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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제3의 聖禮입니다.
오재영  |  ojy0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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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06일 (토) 11:20:41
최종편집 : 2019년 07월 06일 (토) 11:23:35 [조회수 :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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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제3의 聖禮입니다.

최근 유튜브에 등장한 캐나다 한빛교회 임현수 목사의 북한 ‛노동교화소’에서 2년 6개월간 본인이 겪은  생생한 신앙고백의간증이 같은 시대 동일한 분야의 사역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우리가 그와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지금의 이 모습들이 과연 정상적인 목사의 진정한 모습들인가? 안일과 나태에 빠진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그는 고난을 ‘제3의 성례’라 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거쳐야하는 정상적인 고난苦難은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 있던 신앙의 불순물들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둘 씻겨나가는 중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음으로 겸손과 긍휼矜恤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비로써 이 고난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향하는 것을...

임현수목사는 믿음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기다림이라했다. 더욱이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성경의 말씀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 엄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의 뜻을 세우려할 때가 많다. 그로인해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 앞에서는 순간 신앙의 연조와 상관없이 당황하며 허둥대는 우리의 가엾은 모습들이다. 많은 이들이 히11장을 믿음의 장 이라한다. 그리고 믿음의 정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때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8~10)했다.

오늘 너나없이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내일을 의식함도 없이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욥기 23장 10절 말씀은 어떻게 받아야 할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합 2:3의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시119:67,71. “고난당하기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지금도 형식적이고 명목상의 신앙에서 방자히 행하든 이들이 어느 순간 본인에게 찾아온 그 고난을 겪고 난 후에 비로써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언제 오는가?

요즘에도 주변에서 자칭 지도자의 위치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들 중에는 참으로 황당하고 민망한 모습을 대할 때가 있다. 그들이 성경을 빙자하여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분명히 명목상으로는 영혼 구원을 한다면서 그가 말하는 내용은 온통 자기자랑과 검증되지도 않은 추상적인내용뿐이다. 또 가끔 등장하는 모습들이지만 자신의 저서와 어느 집회의 강사의 프로필사진의 전면에 본인이 팔짱을 낀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도대체 저이는 무슨 생각으로 어디에 근거한 대단한 삶을 살아왔기에 저를 저리도 당당하게 하는가? 사실은 은혜로 선택된 한낱 종놈의 신분인 주제에...

전에 ‘네이선 콘래드’ 목사가 빙벽등정의 선등(先登)에 대한 자만심으로 인한 추락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진솔한 고백을 인용한 적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일을 선전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혼돈의 시대에 그의 진솔한 실패의 고백은 동일한 리더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그의 표현대로 등반가들은 루트에 오를 때 아드레날린이 나와 본인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상태를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 상태’라고 부른다. 이런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면 아드레날린은 등반가의 피로와 안전, 상식까지 모든 것을 제압해 버리기에 이 아드레날린에 취하면 자신이야말로 천하무적이라는 생각과 함께 행동하지만 실제적인 상황은 반대로 그의 근육은 풀리기 시작을 한다. 때문에 경험 많은 등반가는 그 시점에서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선 다음 얼음 나사못을 박은 채 쉬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날의 등반을 포기하고 빙벽을 내려간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드레날린 흥분 상태에 빠진 이들은 그대로 그 위험천만한 빙벽을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거듭 합리화 하면서... ‘나는 괜찮아, 조금 있다가 쉬면 돼. 충분히 해낼 수 있어, 계속 움직여야 하니까, 지금은(아니 절대로)멈출 수 없어.’ 그는 지금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있는지와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지금 그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마지막 확보물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체력은 고갈됐으며, 휴식과 안전 조치가 무시되고 있음을 모른다. 그래서 경험이 많고 노련한 등반가들은 이처럼 지나친 아드레날린 고조 상태에서는 등반을 하지 않고 하산을 한다고 한다. 그것은 자칫 탈진과 과욕으로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비단 빙벽등반가에게만 해당이 되겠는가?

다행이도 그는 자신에게 닥쳤던 위기를 통하여 인생과 사역을 더 건강하게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에서 “영적 리더들은 가장먼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부르심의 핵심과도 닿아 있는 문제이다”라고 했다. 오늘의 무한 경쟁시대에 사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문화에서는 특히 그렇다. 스카지로는 이어서 말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한계를 존중하지 않으면 과욕과 스트레스, 탈진에 빠진다.” 그것이 한낱 개인에 국한된 문제뿐일까? 지금도 지난至難한 세월과 함께 기대를 모았든 이들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허물어지는 이들의 모습들을 본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신앙의 일탈에서 당하는 아픔들이다.

우리 모두가 지적하며 이론적으로는 아는 내용들이지만 대부분의 리더들이 허물어지고 그의 삶이 초라하게 끝이 난후에 후회와 좌절 속에서 뒤늦게 깨닫게 되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개인이나 단체가 당하는 위기는 그들이 낮은 자리에서 어려울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부분의 고난이 모두 끝이 났다고 자만하며 자랑꺼리와 함께 모든 것이 잘 될 때, 형통하고, 건강하고, 주변인들로 부터 칭송을 듣게 될 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평안한 때, 그때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때다. 그때에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의 성찰에 게으르면“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한 말씀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자신임을 알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는 말씀이다.

