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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목회와 상담
이광  |  black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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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5월 15일 (수) 22:32:05
최종편집 : 2019년 05월 17일 (금) 00:12:03 [조회수 :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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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번트리더십훈련원(대표 협성대 유성준교수)의 핵심사역인 한국서번트리더십학교 5월 모임이 5월3일(월) 협성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이세형교수(협성대)의 ‘서번트 목회와 상담’을 주제로 진행되었다. 이세형 교수는 미국 드루 대학교에서 도가 철학과 과정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협성대학교에서 20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작년 봄부터 목회상담학 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그는 깊은 종교적 경험도 있고 신학과 영성 분야에도 깊은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정신분석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소중한 선물임을 경험하고 정신분석 상담과정을 통해 삶의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 강의중인 이세형 교수 (협성대학교)>

 이교수는 2018년에는 캘리포니아 댄빌에 위치한 샌 다미아노수도원에서 영성훈련을 받던 중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깊은 말씀에 초대되는 경험을 하였다고 한다. 주님과 내면의 대화로 몰입할 때 “주님 제게 주신 주님의 소명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고 주님께서는 “네게 오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대하면 어떨까? 연민을 갖고 품어주는 삶을 살면 어떨까? 그러려면 가르치려 하지 말고 빙그레 웃어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무의식적으로 영적으로 안아주고 견뎌주고 품어주면 어떨까?”라고 말씀 하셨다. 주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진리는 아주 쉽고 단순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종종 설교할 때 어려운 말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그럴듯한 말들을 인용했었는데 앞으로는 쉬운 말을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상담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상담가는 품어주고, 담아주고, 기다려주고, 소극적 능력을 제공함으로서 내담자가 건강한 독립된 개체 존재로 탄생하게 해준다. 서번트 목회도 자신을 내어 주어 우리를 품으시는 어머니의 목회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심리적으로 탄생하기 전 빛나는 눈동자를 주고, 사랑을 주고 상상을 주고 말을 주었다. 서번트 목회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섬김이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교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상담에서 상담가의 자리가 어머니 인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어머니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나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 내담자가 어머니 같은 상담가를 통해 재탄생되듯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머니 교회의 품에서 재탄생된다. 이 점에서 서번트 리더십은 어머니의 품이 있는 리더십이고 지도자를 탄생시키는 리더십이다.

 우리의 소명은 아픔과 고통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인격이 우리가 경험한 고통에서 시작되었고, 이 고통에서 우리는 이 땅의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픈 소리를 들으며 응답한다. 상담이 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결혼이 둘이 이루는 것처럼 우리는 함께 하도록 부름 받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 변화 한 가운데 변혁의 주체자로 부름받은 지도력이다. 진정한 지도력은 경계를 나누고 강력한 법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우선인 지도력이 아니고 품고 기다려 주고 사랑의 어머니가 우선인 지도력이다. 어머니 그 위대한 이름으로 상담가, 영성가, 섬김의 목회자는 하나이다. 이 날 진행된 ‘서번트목회와 상담’ 주제강연 내용 전문은 다음과 같다.

 

   
▲ 강의중인 이세형 교수 (협성대학교)>


서번트 목회와 상담

이세형 교수(협성대학교 조직신학/ 목회상담)

