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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길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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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14일 (일) 14:35:11 [조회수 :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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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행함으로 받는다. (○) (☓)

 

필자는 지난번 글에 세상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의 말을 썼다. 그래놓고 그 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구원은 행함으로 받는다. (○)냐, (☓)냐?’라니, 도대체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냐는 말을 듣는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사실 구원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신자라면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에베소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2:8,9)라 말한다. 그런데도 이에,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데에 아니라 토를 달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구원’의 필수조건인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하는 데에 이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세상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실제로는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지옥은 가기 싫고 그저 막연히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믿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수도 있고, 또 내세 같은 걸 또렷이 믿지도 못하면서 그냥 있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나도 믿으니… 하는 정도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고, 그저 교양정도로 여기고 교회에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라고 불리는 교인들,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런 유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런 유의 사람들도 믿는다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확신하는 교인들은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믿음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오.”’ (약2:17,18 공동번역)

여기에서 야고보는 ‘행동이 따르지 않은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2:17)이라는 말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는 말이다. 죽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시체이듯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계20:12)는다 하고는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13)는다고도 말한다. 행위 곧 행동, 행함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행함으로 받는다. (○)냐, (☓)냐?’는 문제를 정신 나간 사람의 헛소리로만은 볼 수가 없지 않을까 하는데, 어떤가. 그대라면 이 문제에 뭐라 답하겠는가. (○)라 하겠는가, 아니면 (☓)라 하겠는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 행함에 대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말씀을 이 행함과 관련이 있는 내용에 할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그렇다면 ‘행함’이란 어떠한 행동이나 행실을 말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굳이 예수님의 이 말씀까지 들지 않더라도 ‘행함’이 ‘착할 행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착한 행실’은 여기에서 말하는 이 ‘행함’에 포함되는가. 아니다. 만약 모든 ‘착한 행실’이 다 포함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착한 행실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 되고 구원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 불신자의 착한 행실도 신자의 그것과 거의가 같으나 다른 데가 있다. 그들의 착한 행실도 우리의 그것처럼 참 좋은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우며 감동도 준다. 그런데 그들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 물건 불 탈 때 흔적도 없이 타 버리고 만다. 그러나 믿는 우리의 그것은 그때 오히려 찬란하게 새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시는가

 

지금까지 생각해 본 것처럼 믿음에는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그분의 뜻과 배치되는 길을 간다면 그게 어디 믿는 것인가. 지식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행함으로 믿음을 믿음 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필자는 찬송가 143장(통일 141장) 5절의 가사를 참 좋아 한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여기에서의 몸은 몸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가리키니 자신을 송두리째 몽땅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각오를 하고 결단을 내려 실제로 그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필자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 찬송을 부른 적이 없다. 그냥 가사 자체에 끌려 자신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도 없이 그저 감상적이 돼서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에 대해 몇 개월 동안 기도하며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자신의 전존재를 모두 하나님께 바친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나 자신은 어림도 없고 다른 사람도 그건 가능한 일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성경을 이리저리 찾아보는 동안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 하시고,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라고도 말씀하셨다.

28절의 ‘무거운 짐’이란 종교적으로 부과 된 의무와 죄의 짐을 들 수 있지만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살아가기 힘든 세상살이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30절의 ‘쉽고’로 번역된 ‘크레스토스’는 ‘좋다’ ‘친절하다’ ‘유익하다’ ‘편하다’ ‘부드럽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말씀을 공동번역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로 옮기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알기 쉬운 표현으로 말해 보면, ‘세상살이로 생고생을 하는 사람들이여,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멍에는 멍에라기보다 날개라 하는 편이 적절한 이해가 아닐까 한다. 많은 신실한 성도들은 신앙은 속박이 아니라 참된 자유라 간증하곤 하는데, 이게 그 방증이라면 어떨까.

