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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사랑, 사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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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6월 16일 (일) 12:44:34 [조회수 :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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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사랑, 사귐
고후13:11-13
(2019/06/16, 성령 강림절 제2주, 삼위일체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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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위격은 셋이고 본질은 하나라는 말을 쉽게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사에서도 삼위일체론은 뜨거운 논쟁거리였습니다. 논쟁의 역사가 길다고 하여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배 때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 바치는 송영을 부릅니다. 축도 역시 삼위일체론적 구조 속에서 시행됩니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를 삼신론(tritheism)이라 하여 배척합니다. 유일신을 섬기는 이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과 본체가 같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란 신성이 드러나는 세 가지 양태라고 설명합니다. 이른바 양태론(modalism)입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물과 수증기와 얼음은 모양이 다르지만 H₂O라는 분자 구조는 같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남편’이지만 아버지의 ‘아들’이고,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본질은 하나이지만 나타나는 양상 혹은 관계를 맺는 양상이 다를 뿐입니다. 어렵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인간이지만 특정한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른 바 ‘양자설’입니다.

이런 논쟁의 역사를 다 살펴보아도 삼위일체에 대해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론이 다양하다는 것은 누구도 그 신비를 다 풀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메시지’ 성경으로 잘 알려진 유진 피터슨 목사는 삼위일체를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나가 셋과 같다거나 셋이 하나와 같다는 식의 숫자 놀음으로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삼위일체는 산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께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방식이다”(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양혜원·박세혁 옮김, IVP, 2010, p.302)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 당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며,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15세기의 러시아 이콘화가인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성화 ‘삼위일체’를 가까이 두고 늘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삼각형을 이루고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안드레이 류블로프의 일생을 영화로 제작했던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이 이콘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증오와 폭력이 더 이상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는 장소에 대한 상징”. 십자군 전쟁과 그 이후에 벌어진 민족들의 갈등으로 당시의 유럽은 갈가리 찢겨 있었습니다. 그 음습하고 우울한 시대를 살았던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깊은 일치와 사귐 속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갈등과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일치가 소망의 빛으로 다가오시기를 빕니다.

∙우리 삶의 지향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제 본문의 순서에 따라 가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에 응답하면 좋겠습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와 짝을 이루지만 사실 이 두 서신 사이에 또 다른 서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울은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편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변심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예정했던 선교지 방문조차 미룬 채 고린도교회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던 디도가 반가운 소식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오해가 다 풀렸고, 이전보다 더 큰 사랑과 그리움으로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낸 격렬했던 그 편지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써 보낸 편지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전반적으로 따뜻합니다.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와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편지의 말미인 10장과 11장에서 잠깐 다룰 뿐입니다. 바울은 복음적 격려와 훈계를 마치면서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고후13:5)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라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긴 서신의 에필로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라’, ‘서로 격려하라’, ‘같은 마음을 품으라’, ‘화평하게 지내라’. 앞의 두 가지는 개인 윤리에 해당되고, 뒤의 세 가지는 공동체 윤리에 해당됩니다.

‘기뻐하라‘(하이로, chairo)는 말은 사람들이 만날 때 혹은 헤어질 때 하는 인사말입니다. 우리도 가까운 사이인 경우 ‘잘 지냈어?‘ 혹은 ‘잘 지내’ 하고 인사를 나눕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당신의 삶에 기뻐할 일이 많이 벌어지기를 바란다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입니다. 즐거움이 외적인 조건과 관련된다면 기쁨은 내적인 건강과 관련됩니다. 기쁨은 우리 생이 의미로 충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근원적인 기쁨은 우리 존재의 바탕이신 하나님과 깊이 접속될 때 찾아오는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것은 늘 하나님과 깊은 일치 속에서 살아가라는 격려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세상의 죄와 유혹에 대해 면역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온전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온전함과 완전함에 대해서는 구별하여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흠이 없다는 뜻이지만, 온전하다는 것은 상처와 아픔과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지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과 관련됩니다.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향이 분명해야 하고, 그 지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지향점입니다.

∙교회로 지어져 간다는 것
이제 공동체를 위한 권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서로 격려하라‘, ‘같은 마음을 품으라’, ‘화평하게 지내라’.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 지체들이 서로 사랑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격려하다‘라는 단어는 ‘권고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북돋다’는 뜻도 있습니다. ‘북돋다’는 ‘북‘과 ‘돋우다’라는 말이 결합하며 축약된 형태입니다. ‘북’은 초목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이고, ‘돋우다’는 위로 끌어 올리거나 높아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비가 내린 후에 농부들은 밭고랑을 돌다가 작물의 뿌리가 드러난 것이 보이면, 호미로 흙을 끌어올려 뿌리를 덮어줍니다. 바로 그것이 북돋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북돋움은 그렇기에 사랑이고 돌봄이고 배려입니다. 성도들은 누군가의 허물을 찾아내 지적질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용히 덮어주고 북돋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낙심한 이들에게 다가가 설 땅이 되어주는 것, 그들이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그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격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차이를 배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꽃밭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한 꽃들이 어울려 피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을 꾸짖고 그들을 동화시키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타인들에게 해가 될 만큼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꾸짖어 바로잡아주어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좀 다른 이들까지 기어이 교정해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불화를 조장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말을 ‘和而不同’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화’ 곧 ‘조화’의 중심은 물론 그리스도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교회는 든든해집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레누오eireneuo‘는 평화 만들기, 평화 유지하기, 조화를 이루기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이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롬8:6)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들이 먼저 평화를 만들고 누리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냉소주의와 무정부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된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직면하고 극복함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 그리고 인내입니다.

∙축복
그렇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신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축복기도의 모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짤막하지만 매우 아름답고 함축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앞에 배치한 구조가 다소 의외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과 십자가 사건에서 계시된 그 은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도 성령의 역사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깊이 드러난 것은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화목제물로 삼으신 그 놀라운 행위입니다. 그 아가페적 행위야말로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시켜줍니다. 그것을 일러 ‘사귐’ 혹은 ‘교통하심’이라 말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시는 분(고전2:10)이십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는 성령 안에서 산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바람과 돛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배를 앞으로 몰아가기 위해 돛을 펼쳤다 해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인 바람이 불더라도 돛이 펴져 있지 않다면 그때도 배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우리의 치열한 노력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합쳐질 때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삼위일체에 기반한 축복기도로 마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신학자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은 축복기도를 가리켜 "예배 안에서 일어난 일과 예배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결짓는 다리"라고 말합니다. 축복기도는 예배를 마친다는 신호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새로운 예배가 시작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에도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 안에서 기뻐하며 사는 동시에,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평화와 생명의 공간을 열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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