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오늘의칼럼
고통을 넘어 기쁨에 이르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9년 06월 30일 (일) 13:26:05
최종편집 : 2019년 06월 30일 (일) 13:26:32 [조회수 : 283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고통을 넘어 기쁨에 이르다
-샤갈의 ‘이삭의 희생’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벨라루스의 빕테스크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계였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미술 수업을 받다가 젊은 시절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몇 해 전 플로방스 지역을 여행하다가 니스에 들른 것은 순전히 ‘국립 마르크 샤갈 성서 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성서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림 앞에 서는 순간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도판으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면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샤갈의 성서화가 제게 준 놀라움은 색채의 아름다움과 그림의 크기, 그리고 상상 속에서 재현해 놓은 성서 이야기의 풍성함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동안이라도 그 그림 앞에 서성이며 화가와 말을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며 노년기를 보냈던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는 샤갈의 섬세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듯 고즈넉했습니다. 마을 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은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했습니다.

초창기부터 그의 그림은 색채가 화려하고 몽환적입니다. 그의 화집을 뒤적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화의 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자연과 인간, 꿈과 현실, 기쁨과 슬픔, 폭력과 성스러움이 서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의 삶이 평안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고국에서 러시아 혁명 시기를 보내야 했고, 프랑스에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격동기의 유럽에서 유대인이라는 출신 배경은 그를 늘 경계선 위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다양한 삶의 배경이 그의 색채와 형태 속에 녹아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삭의 희생’(230×235cm)은 그가 거의 80세 가까이 된 1966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겪었을 나이이고, 젊은 날의 열정도 다 사그러들 법도 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 세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아브라함과 장작단 위에 눕혀진 이삭이 등장합니다. 오른손에 커다란 칼을 든 아브라함은 왼팔로 이삭의 다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얼굴 가득 고통과 비애가 넘칩니다. 백 세에 얻은 아들을 희생해야 하는 그의 심정이 그 표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젖버듬하게 기울어진 이삭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꿈이라도 꾸는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다른 화가들은 대개 이삭을 소년으로 그립니다만 샤갈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 전에 우선 그림의 구성을 조금 더 눈여겨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림의 좌측 상단에는 두 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높은 곳에 배치된 흰옷을 입은 한 천사는 어딘가를 가리켜 보이고 있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나타내는 푸른빛 속에 등장한 천사는 다급하게 아브라함의 행동을 만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을 감겨 있습니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의 표정은 고통과 비애만이 아니라, 당혹감과 안도감이 혼재된 것 같기도 합니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이 보입니다. 지친 듯 큰 십자가를 진 채 비틀거리는 예수님 옆으로 머리를 조아린 채 슬픔을 표현하는 여인들, 율법책을 옆구리에 낀 정통파 유대인,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두 팔을 들어 올린 여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라”(눅23:28) 하신 말씀을 재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샤갈은 한 화면 속에 성경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이야기 전체를 화면에 담곤 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사건과 연관되는 인물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탄생과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의 기쁨까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 중앙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뒤에 숫양 한 마리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주는 충격은 그 나무 뒤에 등장하는 한 여인입니다. 물론 여인은 사라입니다. 가슴 위로 들어 올려진 사라의 두 손은 극도의 슬픔과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창세기 22장을 읽으며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헌신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사라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사라는 지워진 존재였습니다. 산고 끝에 낳은 아들, 애지중지 길렀던 아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서 누구도 사라의 의사를 묻지 않았습니다. 샤갈은 사라를 과감하게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을 헤아려보자는 것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사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후손들 때문에 무덤 속에서도 통곡했던 라헬일 수도 있고, 전쟁과 고문으로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일 수도 있고, 세월호 희생자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 슬픔과 비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삭의 표정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기를 맡긴 존재의 평안함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흰옷 입은 천사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가 많습니다.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야말로 세상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전쟁과 살상의 시기를 살았던 마르크 샤갈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품고 살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고는 세상이 새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도처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의 서곡이었던 ‘수정의 밤’(Kristallnacht, 1938년 11월 9일 저녁에 벌어진 사건으로 많은 유대인들의 상점이 독일인들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사건을 겪은 후 그린 ‘흰색 그리스도’에도 가혹한 폭력의 현장 한복판에 십자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색채에 대해 조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그림에는 흰색, 푸른색, 빨간색, 노란색, 갈색이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흰색은 첫 번째 천사가 머물고 있는 신적 영광의 세계입니다. 푸른색은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다급하게 메시지를 전하러 온 두 번째 천사가 푸른색으로 표현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빨간색은 신앙의 역설 앞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갈색은 인간의 죄로 얼룩진 세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세상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희망을 창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삭의 얼굴과 상반신에 드리운 노란빛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양된 영혼, 신적 기쁨 속에 들어간 영혼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브라함의 뒷편을 보십시오. 붉은빛이 잦아들며 노란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기쁨에 이르게 됨을 샤걀은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김기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51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김경환 (222.100.38.174)
2019-06-30 21:58:35
‘수정의 밤’ 운운하려거든 세월호 희생자 운운하기보다는 천암함 폭침 희생자 운운하라!
내부 총질에는 귀신이고, 외부 총질에는 등신이다!

