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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순행 야외 전도론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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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5월 18일 (토) 19:26:04
최종편집 : 2019년 05월 23일 (목) 10:23:43 [조회수 : 3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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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순행 야외 전도론

노 종 해(CM리서치)

 

   
▲ John Wesley(1703-1791)

  요한 웨슬리는 1738년5월24일 회심의 체험이 있은 후 약6개월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모라비안 형제들의 모임을 돌아보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 모라비안 형제들의 모임인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해 달라는 요청에 의해 지도해왔다. 당시 웨슬리는 뉴케이트 교도소, 보카르도(Bocardo) 형무소 등을 찾아가 죄수들에게 설교하였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1739년3월에 브리스톨에서 활동하는 화이트헤드의 강력한 요청의 편지를 받고 1739년3월29일 브리스톨에 도착하여, 4월부터는 본격적인 야외전도(Open Air Preaching)를 시작 하여 몰두하였으며, 마을과 거리를 돌아다니며 설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748.6.28.) 이로 인하여 각 곳에 결신자들이 생겼고 그들을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고 증거케 하기 위해 “신도회”(Society)를 조직하였고, 이 신도회를 돌볼 수 있는 평신도 보조자(Lay-Assistants)들을 세우고 순회전도에 몰두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감리회(Methodist Society)가 설립되었다.

    웨슬리는 1790년10월7일 윈첼시(Winchelsea)의 물푸레나무 아래서 최후의 야외설교를  마지막으로 1791년3월2일에 세상 떠날 때까지 힘썼다. 웨슬리는 이 순행 야외전도를 “오늘 와서 야외설교가 내 십자가가 되었으나, 나는 내 임무를 알고 있었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다른 방법을 발견치 못하였다.”(1772.9.6.일기)고 하였다. 웨슬리는 82세 된 때 “살아있는 순간까지 그분을 위해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1785년3월24일 일기에는 50년 동안 순행 야외설교를 통해 이룬 열매를 회고하면서, “온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와이트(Wight)섬과 맨(Man) 섬까지, 그리고 리와드제도(Leeward Islands)로부터 전 대륙을 거쳐 카나다와 뉴파운드랜드(New-Foundland)까지, 미국에 까지 다녔다”고 그 결실에 놀라며 감사하고 있다.

   웨슬리의 일기 어느 곳에서든지 순행하며 야외 설교하는 그의 열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근대 선교 정책과 방법의 실천적 원칙이 된 순행전도 야외 전도설교에 대해서 그 동기와 멧세지, 방법과 결과를 그의 일기와 표준 설교문,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1. 웨슬리의 순행 야외 전도 이해


    웨슬리는1743년 “이성적이며 종교적 인사들에 대한 간곡한 호소”(an Earnest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란 논문에서 그의 순행야외 설교의 동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무종교인들과 생명 없는 형식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무슨 방법으로든지 설득시켜 더 훌륭한 종교가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이 훌륭한 종교란 사랑의 종교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모든 악, 불행, 인간의 사악을 치료하는 “생(生)의 양식”리며, 이 종교의 결실인 사랑, 기쁨, 평화가 이 세상에 실현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다“고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종교를 “성경적 기독교”라고 하였고, “여하한 경우와 어디를 가든지 전승된 성경적 기독교를 가지고 설교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감리교 인이란 바로 이 성경적 기독교란 말에 포함되었다“고도 말하였다.(A Short History of Methodism) 웨슬리는 ”성경적 기독교인“이란, ”성령에 의하여 마음속에 널리 확산 된 하나님의 사랑을 지닌 사람“이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자기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The Character of a Methodist) 즉, ”마음과 생활의 성결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된 뜻에 내적 및 외적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성격적 기독교인을 정의하였다.(Advice of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또한 ”성격적 기독교“란 설교에서 ”참된 기독교는 개인에 존재하기 시작해서 타인에게로 전파되며, 나아가 세계를 향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와 신앙 이해가 그로 하여금 야외 설교에 몰두케 한 것이다.

