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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요구하는 종교직업 종교의 불치병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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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6월 09일 (일) 14:24:09
최종편집 : 2019년 06월 16일 (일) 13:28:28 [조회수 : 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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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국가 반역죄'로 몰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외견상 로마 총독 빌라도가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사형을 요구한 세력은 당시 유대의 지배층인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정치인 빌라도는 가급적 예수를 풀어주려고 시도했으나 종교인 가야바와 그 추종자들은 끝까지 극형을 고집했다.

   
 

"가야바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런 면에서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한 이 부분은 그다지 바른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수정해야 더 정확한 사실이다. 성경은 가야바가 십자가 처형의 주범임을 증거한다(요11:53).

그러면 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토록 증오했을까. 그건 단순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한 '신성 모독죄'가 원인이 아니다. 진짜 내심은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에게 쏠려 자신들의 기득권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다.    

유대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박해를 받지 않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대접을 받았으나 참된 선지자들은 늘 고난을 받았다. 종교가 부패하면 자기 밥통을 건드리는 경우 설사 신의 아들이라도 용서하지 않는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했다. 오죽하면 순교자 스데반이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행7:52)"고 통렬하게 비판했을까.

예수는 성전의 장사꾼들을 쫓아내셨다. 예수는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헌금을 걷지 않았다. 예수는 설교의 댓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예수는 병 고쳐주고 돈을 내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안수 기도나 축도하고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 종교 장사꾼들에게 이게 얼마나 괘씸한 죄인가. 이건 보통 영업 방해가 아니었다.  

 

직업 종교의 불치병

요즘 변질된 어떤 교회들을 보자. 예배마다 돈을 걷는데 아주 열심이다. 교회 문만 들어서면 돈을 요구한다. 헌금 봉투만도 수십 종이다. 구제나 선교를 명분으로 집요하게 돈을 걷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돈은 건물을 증축하거나 교역자 인건비로 풍성히 쓰고 자체 소비한다. 구제는 쥐꼬리만큼 하고 생색만 낸다.

그래도 남는 돈이 있으면 재단을 설립하여 목사의 친인척이 알뜰하게 사유화한다. 거액의 교회 돈을 투입하여 설립한 학교, 유치원, 병원, 언론사, 종교 법인 등 나중에 보면 대다수가 사실상 목사 가족들이 주인이다,  

더구나 십일조 안 내면 쭉정이 신자로 취급한다. 일부 목사는 주일 설교 몇 번하고 매주 수백만 원을 챙겨 간다. 안수해주고 돈 받고, 축도하고 돈 받는다.

역사적으로 박해 시대를 제외한다면 종교가 부패하지 않은 시대는 거의 없었다. 본래 종교의 속성이 부패라서 그런 건 아니다. 종교가 직업화하면 반드시 부패한다. 그래서 타락한 종교의 불치병은 돈이다. 육신의 암은 고쳐도 이건 정말 못 고친다. 돈과 권력은 그들의 업보다.

나는 아직도 진실한 사역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교단에서 상대적으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부패한 종교인에게 돈이란 들쥐가 방앗간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현대 교회의 가야바들

사실 예수의 진짜 죄목은 '종교 영업 방해죄'였다. 일개 시골 목수가 감히 거룩하신 제사장님들의 장사판을 망치려 한 것이다. 종교가 정치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인다.

예수는 기득권 직업 종교의 큰 걸림돌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누구에게도 돈을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항상 거저 고쳐주고, 거저 사역하고, 거저 나누어 주셨다. 예수는 끝까지 제도권 대제사장 가야바의 편에 서지 않고 결국 골고다를 택하셨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긴옷 입은 가야바들이 아주 많다. 그들은 항상 돈을 요구한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하지 않는다. 돈이 필요한 건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본래 신약 교회는 돈이나 제물을 바치는 구약 성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서로 돈을 나누어 주던 신앙 공동체였다. 사도들이 가르친 '연보'는 하나님께 바치는 돈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던 돈이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가 평생 목회만 했는데 어느덧 개부자가 되어있다면 그는 분명히 가야바다.