이스라엘이 얼토당토않은 古土회복이란 명분으로 팔레스타인인을 몰아내고 建國한 후 4차례나 전쟁을 치르고 생존한 방법☞ 국민 한명이 살해되면 10배로 보복하는 묵시적인 정책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도덕이 개입하지 않는다. 공동체보존을 위해서는 <도덕>보다는 <보복>을 상위 가치에 둔다.

독일 제3제국이 러시아, 영국, 드골의 자유프랑스, 장개석의 자유중국, 미국, 반대세력의 레지스탕스 등으로부터 6년 동안이나 거의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聯合國民보다는 독일국민이 희생을 적게 치른 방법☞ 독일국민 한명이 희생되면 10배의 보복을 가한다. 가령 친위대 2인자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암살되자 한 마을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리는 보복을 가하였다. 이래서 抗獨빨치산이 소수에 그치게 되어 독일국민의 피를 절약하게 되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 인디언이 백인 하나를 죽였다가는 10배 이상의 보복을 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인디언을 학살한 결과 그 땅의 원주민을 몰아내고 메이플라워號를 타고 신대륙에 간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평정하여 훗날 영국과의 피 흘리는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하여 200년 후에는 팍스아메리카나를 이룩하였다.

舊約☞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경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처럼 ‘이른바 인간에 대한 학살’도 이루어지고 있다. 유대민족이 타 민족의 학살을 일삼은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 세월호에 대한 보복에 너무 치우쳐있다. 세월호가 점점 불어나 그래서 박근혜 일당이 탄핵되었다. 이건 기껏해야 內部에서의 권력투쟁에 불과하다. 북한에 끌려간 국군포로에 대해선 냉담하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의 친형은 엔테베작전을 벌이다가 사망하였다. 자국민이 포로로 잡혀가자 목숨을 걸고 합법, 불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나라를 마구 휘어 저으며 구출작전을 벌였다. 한국은 천안함이 폭침을 당하여도, 아웅산묘소테러로 아까운 인재가 죽어도 보복할 줄 모른다. 하는 것이라고는 내부 총질이다. 내부 총질에는 귀신이고, 외부 총질에는 등신이다.

독일 외교관 하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유태인에게 살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2차세계대전으로 유태인 학살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제1차세계대전 패배의 원흉으로 낙인찍힌 독일민족의 원수인 유태인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국민이 자발적으로 유태인상점의 유리창을 박살낸 게 Kristallnacht(수정의 밤)이다. 국군포로, 천암함폭침, 아웅산묘소테러에 대한 보복은 꿈도 꾸지 못하고 겨우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보복인가? 이 얼마나 쪼잔한 인간들인가! 쪼잔의 할애비보다 더 할애비다!
리플달기
0 1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