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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안되는 천주교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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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7월 05일 (금) 15:09:00
최종편집 : 2019년 08월 01일 (목) 12:35:51 [조회수 :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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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의 한도 안에서 판단하자면 외국인 신부들은 겸손한 사람이 많았지만 한국인 신부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심지어는 진보적 의식을 가진 신부들 조차도 남과 더불어 일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함께 일을 하면서 기분이 상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들 탓이 아니라 한국 천주교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안에서는 신부가 보통 사회인의 감각 정도만 가지면 존경 받는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좋은 신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 노릇을 오래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알고 있었던 바로 그 신부가 주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구욥 신부는 1986년도 광명시 하안동에서 빈민활동을 할 때 내 나와바리인 철산 4동 천막이 있던 안양천 뚝방 건너에 있는 구로 1동 본당 신부였다. 구 신부가 천막에 가끔 찾아와서 특별히 우리들이 하는 활동을 도와주는 일은 없었지만 뒤에서 지켜보다 갔다. 그러나 자기 본당 신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철거민의 천막을 찾아온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이 나에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런 그가 주교가 되었다고 해서 교구청에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 때 어떻게 천막을 찾아오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구 주교는 잘 기억은 않나지만 아마 철거민들이 본당에 찿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구 주교는 그 때나 지금이나 겸손하고 온화했다.

그러나 사실 내가 구 주교를 찾아온 것은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옛날 기억을 되살리려고 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드니의 한 성당에 이상한 신부가 와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서 내가 아는 교우들 여럿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을 고자질 하기 위함이었다. 시드니의 골치 아픈 신부는 인천 교구 소속이라서 소속은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집안이니 어떻게 좀 해 볼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시드니 신부가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한글 학교를 어느 날 갑자기 폐쇄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페북에 썼더니 댓글에 어떤 신부의 거취를 알고 싶다고 하는 댓글이 달렸다. 이미 구 주교와 휴대폰으로 통화를 했었지만 별 일 아닌 것으로 전화를 하면 행여 방해가 될까 보아서 비서실에 문의를 하려고 했다. 구 주교가 준 명함에 있는 천주교 교구청 대표 전화를 통하여 비서실과 통화를 하려고 했지만 ARS 시스템의 안내대로 이리해도 안되고 저리 해도 안되고 30분 씨름 끝에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천주교의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은 접근 할 수가 없고 종적으로만 연결되고 횡적으로는 도무지 연결이 안 되는 시스템이었다. 즉 전화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무조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주교와 통화커녕 주교 비서실과 연락하는 것 조차도 어려웠다. 아마도 청와대나 국정원도 이것 보다는 쉬울 것 같다.

열을 받은 나머지 구 주교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가 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하철 안에서 그것도 가장 시끄러운 쇠소리를 내며 달릴 때이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친절하게 들릴 수 없는 고성으로 대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성자의 DNA를 듬뿍 받은 것 같은 구 주교는 그런 목소리 밖에 없는 것처럼 친절한 목소리로 “그런 일은 처음이네요. 한 번 알아 봐야 하겠네요”라고 했다. 모처럼 맺어진 주교와의 인연도 고성을 지르는 것으로 끝이 났으니 아무래도 나는 천주교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십대 시절 신앙 보다는 집안이 워낙 콩가루 판이어서 현실 도피적 자세 때문에 신부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었다. 그러나 의지 할 데가 없는 상황인 나는 신부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지만 천주교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안정된 신앙가정 출신의 성소 후보자가 필요 했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한참 종교적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에 성인에 대한 동경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인물이 있었다. 성당 뒷마당의 한 쪽 구석에 축대에 기대어 방 한 칸을 들여서 살고 있었던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던 배 동순 옹이 있었다. 배 옹은 교육도 받지 못하고 걸인으로서 담배꽁초를 주워서 모아 판 돈으로 한 달에 쌀 두 말 씩을 고아원에 기증했다.

바보 같은(?) 웃음을 띤 얼굴로 달을 쳐다보면서 앉아 있던 배 옹이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사람에게 가장 좋은 친구와 원수가 누구냐?” 하고 묻고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배 옹은 한국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명동 한 복판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28년간 살다가 갔다. 그는 성인이기도 했지만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천주교의 장식품이기도 했었다. 즉 배 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보기로서 보여주는 살아있는 시청각 교재였던 것이다

구 주교와 대화할 때 배 옹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마도 나는 명동 본당 소속이었고 그는 아니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50 여년 전에 내가 신부가 되려는 것을 부모가 신자가 아니라고 허락하지 않았던 패쇄적이고 권위적인 한국 천주교는 여전히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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