웨슬리는 1747년 제4회 연회에서 야외전도 설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우리의 사명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이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 대신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2)우리는 특별히 큰 길이나 울타리 밖에 나아가 억지로라도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눅14:23) 우리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사람이 없다.
3)교회는 모든 오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집(교회)에 오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있다지만 그 집은 야외에 모이는 사람을 다 수용할 수 없다.
4) 그 뿐 아니라 다른 방법보다 “이 야외 설교로 더 큰 은혜가 임”하였다. 즉 찾아가는 교회에서 만민을 구원하려는 전도적 열정과 이를 준행하려는 강력한 사명감을 볼 수 있다.

    웨슬리는 본래 야외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시설과 분위기, 아름다운 찬양 속에서 설교하기를 원하였다. 웨슬리는 야외설교를 통해 구원을 갈망하는 수많은 민중을 보고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설교를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복음을 외친 것이다. 웨슬리는 브리스톨에서 “오후 4시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기분은 더욱 언짢았으나 야외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고 하였으며, 5월7일에는 펜즈토드(Penstord)의 교회에서 설교 허락을 받았으나 거절하는 통보를 받고 부득이 야외설교를 할 수 밖에 없었음을 밝히고 있다. 1739년6월11일에는 “나의 원칙은 이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지는 것을 무엇이라도 해야 된다는 확신이 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디라도 가야만 한다는 확신입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어디든지 부르시는 데로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나의 확신입니다”고 하였다.

 

   
▲ 웨슬리의 신도회 "속회회원표"/평신도 전도인(Lay-preaching)


2. 웨슬리의 순행 야외 설교 중심내용


    웨슬리의 설교 중심내용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성령의 역사로 변화를 체험케 하는 동인이 되었다. 당시 이성을 근거로 하여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며 아무 감동 없는 교리적 체계를 정치권력과 함께 지키려 하였던 교회에는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다. 웨슬리는 설교의 내용에 대한 비평에 늘 담대하였으며, 그의 중심 멧세지를 분명히 밝혔다. 여기에서는 웨슬리 자신의 강조점을 중심으로 다루려한다.

첫째, 죄의 보편성(Universality of Sin)과 오직 믿음으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웨슬리는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이 본래적인 의로부터 멀리 떠나서 그의 본성이 악에 치우쳤다는 사실과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하는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즉 모든 인간의 본성은 부패(the Corruption)하여 그 본성으로 악에 기우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간으로서는 어떠한 선행으로든지 구원에 이를 수 없고 믿음도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오직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총(Free Grace)인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바로 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

둘째,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과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Salvation for All)

    웨슬리의 강조점은 인간 죄의 보편성과 인간 본성의 전적인 부패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 임하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거저주시는 은총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대속 물로 주셨다”고 설교하였으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뜻”을 증거 하였다.(1739.4.26.일기)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 역사하시며 모든 사람을 위해 거저 주신다”(Free in All, and Free fo All)고 하였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엡2:8) 말씀으로 거져 주시는 은혜와 믿음으로 누구나 구원 받음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왜 많은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반면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못 받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믿음도 없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롬9:30-32)“고 하였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구원 받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고, 모든 믿는 사람을 속죄하셨다.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속죄하였다“고 성경말씀으로 증거 하였다.

    이러한 멧세지는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고 회심케 하였으며, 현실에서 구원의 삶, 생활의 축복을 누리게 하였다.(”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Work2. ”성서적 구원의 길“, 웨슬리총서2) 죤 B. 캅(J.B. Cobb)은 ”웨슬리는 구원을 타계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지금 여기서의 구원은 웨슬리가 추구했던 유일한 목적“이라 지적하였다.(죤B. 캅:”은총과 책임“, KMC, p34-35)

셋째, 성령의 내증(The Witness of the Spirit)과 구원의 확신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 내적 체험으로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있음을 증거 하였다. 그는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8:16)란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모든 신자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와 또한 우리 영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고 하였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1) 자기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거룩한 성품과 행동을 가진 사람인 것을 알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2)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표적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하나님의 자녀인 외적표적이라 하였다. 여기에 신앙을 통한 변화되는 삶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진시한 증거를 보여야 한다는 강한 윤리적 성격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참된 구원을 갈망하는 자의 생활을 규정하였던 것이다.(신도의 규칙, 감리교 교리장정 총칙을 참고하라)

