임의 성격을 정하여 회원에게 모임 3일 전에 통보한다.

3. 자발적으로 모금한 금전은 6개월에 한번 씩 개봉하여 불우이웃돕기 등에 사용한다. 매주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간사는 회원들에게 일체의 비용을 청구할 수 없으며 간사 본인의 부담으로 한다. 비용이 부담되는 회원은 간사를 맡지 않아도 된다. 현재까지 사실상 3명이 간사를 교대하고 있습니다.

4. 기존 교회와는 자매관계이고, 기존 교회와 가나안모임에 동시가입도 허용하되, 우리가 선제적으로 기존 교회의 교인을 빼앗지는 않는다. 알음알음 스스로 찾아오는 교인만 받아들인다.

5. 성경해석에 관한 한 어느 누구라도 자기의 견해를 밝힐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자유토론을 보장하며 토론이 끝난 후에는 묵상기도로 예배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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