여기에서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이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시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30)고도 말씀하신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해 주고, 집도 형제자매도 부모자식까지 버리라니 이보다 힘든 멍에가 어디 있으며 또 이보다 더 무거운 짐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다면 그는 사도의 반열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예수님의 큰 제자가 되었을 것임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재산의 풍요가 예수님의 제자 됨을 막았으니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 운운한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라는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고 대답하신 데에 이어 하신 말씀이다. 어떤가. 굉장하지 않는가. 부자청년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다면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이에 버금가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었을 게 아니겠는가.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부모형제를 버렸다 한 것도 패륜이라 할 정도의 불효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렸다’고 한 것은 베드로의 과장된 말투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부모형제를 버리라고 하시지 않는다. 전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쪽박을 차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자식을 번제물로 내어놓으라고는 더더욱 하시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도 사실은 말씀뿐으로 번제물은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두고 계셨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매정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도 하나님이시지만,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나가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입니다.” (히11:17-19)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건 그냥 그리 된 것이 아니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순리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형제자매 아들딸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마10:37)다고도 말씀하시는데,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므로 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님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하게 된다.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 찾아뵙는 것은 가뭄에 콩 나 듯 하면서 자녀에게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면서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으며 다 너를 위한 것이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게 된다. 교사로서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 시험지를 미리 빼내다가 주어 높은 점수를 맞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가. 필자는 앞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바치는 것이라 전술했는데, 사랑하는 부모형제 처자식을 그대로 놔두고 재산도 바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전존재를 바치는 것인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렇다. 이 찬송가 가사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전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전 재산을 내어놓으라 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라 하지 않으시듯, 누구에게나 목숨을 내어놓으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지금도 복음의 척박한 땅에 가서 순교를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순교자가 되라고는 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존재는커녕 바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는가. 아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맞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뜻,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래도 하나님의 뜻 저래도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 말을 즐겨들 하는데, 그런데, 도대체 그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너무도 방대하여 입이 딱 벌어질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리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대한 성경의 내용도 단순화하여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해진다. ‘사랑’ 이 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도 사랑이시다. 그러니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가리켜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견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살면 끝나는 것이다. 사랑으로 사는 것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게 말로는 쉽지만 그렇게 쉽지 않는다는 것을 필자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사랑으로 살려면 우선 버려야 할 것이 많다. 욕심, 미움, 시기, 질투, 우월감, 열등감, 거짓, 자랑, 모난 마음 등등 실로 많다.

그런데 이 중 한둘만 버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롬14:8)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의 각오라면 앞에 열거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쉬울 것 같지만 실은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따듯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넉넉한 마음, 정다운 마음을 갖는 것이 그것인데, 그것이 없으면 사랑한다 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나를 사랑하는 상대방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을 것이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다(마5:46,47 참조).

예수님께서는 “네 오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41)하라 하신다. 그리고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고 하신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언어도단이란 이런 경우에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하라? 어디 될 법이나 한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또는 성경말씀을 곧이곧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리 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절대로 시키시지 않는다. 기도하며 전심전력 노력하는 것만으로 그리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사는 것도, 그러니까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도 마음 한번 크게 먹고 결단만 내린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필자는 앞에서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믿음이 아니니 구원에 행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행함’은 ‘착한 행실’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또 사랑으로 사는 것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된다고도 했는데, 여기에서 사랑이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그 착한 행실임은 물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사43:7)하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바울을 통하여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하신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이 순리이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인간이, 피조물인 인간이 불행하게 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섭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조 목적에 따른다면, 섭리에 순응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요새’가 되고 ‘산성’이 되고 ‘방패’가 되어 주시는가

 

필자는 앞에서 마7:21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의 말을 하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사랑으로 사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의 뜻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인가를 바라거나 이루겠다고 하는 ‘마음’이 ‘뜻’인데, 그 같은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나의 뚯’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버려야 한다.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뜻’은 버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르는 것이며, 그분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우리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가 된다고 찬송한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시144:2)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새’요 ‘산성’이며 ‘방패’가 되시는 것은 다윗에게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위험으로부터 건지시는 것도 그렇다.

어떤가. 이만하면 ‘나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를만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뿐만도 아니다. 우리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마7:7)이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하여 구한 것을 그대로 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죽자 살자 매달려 기도했음에도 이뤄지지 않으면 기도가 부족했다, 믿음이 약했다. 어떠했다는 등등의 말들을 늘어놓으며 지나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그러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하시고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라고 말씀하신다. 기도하여 구하고도 이뤄 받지 못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인 것이다.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시라고만 한다면 너무 염치없는 일 아닌가. 불효라는 불효는 다하고 온갖 망나니짓 또한 마다하지 않으며 돌아다니는 등으로 부모의 얼굴을 있는 대로 깎아먹으면서 자식의 권리나 주장한다면 어떻겠는가. 어쩌다 한두 번은 그래도 자식이라고 들어 주는 일은 있다 해도 대개는 아니지 않는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 대표되는 육신에 속한 것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뒤에 주시라 해야 한다. 그게 순서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는 ‘나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그 으뜸이다.

만약 ‘나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데도 구한 것을 이뤄 받지 못한다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거짓이 된다. 성경은 성도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한 것을 모두 다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라고 하셨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라고 해서 그에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약4:3)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부터 분별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가르쳐 주신 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드리고 있다. 그렇다 ‘일용할 양식’으로 족해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이다.