무슨 핑계를 대든 신의 이름으로 돈을 요구하는 종교는 모두 거짓 종교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그런 잡교는 이 땅에서 영구히 퇴출시켜야 마땅할 것이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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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 (1.254.130.226)
2019-06-12 10:08:30
결국 문제는 성도들의 생명이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시장에서나 잔치 집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또 당시의 대부분 유대인들은 그들을 향하여 칭찬했다고 말한다.(눅6:26)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바리새인들이 성도들 앞에서 존경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바리새인의 정체에 대하여 모르는 성도들이 없다. 그만큼 많은 목사들이 바리새인들의 욕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성도들이 모르는 것은 자기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겉옷을 입고 접근함을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바리새인들도 예전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듯이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려 한다. 그렇게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엄청나게 많다.
옛날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거룩한 목사로 포장한 현대판 바리새인 목사들이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는 방법은 비슷하다. 그들은 성도들의 거룩한 열정을 자극한다.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명목으로 자기의 전부를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따른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대로 헌신한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을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심을 축복한다. 이 축복에 넘어간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교회 건축에 투자하는 것이다.
교회를 멋지게 지은 목사들은 은퇴할 때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때에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운다. 따라서 교회에서 그에 상당한 대가를 제공해주기 원한다. 작게는 수억을 받는 이도 있고, 많게는 수백억과 여러 재단들을 덤으로 가져가는 목사들도 있다. 만약에 교회 건축을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그들이 가난한 성도들이 집을 팔고 전세자금을 빼서 헌금한 돈을 받고서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자신도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외식된 바리새인들처럼 성도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은혜를 기다리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은 사람으로부터 물질을 받아간다. 옛날 바리새인들이나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나 가난한 성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거룩한 열정과 하나님의 축복을 불어넣는 방법이었고, 그 방법은 옛날이나 오늘에나 유효한 작전임에는 틀림없다. 목사들이 성경의 능력을 복원한 것 중에 유일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탐욕을 제대로 복원한 것이고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목사들만 바라보았던 성도들의 미래가 문제이다. 말씀 묵상에 대한 책임을 모두 목사에게 위임하고 그들 스스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도 없는 어리석은 양이 되어 목사가 끌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 앞날이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예전 바리새인들이 성도들 앞에 거룩한 목자로 나아간 것은 양들의 털과 고기를 위함이었듯 오늘날 바리새인들과 같은 목사들이 성도들 앞에 나아가 그들에게 달콤한 말씀을 전하는 것 역시 성도들의 돈을 위함이 분명하다. 이런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바리새인이 자기들 생명과 재산을 노리고 있음에도 아직도 모든 말씀을 목사들에게만 위임하려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면 이제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한 걸음 띄어야 함이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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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김경환 (222.100.38.174)
2019-06-12 22:38:24
참으로 예리한 지적입니다! <역설적으로 글을 한번 써봤습니다.>

舊바리새인과 現바리새인은 다를 바 없다는 분석에 동조하는 바입니다. 이 예리한 분석에 하나 더 첨가하자면 ‘舊바리새인의 똘마니’보다 ‘現바리새인의 똘마니’가 더 未開하다고 봅니다.

舊바리새인이 설칠 때는 인터넷도 없고,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도 힘들고, 문맹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舊바리새인의 일방적 강변에 ‘舊바리새인의 똘마니’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정보 저런 정보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개방된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現바리새인의 똘마니’가 現바리새인의 일방적 강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름대로 그 이유를 분석해보니...

1. 옛날에 비해 지금은 知識은 좀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습득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知慧는 옛날사람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컴컴해서 未開했다면, 지금은 밝은 데도 未開합니다. 스스로 미개를 자처하고, 스스로 봉사가 되고자하면 치료약도 없습니다.

2. 설마하니 하나님, 예수님 가지고 사기 치겠느냐? 하는 설마가 사람을 잡았습니다.

3. 심부름꾼(목사)을 시켜서 하나님을 찾아오라고 돈 주고 부려먹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자니 시간도 부족하고 그 무신 깨알 같은 글을 읽기도 귀찮고 먹고 살기 바쁜데... “돈을 조금 집어주면 천국행 버스타고, 많은 돈을 집어주면 천국행 자가용을 타는 데 뭣 하러 미련하게 어렵게 예수 공부하느냐?” 이겁니다. 이른바 천국행 버스기사나 천국행 자가용기사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천국행 운전기사에게 월급을 주고 부려먹을 자유도 있다 이겁니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다른 사람이 뭔 시비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요.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 것도 자유이니까요.

