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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시편사색」"무궁한 세계를 거닐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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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6월 04일 (화) 01:44:33
최종편집 : 2019년 06월 04일 (화) 01:45:56 [조회수 :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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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한 세계를 거닐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산다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과 안개 속을 뚫고 나가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잠시 밝음의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기도 하지만, 이내 또 다른 어둠이 확고히 우리를 에워싼다. 길이 끊기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난 벼랑 앞에서 현기증을 느낄 때도 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충만과 공허, 의미와 무의미, 빛과 어둠이 수시로 갈마든다. 삶은 이런 두 계곡 사이에 걸린 줄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종교인들은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지만, 비종교인들도 대상을 특정하지는 않는다 해도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게 도움을 구하곤 한다. 불확실성의 운명 속에 내던져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히브리인들은 인생의 여러 순간에 그들을 구원해준 야훼 하나님께 자신들의 마음을 아뢰곤 했다. 시편은 그들이 겪어낸 삶의 다양한 순간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사적으로 구성된 시도 있지만, 대개의 시들은 삶의 과정 가운데서 직면한 다양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크게 분류하자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느낄 때 터져 나오는 감격과 환희의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고 느낄 때 토로하는 안타까움과 탄식이다. 시편의 세계는 그렇기에 세속적인 욕망과 숭고한 생각 사이를 오간다. 시편은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 감정을 성찰하도록 돕는다. 시편 속에는 증류되거나 표백되지 않은 적나라한 인생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시편을 읽게 된다. 사람들은 시편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길을 발견한다.

   
 

『禪의 황금시대』, 『禪의 향연』, 『동서의 피안』 등의 책을 통해 동양인들의 사고와 직관을 탁월하게 소개해준 오경웅 박사가 시편의 세계에 빠져든 것도 어쩌면 시편 속에 담긴 인간 경험의 깊이에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어’의 문장 구조와 상관없이 특정한 글자 수(넷, 다섯, 일곱 글자)를 지키며 ‘도착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압축과 생략이 필수이다. 오경웅은 학문적인 엄격함이나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지향하지 않는다. 가능한 한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옮기려 하지만, 필요할 때는 동양고전이나 다양한 형태의 시가에서 사용된 표현들을 과감하게 차용하여 ‘격의格義’하기를 피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편의 경험을 통해 인간 경험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대선 목사(이하 송대선)는 이 난해하면서도 아름다운 한문 시편을 유려하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해석해냈다.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재창조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문장 부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기도자 혹은 찬양자의 의식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하지 않고 있음으로 낭독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시의 리듬감을 되살려내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글자 수를 맞추려 하지는 않지만 음보에 충실하기에 낭독하는데 거스름이 없다. 어디를 펼쳐 읽어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모든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시편 1편 1절을 예로 들어보자.(빗금은 필자의 첨가)

군자의 즐거움 오래가누나/선을 행하니 온갖 복이 모이고/무도한 이들과 어울리지 않으며/소인배와 함께함을 부끄러이 여기네.(1:1)

‘오래가누나’, ‘여기네’ 등의 예스러운 단어는 서술형 종결어미의 단절적 경직성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깨달음에 대한 감탄을 내포한다. 송대선은 리듬감을 만들기 위해 조사를 생략할 때도 많다. 우리말의 특성상 조사를 생략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다음의 경우를 살펴보자.(괄호 안의 조사와 빗금은 필자의 첨가)

푸른 산(을) 향해 눈을 돌리나니/주님의 도우심(을) 그리워하노라/만물(을) 지으신 야훼(께서는) 위대하셔라/내 영혼(이) 우러러 사모하나이다.(42:1)