그런데 ‘일용할 양식’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그날그날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양식이 된다. 그렇다면 몸은 무엇을 입으며 잠은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 ‘일용할 양식’에 의식주가 다 포함된다 해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통비도 필요하고 자식들도 가르쳐야 한다. 정도에 차이는 있다 해도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문화생활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일용할 양식’이라 함은 인간답게 사는 데에 크게 지장이 되지 않을 정도의 생활에 필요한 물질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다. 노숙자에게는 7,8평의 임대 아파트가 부러울 것이고, 7,8평 아파트에 사는 극빈층은 20평대 아파트에서 살아보는 것이 꿈일 수 있다. 대기업 총수에게 가사도우미도 두지 말고 30평대 아파트에 살라 한다면 무리이다.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집에서 부리는 사람에게 갑질을 하면 안 된다. 그것도 어떤 사람처럼 최악의 갑질을 하면 더더욱 안 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 그 자체를 존중하는 분이시다.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시다.

생계 꾸리기가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면 검소하게 살면 된다. 그렇다고 저축에 온힘을 기우려 부를 축적하라는 말이 아니다. 노후나 다른 타당한 필요를 위한 저축은 필요하겠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나누며 살아야 한다. 아니 믿는 사람에게 있어 나눔은 필수이다. 물질이 없으면 다른 무엇인가로 나누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이 예수님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25:40)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내 형제’나 ‘지극히 작은 자’를 들어 말씀하셨다 해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한정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 형제’라 함은 믿는 사람들을 말함인데, ‘여기’라 했다 해서 꼭 그곳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소외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도 그렇다. 잘나고 재산 많은 사람들에게야 누군들 잘하지 않겠는가. 믿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말 또한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옹졸한 분이 아니시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모든 사람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 당신께 한 것이라는 말이다.

각자의 형편에서 나눔으로 인해 일용할 양식으로 부요를 누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요새’가 되고 ‘산성’이 되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위험으로부터 건져 주신다

 

 

그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길을 걸어보지 않겠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나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고, 예수님의 뜻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환언하면 내 부모형제 처자식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도 되니, 이 얼마나 황홀하게 빛나는 은총인가.

그런데 여기에서의 사랑은 이 세상 물건 불탈 때 같이 타 없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 물건 불탈 때 오히려 더욱 영롱하게 빛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하는 사랑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뜻’이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썼는데,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주인으로 모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의 마음, 그 사랑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물론 그리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힘으로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구하고도 이뤄 받지 못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바치게 해 주시라는 것보다 우선순위의 기도는 없다. 문제는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믿기 참 좋은 시대의 참 좋은 곳에서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다고 박해 같은 것을 받을 염려는 별로 없다. 불이익도 마찬가지다. 그런 게 간혹 있다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믿는 사람이,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은 잘 못 믿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예수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살기만 한다면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간다 해도 환영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필자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형제를 버리라고 하시지 않고 전 재산을 바치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했다. 다만 더 가진 사람은 더 가진 대로 덜 가진 사람은 덜 가진 대로 되도록 검소하게 살며 나눔에 힘을 쓰는 가운데 일용할 양식으로 부요를 누리는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말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살면 완벽하게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언제 어떻게 목숨을 내어 놓으라, 전 재산을 내어 놓으라 하실지 모르는데, 만약 그러신다면 순종하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마음이 있느냐에 있다. 성경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미워하는 한이 있어도 살진 소를 먹는 쪽을 택하고, 하늘나라가 아닐지라도 초막 아닌 궁궐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이다.

이기주의가 팽배해 감에 따라 이제 양심 같은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 아닌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밟은 발밑의 사람은 괴로워 신음을 하고 있는데 제 배 따습다고 웃고 서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말씀하신다.

이기주의의 산물인 배금주의는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그릇된 사고를 낳아 맘몬을 하나님의 위에 두고 섬기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마6:24)라는 예수의 말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못된 세상풍조가 교회로 흘러들어와 교회 밖과 구별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필자는 물질을 정말로 소중한 보배라고 생각한다. 물질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이 생명체요,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을 독식 하려 함으로 타에 피해를 주게 되면 사회악이 되고 독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타와 나눈다면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도 있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보배 중의 보배가 된다.

자기 배만 따습게 하기 위해 돈을 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나눈다고 하는 목적도 있어 번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된다. 출세도 그렇다. 나만을 위함이라면 공공의 적이 될 수 있지만, 더불어 살기 위함이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필자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는 의미의 말을 했다. 나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일단 각오하고 결단만 내린다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만도 아니라는 말 또한 했다.

여기에서 우리 한번 다 같이 이에 대해, 그러니까 나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어떤가. 내 인생, 내 영혼이 달린 문제이니 심각하게 생각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나의 뜻을 접고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그럼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나의 ‘요새’요 ‘산성’이며 ‘방패’가 되어 주시고, 그분께서 나를 위험으로부터 건져 주시게 되는데, 어떤가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길인데, 큰맘 먹고 결단을 내려 봄직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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