넷째, 그리스도의 완전을 요구함(The Call to Christian Perfection)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글에서 “우리의 모든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완전을 설교의 초점으로 삼고 계속적으로 강력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 해야겠고, 모든 신자들은 이 한 가지 사실에만은 유의하여 그것을 계속 염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완전이란 새로운 말이 아니라 성서적 용어요, 성서의 중심 멧세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웨슬리가 증거한 완전이란 한마디로 “완전한 사랑”(요일4:18)이며, “이것이 완전의 본질이다”고 하였고, 그 특성과 열매는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살전5:16-17)이라 하였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 결과로서, 진실한 믿음을 가졌으면 완전에 이르도록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을 성화, 성결이라고도 하였으며, “첫째는 의도의 순수성으로 하나님에게 삶을 헌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 전체를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기질을 통제하려는 의욕이요, 우리의 영, 육체, 재산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서 그가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걷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부정과 내적 및 외적 공해와 결별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셋째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고 하면서, “이것은 내가 1725년부터 1766년까지 40년간 믿고 가르친 유일하고 전체적인 완전이라”고 하였다.(Wesley,“그리스도인의 완전” 참고)

    웨슬리는 결코 지식과 도덕성과 인간의 유한성에서의 완전을 말하지 않았다. 웨슬리의 완전은 도덕법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계속 성장해 가야하는 것이다. 거룩한 사랑과 의, 마음과 생활의 순수성과 변화로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활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는 것이다.(설교, 그리스도의 완전. 참고) 죤 B. 캅은 “웨슬리가 의미한 성화(Sanctifiation)라는 용어와 현대에 가장 가까운 말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이라 하였다.(“은총과 책임”,p140)

    이상과 같은 웨슬리의 멧세지는 모든 신분의 계층을 넘어 복음이 증거 되었으며, 야외 전도의 기반이 되었고, 복음을 통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이루게 하였다. 왓킨스(William T. Watkins)는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근대에 위대한 사회적 힘이 되었고 사람들을 열등의식에서 해방시켜 아침 태양과 같은 소망을 주었다”고 하였다.

 

   
 


3. 웨슬리의 순행 야외 전도방법


    웨슬리는 교회에 와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찾아가 전도하였고 광산, 부두, 탄광, 술집, 창녀촌 등 교회의 장벽이 높아 교회를 찾아 들어오지 못하는 민중을 찾아가 전도하였다. 웨슬리의 순행야외 전도설교 장소는 다양하다. 거리, 시장, 산과 언덕, 들판뿐 아니라, 공장, 살롱, 여관 뜰, 어느 곳에서든지 설교하였다. 웨슬리에 있어서 위대한 점은 이렇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고, 결심 시켜서 계속 신앙생활 하도록 격려하고 “신도회”(Society)를 조직토록한 점이다. 이러한 신도회에 평신도 보조자(Lay Assistant), 속장(Class Leader), 유사(Steward) 등을 두어 신앙생활에서 결실 맺도록 하였다. 여기서는 어떻게 야외 전도를 하였는지 그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전도방식을 살피려 한다.

    웨슬리는 뉴캐스틀에서 노래하며 전도하였다. 가장 가난한 지역인 샌드게이트(Sandgate)로 가서 거리의 입구에 서서 시편100편을 노래하였다. 처음에는  서너 명이 무슨 일인가 나와 보더니 순식간에 4-50명으로 불어나 설교를 마칠 때쯤 되어서는 청중이 1,200-1,500명으로 늘었다고 기록하였고, 이사야53:5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설교를 인쇄하여서 찬송가를 나눠주며 노방전도하고 설교하였으며(1749.12), 한번 설교 후에는 다음에 다시 설교하겠다고 광고하고 지정한 시간에 설교하였다. 그는 쇠약한 중에도 회중들이 진지하게 듣는데 힘을 얻어 “나는 이 기회를 최대한도로 살리기 위해서 오후에 그 자리에 와서 다시 설교를 하겠다고 하였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또 와서 아주 경청을 하였으며,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모여든 회중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1747.3.24.일기). 그는 시끄러운 시장에서도 설교하였는데 나중에는 상점 문을 닫고 설교를 경청하기도 하였다“(1749.9.6.일기). 웨슬리는 거리와 시장에 서서 찬송하였고 기도하며 설교 문을 나누어주며 순행 설교하였다. 웨슬리는 ”나는 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넓은 의미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전하는 것이 정당한 나의 임무라는 뜻입니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있습니다“(서한,1739.3.20.)고 했다.