4. ‘現바리새인의 똘마니’의 정신구조는 스톡홀름효과에 따라 가해범죄자를 동경하게 되는 피해자의 정신구조와도 유사합니다. 천국행 버스(자가용)기사가 월급이 적다고 억지를 부리고 운전기사의 권한을 남용해 삥땅을 좀 쳐도 “나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라고 자위하면서 스톡홀름효과가 나타나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하면서 기사와 고객이 함께 천국으로 가는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운전기사 해고하고 스스로 운전하지 않는 한 질이 떨어지는 운전기사가 삥땅치는 부작용쯤은 감수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운전할 줄 모르면서도 걸어 다니기는 싫고, 운전을 배우기도 싫은 데 말입니다. 운전기사 눈치도 좀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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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윤법규 (122.101.20.102)
2019-06-12 12:58:04
그동안 네덜이 누려왔던 모든 입지와 네덜의 자리를 별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
빼았길것이 두려워 이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한 누구인지 관심도 안갖고 그냥
무대뽀로 십자가에 메달리게 해서 못을 치게 했단 말이더냐 이 못난 가야바넘들아....
네넘들이 저지른 罪 네넘들이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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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
김상구 (1.254.130.226)
2019-06-12 10:08:30
결국 문제는 성도들의 생명이다.
옛날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시장에서나 잔치 집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었다. 또 당시의 대부분 유대인들은 그들을 향하여 칭찬했다고 말한다.(눅6:26)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바리새인들이 성도들 앞에서 존경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바리새인의 정체에 대하여 모르는 성도들이 없다. 그만큼 많은 목사들이 바리새인들의 욕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성도들이 모르는 것은 자기를 지도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겉옷을 입고 접근함을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바리새인들도 예전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듯이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려 한다. 그렇게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면서도 존경받는 목회자들은 엄청나게 많다.
옛날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 거룩한 목사로 포장한 현대판 바리새인 목사들이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는 방법은 비슷하다. 그들은 성도들의 거룩한 열정을 자극한다.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명목으로 자기의 전부를 헌신할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따른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대로 헌신한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을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심을 축복한다. 이 축복에 넘어간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교회 건축에 투자하는 것이다.
교회를 멋지게 지은 목사들은 은퇴할 때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때에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운다. 따라서 교회에서 그에 상당한 대가를 제공해주기 원한다. 작게는 수억을 받는 이도 있고, 많게는 수백억과 여러 재단들을 덤으로 가져가는 목사들도 있다. 만약에 교회 건축을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그들이 가난한 성도들이 집을 팔고 전세자금을 빼서 헌금한 돈을 받고서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한 자신도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외식된 바리새인들처럼 성도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은혜를 기다리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은 사람으로부터 물질을 받아간다. 옛날 바리새인들이나 현대판 바리새인들이나 가난한 성도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은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거룩한 열정과 하나님의 축복을 불어넣는 방법이었고, 그 방법은 옛날이나 오늘에나 유효한 작전임에는 틀림없다. 목사들이 성경의 능력을 복원한 것 중에 유일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탐욕을 제대로 복원한 것이고 이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목사들만 바라보았던 성도들의 미래가 문제이다. 말씀 묵상에 대한 책임을 모두 목사에게 위임하고 그들 스스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도 없는 어리석은 양이 되어 목사가 끌면 끄는 대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 앞날이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예전 바리새인들이 성도들 앞에 거룩한 목자로 나아간 것은 양들의 털과 고기를 위함이었듯 오늘날 바리새인들과 같은 목사들이 성도들 앞에 나아가 그들에게 달콤한 말씀을 전하는 것 역시 성도들의 돈을 위함이 분명하다. 이런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바리새인이 자기들 생명과 재산을 노리고 있음에도 아직도 모든 말씀을 목사들에게만 위임하려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영생이 있음을 믿는다면 이제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한 걸음 띄어야 함이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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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6-12 22:38:24
참으로 예리한 지적입니다! <역설적으로 글을 한번 써봤습니다.>

舊바리새인과 現바리새인은 다를 바 없다는 분석에 동조하는 바입니다. 이 예리한 분석에 하나 더 첨가하자면 ‘舊바리새인의 똘마니’보다 ‘現바리새인의 똘마니’가 더 未開하다고 봅니다.

舊바리새인이 설칠 때는 인터넷도 없고,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도 힘들고, 문맹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舊바리새인의 일방적 강변에 ‘舊바리새인의 똘마니’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였습니다. 지금은 이런 정보 저런 정보 쉽게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개방된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現바리새인의 똘마니’가 現바리새인의 일방적 강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름대로 그 이유를 분석해보니...

1. 옛날에 비해 지금은 知識은 좀 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습득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知慧는 옛날사람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컴컴해서 未開했다면, 지금은 밝은 데도 未開합니다. 스스로 미개를 자처하고, 스스로 봉사가 되고자하면 치료약도 없습니다.

2. 설마하니 하나님, 예수님 가지고 사기 치겠느냐? 하는 설마가 사람을 잡았습니다.

3. 심부름꾼(목사)을 시켜서 하나님을 찾아오라고 돈 주고 부려먹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자니 시간도 부족하고 그 무신 깨알 같은 글을 읽기도 귀찮고 먹고 살기 바쁜데... “돈을 조금 집어주면 천국행 버스타고, 많은 돈을 집어주면 천국행 자가용을 타는 데 뭣 하러 미련하게 어렵게 예수 공부하느냐?” 이겁니다. 이른바 천국행 버스기사나 천국행 자가용기사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천국행 운전기사에게 월급을 주고 부려먹을 자유도 있다 이겁니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다른 사람이 뭔 시비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요.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 것도 자유이니까요.

4. ‘現바리새인의 똘마니’의 정신구조는 스톡홀름효과에 따라 가해범죄자를 동경하게 되는 피해자의 정신구조와도 유사합니다. 천국행 버스(자가용)기사가 월급이 적다고 억지를 부리고 운전기사의 권한을 남용해 삥땅을 좀 쳐도 “나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라고 자위하면서 스톡홀름효과가 나타나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하면서 기사와 고객이 함께 천국으로 가는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운전기사 해고하고 스스로 운전하지 않는 한 질이 떨어지는 운전기사가 삥땅치는 부작용쯤은 감수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본인이 운전할 줄 모르면서도 걸어 다니기는 싫고, 운전을 배우기도 싫은 데 말입니다. 운전기사 눈치도 좀 보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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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110.70.58.110)
2019-06-09 23:26:54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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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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