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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이전 독립군 (7)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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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6월 05일 (수) 22:49:10
최종편집 : 2019년 06월 07일 (금) 13:49:20 [조회수 : 3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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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이야기가 있다. ‘체코군단’ 이야기다.

1차 세계대전의 진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다른 진영은 영국과 프랑스와 러시아였다.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 체코에서 징집된 군인들은 러시아 전선에서 싸우다 말고 투항했다. 그리고 러시아 부대에 들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과 맞서 싸우길 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체코 독립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 사령부는 체코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편성한 다음 최전선으로 보냈다. 이들이 소위 ‘체코군단’이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터졌다. 혁명이 성공하자 레닌은 적국과 협정을 맺고 서쪽 영토를 포기했다. 그리고 전쟁에서 빠져 나왔다. 레닌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반혁명군(백군)과 혁명군(적군)이 싸우는 심각한 내전에 빠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피바다였다.

러시아 제국이 사라진데다 볼셰비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싸우기를 그만두었으니, 체코군단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의 명령이 도착했다. “러시아 내전에 휩쓸리지 말고 서부전선으로 가라.” 서부전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서유럽 쪽이다.

명령에 따라 체코군단은 러시아 북쪽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로 이동해서 서부전선으로 가려고 했다. 아르한겔스크는 북해를 거쳐 서유럽으로 갈 수 있는 항구이고, 그곳에는 영국과 프랑스 선박이 있었다. 계획은 좋았으나 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쪽은 막히고 북쪽도 힘들자 동쪽을 택했다. 동쪽 시베리아는 전투가 덜하니, 블라디보스톡 항에서 배를 타면 서유럽으로 갈 수 있으리라. 그것은 동쪽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고국에 다다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체코군단은 열차를 구했다. 모든 것을 열차에 싣고 무장을 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수백 량의 열차에는 병원도 있었고 우체국, 은행, 신문사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2013년 영화 ‘설국열차’ 같았다.

바쁜 갈 길에 백군과 타협하기도 하고, 백군이 맡긴 러시아 제국의 백금 궤짝들을 적군에게 넘겨주기도 하면서 동진했다. 반혁명군을 지원하러 러시아에 들어온 연합군은 체코군단에게 무기와 물품을 지원했다. 일본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일본군대도 체코군단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들어왔다.

1918년 7월 6일 체코군단은 연해주에 도착해 혁명군을 물리치고 블라디보스톡 항을 점령했다. 그 해 11월 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이들은 1920년까지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며 선박을 구하는 대로 차례차례 떠났다.

체코군단이 연해주에 머문 시기는 항일 독립군 무장에 중요한 시기였다. 항일 독립군은 체코군단의 무기를 사들였고, 그것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했다. 독립군이 사용한 중기관총 맥심(Maxim, PM1910)과 소총 모신나강(Mosin-Nagant)은 체코군단이 소유했던 무기다. 체코 군인들이 고국으로 가져간 물건에 반지와 은비녀가 있는 것이 무기구입의 증거다.

5만 명의 체코군단이 모두 떠나자 9만 명의 다른 연합군들도 소련을 떠났다. 그러나 일본군은 1922년까지 연해주에 주둔했다. 이때, 연해주 한인에 대한 학살이 시작됐다. 1925년 일본과 소련은 러일전쟁 때 중단됐던 국교를 다시 맺었다. 한반도의 러시아 부동산은 반환됐고 소련 영사가 경성에 부임했다. 1925년까지 일본은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간섭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은 5만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독립군은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조직을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단일화했다. 하지만 무장이 빈약했다.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고 했다.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국경 우수리 강을 건너 연해주에 집결했다. 이들은 소련 혁명군(적군) 소속 한인 부대장에게서 군사훈련을 받고 무기도 받았다. 만주에서 온 독립군은 연해주 마을을 돌면서 무기를 수집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일본에게 눈엣가시였다. 백군인 반혁명군이 이들과 싸우고 있으므로 일본군은 처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일 독립군이 활발한 전투를 벌이면서 반혁명군이 몰리자, 일본군은 항일 독립군 제거에 나섰다.

다른 외국 군대는 이미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일본군 사령관은 블라디보스톡 당국에 한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혁명군은 전투를 잘하는 항일 독립군이 매우 필요했다. 항일 독립군의 비무장은 혁명군에게 큰 손실일 것이 뻔했다. 그러나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대로 도장을 찍었다. 일본군이 날짜까지 거론하며 철수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약속을 믿은 혁명군이 경계를 풀자 일본군의 습격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연해주를 장악하고, 억류됐던 반혁명군들을 풀어줬다. 일본군과 반혁명군은 닥치는 대로 혁명군을 죽였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톡 신한촌과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로 쳐들어왔다. 많은 한인들이 살해됐는데 몇 명이 죽었는지 아직도 모른다.

 이 계획을 세운 자는 새 조선 총독 사이토(齋藤實)다. 사이토가 부임하러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강우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규는 러시아에서 구한 수류탄을 던졌고 사이토는 가까스로 살았다. 강우규(姜宇奎, 1855~1920)는 블라디보스톡의 ‘노인단’(老人團) 단원이었다.

연해주의 항일 독립운동은 국지적이고 단순한 의병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적이고 큰 항일 독립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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