조사를 생략하고 읽을 때 한결 간결해진다. 일상 언어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시적 언어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송대선은 한글의 뉘앙스까지도 면밀하게 생각하며 번역 작업에 임하고 있다. 시편 1편 1절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말씀을 즐거워하고, 또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이것을 송대선은 “거룩한 말씀 속에 한가로이 거닐며 온종일 말씀 안에 젖어들기 즐기네.”로 옮기고 있다. ‘한가로이 거니는 것’과 ‘젖어듦’은 의지적인 노력과 비수의적인 경험이라는 신앙생활의 두 축을 아우르는 말들이다. 이처럼 오경웅이 번역한 시편은 송대선의 번역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결 깊은 울림을 획득하고 있다. 몇 구절을 개역개정판과 대조해보자.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39:1-3)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시인의 답답한 심경이 잘 담긴 시이다. 시인은 입을 열어 말해 보아도 오해만 축적되고, 그 오해가 빚은 아픔이 커서 차라리 입을 다물기로 다짐하지만, 상한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조차 막을 수 없어 하나님 앞에 고통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아프게 적고 있다. 오경웅의 시를 재번역하면서 송대선은 이 과정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누구라도 그 절절한 아픔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일찍이 세상살이 어려움 탄식하며 삼가 내 입을 지켜 허물을 적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를 알아주는 이 찾을 수 없으며 입 다물고 사는 게 차라리 나으리라 고요히 입 다물고 살기로 했으니 이런저런 시비 논할 바 없다 여기는데 마음은 굳은 돌이 아닌지라 입 다물수록 번민은 가득하고 괴로움은 커져서 울화로 치미니 마음은 불덩이로 변해버리는구나 세상에 외면당한 이 맘 누를 길 없어 주님 향해 끝내 입을 열어 여쭙니다.(39:1-3) 

앞서도 말했듯이 오경웅의 시편 번역은 원문의 정확한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마치 서기관이 텍스트의 여백에 자기 생각을 기록하는 것처럼 시에 자기 색깔을 입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번역은 반역이라지 않던가?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하다면 ‘입김’이라는 표현을 ‘물거품’으로 바꾸기도 한다.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판단이 서면 슬쩍 자기가 바라고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끼워 넣기도 한다.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72:8)라는 구절을 오경웅은 ‘사해위가 팔굉위려四海爲家 八紘爲閭’(‘임금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한 집안이 되고 세계가 한 마을이 된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옮기고, 송대선은 이것을 다시 기도 투로 바꿔 “온 세상 주 안에서 한 집 되게 하시고 온 천하가 한 마을 되게 하소서”라고 번역한다. 이어지는 구절도 흥미롭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통치의 엄정함을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72:9)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오경웅은 이 통치를 폭력적 정복으로 보기보다는 온 세상을 교화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로 풀어낸다. “멀고 거친 땅에서도 찾아와 좇게 하시고 미련한 적들조차 자기들의 갈 바를 물어 오게 하소서.” 덕으로 통치하는 왕의 이상을 투영한 것이다.

순례자의 노래로 알려진 한 대목을 보자.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122:1) 평범하다. 그러나 역자들은 이 구절을 “친밀한 벗 나에게 ‘성산에 오르자 야훼 전에 함께 들어 주 얼굴 뵙자’ 했네 마음 합한 그 말은 은은한 난향이라”라고 번역한다. ‘난향’라는 낯선 표현이 있어 독자들은 문장 전체를 재음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낯선 표현들을 즐기려면 전고典故를 알아야 한다. 송대선은 이 책을 단순히 한글로 푸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오경웅의 시편 속에 등장하고 있는 ‘고사’의 출처를 면밀히 조사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중국 시문학 세계 전체가 망라되고 있다. 그런 고사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의 복잡함과 다기함에 다가서게 만든다. 언어 세계가 확장되는 순간 경험의 폭도 커진다. 예컨대 믿는 이들을 일러 오경웅은 ‘회주지도’懷主之徒라 번역했다. 낯선 표현이다. 송대선은 이것을 번역본에서는 ‘주님을 사모하는 이들’로 단순하게 옮겼지만 해설을 통해 그 단어 속에 내포된 속뜻을 풀어준다. ‘품다, 사모하다’는 뜻의 ‘회懷’자에는 ‘따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주님을 사모한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책이 경전으로서의 시편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경전 속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라잡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자 글자풀이를 참조하면서 한문시를 읽고, 번역문을 낭송하노라면 어느새 우리도 영원한 세계를 미리 맛본 자인 시인들의 세계를 거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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