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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강제이주 이전 사람들 (5)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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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5월 22일 (수) 23:28:39 [조회수 : 3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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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났다. 한인도 러시아인과 같은 권리와 자유를 누리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같은 해 10월 혁명이 터졌다. 토지 없이 품을 팔던 한인과 토지를 소유한 한인 사이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가난한 다수 한인들은 적군(혁명파) 혹은 파르티잔(빨치산)이 됐고, 부유한 소수 한인들은 백군(반혁명파)에 가담하거나 친일로 기울었다.

혁명 때 치열하게 살았던 한인이 있다. 김애림이다. 보통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Alexandra Stankevich, 1885-1918)로 부른다.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이름이고 스탄케비치는 첫 남편의 성이다.

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표트르는 일찍 러시아에 정착했다.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잘 하는 통역가였고 정교회에 입교한 신자였다. 그가 일찍 세상을 뜨자 친구 스탄케비치가 알렉산드라를 입양했다. 철도기술자였던 스탄케비치는 알렉산드라를 블라디보스톡 사범대학에 보냈다. 학교에서 알렉산드라는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졸업 후 교사가 됐고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다.

이혼한 알렉산드라는 우랄(Ural)산맥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통역을 맡았다. 여기서 볼세비키 당원이 됐다. 러시아어 중국어 한국어에 능통하고, 고등교육을 받았고, 아름답고 열정적이고, 사상마저 뚜렷한 이 여자는 공산당 조직 임무를 받고 연해주로 갔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고 알렉산드라는 공산당 지도자가 됐다. 직책은 하바롭스크에서 연해주의 외교를 담당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연해주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피비린내 나게 싸웠던 백군(반혁명군)과 적군(혁명군)은 서로에 대한 용서가 없었다. 1918년 백군이 하바롭스크를 포위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시도했다. 알렉산드라는 붙잡혀 지도부와 함께 처형됐다. 나이 서른셋이었다.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 1873-1935)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도 없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선출된 사람이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구한말 군관학교를 나오고 강화도 진위대 참령(지휘관)이 되었다. 진위대는 구한말 군사편제다. 중앙에 설치된 군대가 친위대와 시위대, 지방에 설치된 군대가 진위대였다.

1907년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이동휘는 저항하고 항일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러 곳에 학교도 세웠다. 구한말 군인에서 교육자로, 사회 활동가로, 임정 정치인으로, 장로교 전도사로, 사회주의자로, 삶의 자리는 바뀌었어도 일편단심은 조국 해방이었다.

1999년 독일에서 목회하는 송병구, 조장환 목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왔다. 우리는 함께 고려인 첫 이주지 우슈토베를 찾아 카작스탄으로 날아갔다. 알마타에서 우슈토베로 가는 길에 이동휘의 외손녀 루드밀라를 만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 더듬거리며 한국말을 하는 루드밀라는 작은 체구에 당당했다. 한국 여인의 기품이 느껴졌다. 루드밀라는 할아버지에 대한 글이 나왔다며 내게 책 한 권을 주었다.

나는 이동휘가 누구인지 몰랐다. 반병률 교수는 이동휘에 대한 글을 준비하고 있다가 루드밀라를 만났다. 루드밀라는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자료를 주었고 “성재 이동휘 일대기”라는 책이 되어 나왔다. 이 책으로 공산주의자라고 외면 받던 이동휘는 재평가됐다.

우슈토베에서 돌아오는 길. 차에서 내려 휴식하는데, 루드밀라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중앙아시아로 와서 나를 낳았다. 최근엔 한국말을 배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도 한다. 나는 한국인임을 잊고 산 적이 없다. 그러나 한국 풍습과 예절일랑 남아 있는 게 없다. 오직 하나, 한식과 추석 그리고 특별한 날 묘지에 가서 부모님께 절하는 것은 안다. 그런데 이곳에 온 한국 목사마다 절하지 말라고 한다. 유일하게 남은 한국인의 예절이 그것인데, 어찌 해야 하나.”

나는 힘줘 말했다. 할지 말지 선택할 필요 없다. 부모 묘소를 찾아 인사  드리는 것을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이다. 루드밀라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맙다고 했다. 동행한 다른 고려인도 손을 붙들고 허리를 굽혔다.

1908년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은 일본의 식민정책을 옹호하는 스티븐스(Durham Stevens, 1851-1908)을 저격했다. 장인환은 상항감리교회 교인이었다. 한인들이 뭉쳐 두 사람의 재판을 도왔다. 고용한 변호사의 말을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다. 한인들은 미국 동부에 있는 이승만을 불렀다. 배재고보 학창시절부터 서재필에게 감동을 받은 이승만은 영어를 잘했다.

재판이 지연되며 머무는 날이 길어지자, 이승만은 통역을 거절하고 돌아갔다. 자신은 기독교인으로 ‘살인자’를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무력에 의한’ 독립운동이 자신이 주장하는 ‘외교에 의한’ 독립운동과 안 맞아서였는지, 유학생인 자신에게 시간이 없어서였는지, 아무튼 그는 통역을 거절하고 떠나버렸다.

서로 다른 두 이야기 같지만 생각해 볼 공통점이 있다. 한국인의 문화와 한국인이 겪는 상황을 도외시하는 신앙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한국인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 한국 문화일진대, 신앙으로 문화를 갈아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신앙의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국인의 삶을 위로하고 한국인의 문화를 풍요롭게 해야 하니까 목회와 선교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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