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은 1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그 와중에 2월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제국이 무너졌다.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자치기구를 만들었다. ‘노동자-농민 소비에트’(Soviet)라는 평의회다. 소비에트의 군대의 이름은 ‘노동자-농민 붉은 군대’였고 줄여서 ‘붉은 군대’(적군, 赤軍)라고 불렀다.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가 정권을 잡자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는 ‘지역 소비에트’로 개편됐다. 지역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정권의 하부조직이었던 셈이다. 1917년 혁명 이후 피바람 부는 내전이 벌어졌다. 백군(반혁명군)과 적군(혁명군)만 싸운 것이 아니다. 온갖 외국 군대가 들어와 적군과 싸웠다. 볼셰비키 정권은 흔들렸다.

레닌은 혁명보다 현실을 택했다. 적 동맹군에게 휴전을 제의하고, 조약을 맺고, 적이 점령한 땅을 포기했다. 이것은 러시아인에게 굴욕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이 반종교적인데다, 계급을 없앤다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재산을 몰수하자 저항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 정권은 즉시 진압했다. 무장한 체코군대가 떼를 지어 시베리아를 관통하며 러시아를 헤집었다. 체코군이 열차로 이동한 지역은 통제 불가능이었다. 볼셰비키 권력은 그렇게 약했다.

1918년 11월 시베리아 옴스크(Omsk)에 반혁명군(백군) 정부가 섰다. 정부의 수반은 1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해군제독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 1874-1920)였다. 콜차크는 외국군의 원조를 받으며 백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했다. 콜차크는 군인이었지 정치인이 아니었다. 레닌처럼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러시아 농민은 황제 밑에서 노예로 살아온 농노(農奴)였다. 그런데 콜차크가 점령지를 귀족에게 돌려주었으니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혁명군이 치열하게 싸워대자 백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백군은 옴스크에서 동쪽 이르쿠츠크로 후퇴했다. 이르쿠츠크에는 체코군단이 와 있었다. 체코 군단과 적군은 협상을 벌였다. 체코군은 귀국 안전을 보장받고 콜차크를 체포해서 적군에게 넘겼다. 1920년 2월 콜차크는 앙가라(Angara) 강에서 총살당해 얼음 밑에 수장됐다.

콜차크의 백군 말고 다른 반혁명군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지 못했다. 외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던 백군은 외국 군대가 떠나자 약해졌다. 백군이 패퇴한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백군은 러시아 내 소수민족과 연대하지 못했다. 반혁명군의 지도자들은 민족주의자였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는 자치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탄압했다.

레닌은 달랐다. 그는 소수민족의 자치와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항일 독립군들이 레닌에게 붙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레닌의 계획은 성공했고 볼셰비키는 살아났다. 마침내 백군을 물리치고 러시아 영토를 장악했다.

칼란다리쉬빌리(Nestor Alexandrevitch Kalandarishvili, 1876-1922)는 스탈린처럼 그루지아(조지아)에서 태어났고 트빌리시 신학교를 다녔다. 1907년 농민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1917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았다. 풀려난 그는 이르쿠츠크에서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부대를 조직하고, 적군과 함께 파르티잔(빨치산) 활동을 했다. 백군 지휘관 콜차크가 그에게 큰 현상금을 걸 정도로 그는 전투를 잘 했다. 1919년 옴스크에서 퇴각한 콜차크가 이르쿠츠크로 왔다. 칼란다리쉬빌리의 군대는 이르쿠츠크 외곽에서 백군을 격파했다.

1920년 1월 이르쿠츠크에도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1921년 이르쿠츠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오하묵이 찾아왔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허락해 달라고 했다. 동양비서부는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사령관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 오하묵으로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됐다. 반면 박일리아는 자유시 근처에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에 한인 무장군대의 통수권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일리아는 독자적인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6일 사령관 갈란다리쉬빌리와 오하묵이 기병 600여 명과 한인부대원 600명을 인솔하고 자유시에 도착했다. 자유시에는 사할린 의용대로 합류한 항일 무장독립군이 1400명 가량 있었다. 갈란다리쉬빌리는 자신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사령관임을 알리고,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홍범도와 그의 군대는 따랐지만 박일리아는 거부했다.

6월 28일 자유시 수비대가 접근해서 명령에 복종할 것을 마지막으로 종용했으나 사할린 의용대는 불응했다. 밤 11시, 갈란다리쉬빌리의 군대는 기관총과 장갑차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의 기록에 따르면,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70명이다.

이 사건 후, 러시아(소련) 안에서 한인들이 독자적으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끝이 났다. 코민테른은 남은 항일 무장독립군을 고려혁명군정의회 산하 ‘고려혁명군’으로 통합하여 적군에 예속시켰다. 고려혁명군의 지휘관은 오하묵이었다.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에 사관학교를 열었다. 교장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었다. 사지를 넘나들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군이, 붉은 군대에 들어가 ‘이데올로기 싸움을 준비하는’ 훈련병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