 

이제는 짜배기가 아닌 신앙의 진품 인격을 기대하며...

언제나 이 땅의 역사는 반복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하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성직자들인 우리가 사는 길은 원리로만 보면 간단하다. 그것은 지금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것에 과감한 결단으로 작별을 고하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이다. 즉 본래의 사명인 영혼 구령에 매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사상적으로 이어오고 있지만 타락된 교회의 역사의 단면인 제정러시아시대의 볼세비키 혁명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다. 국민의 90%가 크리스천이고 혁명의 주체들인 볼세비키 당원들은 10%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부패한 정부와 교회를 뒤집고 6천만을 숙청시키고 70여년동안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절반을 붉은색으로 변하고 우리조국 강산까지 피로 물들였다.

언제나 영력이 쇠퇴하면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내일이면 자신들에게 임할 참담함도모르고  전날 늦은 밤까지 성직자들이란 이들이 떼로 모여 서로를 정죄하며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운 내용들이 무엇이었는가? 기록에 의하면 그 논쟁이란 것이, 바늘위에 천사는 얼마나 올라갈 수가 있는가? 축도에 손을 펼 것인가? 주먹을 쥘 것인가, 성직자의 가운의 길이와 스톨의 짧고 길음, 급기야는 성수聖水에 파리가 빠졌는데 신학적인 논쟁으로 한쪽에서는 파리가 거룩해졌다. 한쪽에서는 성수가 어떻게 더러워질 수가 있는가? 온갖 비 본질에 소일했다는 기록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라 이게 정상적인 모습들인가? 지금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 속에서 살고 있다. 무능한 정치지도자의 무책임한 공약空約과 뜬구름 잡는 허황 속에 많은 이들이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영혼을 교도할 우리에게 오늘의 시대를 향한 주님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신탁神託의 말씀들이 있는가? 이것이 분명치 않다면 이것이야말로 성직자들인 우리들에게는 두렵고도 참담한 진정한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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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신 (175.202.122.164)
2019-07-07 15:24:44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제3의 聖禮라구요?
참 표현을 그럴싸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감독회장이 감리회 소속 목사를 억울하게 미파시켰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감독회장이 앞장서서 억울하게 몰아 붙여 젊은 목사를 휴직 시켰다면 또 그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제3의 성체라면 고난을 가하는 목사회장은 제3의 악체가 일까요?

돈으로 감독회장의 지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번하게 변호사를 앞장세워 감독회장의 직위 유지하고 있음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구도자라 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젊은 목사의 사정을 알고도 침묵을 지키며 돈의 감투를 쓴이에겐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면 진정 구도자가 맞을까요?

구도자의 가면을 쓰고 고난당하는 이에 대하여 방관자가 되어 있음이 오늘 감리회 목사들의 안일과 나태에 빠진 서글픈 자화상인 것은 아닐까요?

입으로는 구도자를 넘어 성자와 가까운데 그의 삶은 방관자요 의에 대하여 무기력한 자이며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이를 향하여 '아이들이나 잘 돌보시게 시간은 금방가니 아이들만 잘 돌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있을게야!'라고 한다면 그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성체이기에 방관함일까요?

구도자의 가면을 쓴 방관자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성체가 오르내리고
구도자의 가면을 쓴 방관자의 입에서 안일과 나태에 빠진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의 이야기가 오르내린다면 그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감리회의 원로이신 오재영 목사님,
진정 구도자의 길을 넘어 그리스도 성체의 길을 걷길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이들의 아픔에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요.
그렇게 한다면 구도자도 그리스도의 성체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제가 보증하지요.

감리회는 돈으로 만들어진 감투를 쓴이가 변호사를 앞장세워 자신의 감투를 놓지 않으려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구질구질하다 감리회 돈 감투 쓴이여,
도가 지나치네 돈 감투 쓴 이여,
자신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떠벌이네 돈멍구같은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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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7-07 19:25:23
‘도덕으로 치장한 방관자’보다는 ‘흠결이 많더라도 의를 위해 행동하는 자’에게 賞給이 내릴 것입니다.

다윗은 간통범(바세바), 戀敵살해범(바세바 남편), 매국노(팔레스타인과 합세하여 자기 고국에 대항)라는 치명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태교를 확립한 선지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건 다윗이 방관자가 아닌 행동가였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완전하지 않기에 매국노가 되기도 하고 간통범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義가 다윗의 약점을 덮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저 外飾하는 방관자’로서 전명구 감독회장보다는 더 나쁜 사람 축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각자 바쁘다는 등 변명을 하더라도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방관한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義를 실현하고자 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기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습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이 하나님의 義를 실현하기 위해 ‘미파조치’를 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전명구 감독회장이 하나님의 義를 세우는 데 과감하게 몸을 던진다면 다윗의 예에서 보듯이 그간의 허물은 덮어질 것입니다. 전명구 감독회장은 억울한 사람의 고독한 외침에 응답해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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