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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이전 1910년경 연해주 (4)
박효원  |  hyo1956@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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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5월 16일 (목) 05:05:14 [조회수 : 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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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부터 있었던 한인거주지(한인촌)는 1913년 블라디보스톡 변두리로 이전했다. 이전은 반 강제적이었다. 새 거주지는 새로운 한인촌이라고 해서 신한촌(新韓村)이라 불렀다.

정교회는 이 기회를 이용했다. 정교회 건물로 장소를 선점하고 정교회 신도회를 조직하여 한인 신자들의 개종을 막았다. 그리고 개신교 교인이 된 자에게 러시아 국적을 주지 말라고 행정 당국에 요청했다.

그러나 당국은 정교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이 일어나고, 혁명을 겨우 진압한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재정 러시아와 정교회는 이전처럼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정교일치(政敎一致)는 느슨해졌어도 연해주 당국은 선교사를 계속 감시했다. 1908년 최관흘과 다른 선교사들을 체포해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죄명은 외국인으로서 ‘부도덕’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신교회가 러시아인들을 개종시켜서 사회 질서와 풍속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이다. 선교사들은 체포되어 추방되고 최관흘은 숨었다.

한인이 이미 십만 명을 넘었는데 한인을 위한 정교회 선교사는 열 명도 안됐다. 조선어를 잘 하는 선교사도 없었다. 정교회는 타민족 선교를 위한 조직을 새로 짜고 선교사를 양성하기로 했다. 재정이 필요했다. 블라디보스톡 교구에 있는 한인 선교부에 대한 지원 법안을 의회에 올렸다. 그러나 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 이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연해주 한인들이 세례를 받고 정교회 신자가 된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한인들은 위생이 불량하다고 러시아인 거주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인이 땅을 일궈놓으면 몰수하고 미개척지로 몰았다. 상투를 해도 벌금을 매겼다. 이런 판에 정교회 사제가 전하는 신앙을 받아들였겠는가? 자연히 정교회의 한인 선교는 성과 없었다.

반면 1909년부터 1912년까지 장로교의 연해주 선교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과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교회와 한국교회 모두 연해주 선교를 접기 시작했다. 적군(혁명군)이 연해주를 장악하는 1923년을 즈음해서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도 끝났다.

1907년 여름부터 1908년 겨울까지 연해주 의병들은 일본군과 무려 1700차례 전투를 했다. 일본은, 한인들이 항일투쟁을 못하도록 강력한 조치를 취하라고 러시아에 요구했다. 러일전쟁에서 참패했던 러시아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인들이 단체를 만들지 못하도록 했고, 투쟁을 하지 못하도록 무기를 압수했다. 항일투쟁은 수그러들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일로 무장투쟁이 다시 달아올랐다. 일본군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모의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뤄진 것을 알고 러시아 국경지대에 군대를 증강했다.

연해주 의병들은 뭉쳤다. 191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의병 조직을 통합하고 창의회(彰義會)로 명명했다. 의병들은 곧 들려온 한일합방 소식에 치를 떨었다.

한국은 이제 일본 영토다. 1884년 조선과 러시아가 맺은 수호조약을 끝났다. 이것이 일본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인이라고 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 특히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연해주 한인들을 골치거리로 여겼다. 일본이 러시아 국적이 없는 한인을 문제 삼아 내정간섭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1911년 일본과 러시아 양국은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었다. 말을 안 듣는 러시아 국적 한인들을 시베리아로 보낼 수 있게 됐고, 조선 국적 한인들을 러시아에서 추방할 수 있게 됐다. 항일운동은 위축됐다. 한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얻으려 했다. 3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국적을 포기했다.

독립운동이 소강상태를 맞자, 한인들은 내실을 다졌다. 한인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했다.

국민회는 1909년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생긴 독립운동 단체로,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이 중심 인물이었다.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 ‘실력양성’을 주장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을 주장하고, 이승만은 ‘외교 독립론’을 주장했다. 1921년 이승만은 국민회에서 탈퇴해 동지회(同志會)를 만들었다.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인 자신을 종신 총재에 추대하게 하고, 회원들이 총재에 절대 복종할 것을 규약에 넣었다. 동지회는 이승만 중심의 단체였다.

1912년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만주와 연해주까지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국민회는 미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의 견제로 활동을 못하게 됐다.

권업회(勸業會)는 1911년 한인들이 세운 대표 자치기관이다. 권업회는 한인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여러 곳에 학교를 세웠다. 권업회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던 실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단체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이상설을 선출했다. 여러 곳에 비밀부대를 편성하고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권업회는 한글 주간지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금지를 당하기까지 126호를 발행한 이 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였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가까워졌다. 권업신문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폐간됐다. 일본은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1차 세계대전부터 1917년 혁명까지 독립운동은 침체됐다. 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징집된 러시아 국적 한인은 4000명이나 됐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우다가 생포된 한인에게 민요를 부르게 하고, 독일의 민속 언어학자가 채집하는 장면이었다. 100년 전 한인의 기구한 운명이 직직거리는 축음기에 실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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