    웨슬리는 순행 설교를 위해 사사로운 어떠한 일에도 제약받길 윈치 않았다. 결혼 생활이 이에 지장을 줘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아내가 있는 사람도 없는 자 같이 살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일기,1752.2.2., 3.19. 참조) 웨슬리는 말을 타고 순행하며 그 도시를 유심히 살펴두고 실제적인 설교를 하였다.(일기,1776.5.1.) 그는 한 지역을 택하면 동,서,남,북 전체를 순회하며 설교하는 방식을 택하였다.(일기,1771.4.7.)

 

4. 웨슬리의 순행 야외 전도의 결과


첫째, 신도회를 조직케 되었다.

    신도회(Society)는 야외설교의 결과였다. 구원을 갈망하며 장래 임할 진노에서 피하고 진실한 믿음을 견지케 하기 위해 신도회를 조직하였다. 이 신도회는 회심자들을 훈련시키는 “속회”(Class Meeting)와 개개인의 신앙생활을 독려하는 신앙고백적인 모임인 “신도반”(Band) 모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러한 신도회가 1739년 브리스톨과 런던에서 시작되었고 각 곳에 형성되어, 1743년에는 “연합신도회“(United Society)를 결성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감리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둘째, 전도인 순행제도

    웨슬리는 순행야외 설교로 신도회를 조직하였고, 이러한 신도회에는 평신도  순회 전도인(Lay-Preacher)을 두어 전도케 하였다.(이러한 집회 장소와 순회 전도인 명단을 1769.11.16. 서한 참조). 웨슬리는 순회전도인들의 전도방법은 “신도회가 있는 곳에서부터 점차 조금씩 범위를 넓혀 전도할 것”(1744년 제2회 연회록)이라 하였다. 또한 순회 전도인들이 지켜야 할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권고하여 주었다. 즉, 1) 사소한 일부터 시작합시다. 2) 항상 긴장을 풀지 마십시오. 3)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 한집 들르십시오. 4) 어떤 이유로든 여인들과는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5) 사소한 것을 무시하지 말고 지키도록 대화나 설교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 사소한 것이란 능동적이며 근면할 것, 정결할 것, 의복을 단정히 입을 것, 이를 없앨 것, 자신과 가족의 몸을 치료할 것, 금연, 금주 등이다. 웨슬리는 조그마한 집이라도 마련하여 집회소를 중심으로 순행전도 할 것을 권고하였다.(1769.4.24. 서한)

셋째, 사회적 변화를 주었다(Social Reform)

    웨슬리는 그의 멧세지 자체가 복음을 통한 개인생활의 변화를 추구하였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케 하여 사회적 변혁에 큰 공헌을 하였다. 웨슬리는 고요한 개인주의적인 정적주의를 싫어하였으며 반대하였고, 실생활 속에 실천적인 윤리적 신앙을 견지하여 사회적 변화, 개혁을 이루었다.

넷째, 현대 선교의 효시와 방법론이 되었다

    올스트롬(Sydney E. Ahlstrom)은 “미국인의 종교사”란 책에서 “순회전도(Circuits) 제도가 미국에서 개척정신(Frontierism)을 주었고, 놀라운 확장(expansion)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으며, 엘리옷-빈스(Elliott-Binns)도 “오늘날 야외설교는 복음전파의 방법으로 받아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야외선교 정책은 한국 개신교 선교에서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반적인 원칙이 되었다.

    백낙준 박사는 “한국 개신교선교사”란 책에서 “순회전도”, “문서전도”, "노방전도“가 한국 개신교 선교사가 지켜온 일반적이며, 중요한 선교방법이었다고 분석하며 설명 하였다. 그는 미국 초기 감리교회처럼 한국기독교는 순행전도를 채택하여 찾아오길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라 찾아가는 정책이라 지적하며, 한국 개신교 선교사와 한국교회 선교의 특성을 밝히고 있다.(pp196ff, 참조) 웨슬리의 전도와 선교의 열정은 근대 세계선교를 열었고,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으며, 순행 야외전도, 순행전도 제도는 교회 개척과 최선의 선교방법이 되었다.(rch)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후렴)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 죽을 영혼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없네.
나 예수 의지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 앞에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아멘.

-웨슬리의 감리회 찬송: “천부여 의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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