I. 들어가는 글.


저는 작년에 60의 문턱에 올랐습니다. 1976년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1996년 도가 철학과 과정철학을 기초로 미국 뉴저지에 소재한 드루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그 후 귀국하여 정동제일교회에서 선교 담당 부담임 목사를 한 후 1998년 협성대학교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2017년까지 20년 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동안 전공분야에서  네 권의 저서와 19권의 학문적 역서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봄 학기부터 협성대학교의 목회상담학 교수가 되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변신에는 제 삶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50대에 들면서 머리에서 가슴을 지나 몸으로 향하는 통합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코칭을 공부하여 랜드막 세미나 강사가 되어 보기도 하고, 서울대 최고위 과정 중 하나인 sparc에서 과학을 공부해보기도 했습니다. 또 7년 넘도록 미국 감리교회 다락방이 제공하는 Five Days Spirituality 프로그램에서 강사로 통역자로 신학자로 참석하며 기여하였고 현재도 Two Years Program에 참석하면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16개의 영성 프로그램을 훈련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정신분석 상담가가 된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과학적 탐구와 성찰에 매료된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의식의 세계를 넘어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은 내가 알 수 없었던 영역에 대한 내면의 세계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놀라운 변화와 변형의 경험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11년부터 정신분석에 입문해 학회와 집단 상담과 교육상담 그리고 개인 상담의 오랜 시간 훈련받았습니다. 현재도 뉴욕 공인 정신분석가로부터 임상훈련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정신분석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하였습니다. 고된 훈련을 통해 지난 5년 전부터 정신분석 상담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내담자와 상담가인 제 자신이 변화를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깊은 종교적인 경험도 있고 신학과 영성 분야에도 깊은 공부를 하여보았습니다. 철학과 여타 학문에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신분석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소중한 선물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큰일을 치르고 난 다음 공허감에 시달리곤 했고 누군가의 인정에 목마른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 상담 과정을 통해 제 삶에 진정한 자유와 사랑의 충만함을 존재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경험한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서 부분을 넘어 전체를 보는 건강한 심리 탄생을 위해 더 깊이 훈련하고 공부하며 삶에 고통을 경험하는 분들과 함께 여정을 함께 하고자 정신분석 상담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목회상담 교수가 된 것입니다.


II. 그게 바로 너야


2017년 여름 저는 캘리포니아 댄빌에 위치한 샌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한 주간 머물려 영성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구부러진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렉시오 디비나를 하기 전 나무를 쳐다 보았습다. 그러자 그 나무가 나를 보면서 그럽니다. “내 모습이 어때서?” 이 소리는 나무가 나를 향한 소리 같기도 했지만 내 스스로가 내게 이르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물었습니다. “내 모습이 어때서?” 정말이지 내 모습이 그냥 이대로 지금 이대로 온전하고 괜찮았습니다. 늘 뭔가 모자란 듯해서 갈증을 느꼈던 내 존재가 충만하고 깊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눅 5:17-26에 기초하여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말씀에 초대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치유자시오 선생님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갈리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학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이 있고 중풍병자를 들고 주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있으며 마지막은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전 성경에 등장한 각자의 모습은 마치 꿈에 나타나는 다른 상징이나 인격체가 나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듯이 나의 또 다른 모습들로 다가왔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제 삶은 자기정당화, 자기의 의로움, 자기애에 빠진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주님과 논쟁도 하여보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신학적 질문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형식과 규례에 억매인 삶을 살았습니다. 중풍병자의 아픔이나 치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자기애적인 삶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또 살펴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름 없는 사람들, 곧 무리들의 삶도 저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나의 주체적인 삶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과 누군가의 음성에 나를 맞추어 생각 없이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이 무리들로 인해 중풍병자가 주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길 원한다면 무리라는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세 번째 제가 만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제게 큰 연민을 주었습니다. 제 삶에서도 누군가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도록 노력하고 수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이 누군가를 위해 소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나라면 어떻게 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주님과의 내면의 대화로 몰입해 갔습니다.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주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거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듯싶었습니다. “애야. 그 동안 잘 살아구나! 목사로 교수로.” (이 말은 주님의 말인지, 내가 내게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 주님. 한 때는 살면서 불평도 많이 했습니다. 너희들 때문이라고. 이제 별 욕심이 없는 듯합니다. 안전한 영역에 도달한 듯해서...편안히 지내고 싶습니다. 주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제게 주신 주님의 소명은 무엇인가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글쎄다. 아마도 네게 오는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대하면 어떨까? 연민을 갖고 품어주는 삶을 살면 어떨까?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르치려 하지 말고, 빙그레 웃어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무의식적으로, 영적으로 안아주고 견뎌주고 품어주면 어떨까? 주변의 교우들에게, 학생들에게, 만나는 목회자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는 지도력을 가지면 어떨까? 설교나 훈계는 힘이 별로 없잖아!!! 바람이 참 부드럽네요. 물소리도 맑게 들리고...하나님의 창조는 이토록 아름다운데. 오늘 성경을 읽는 중에 질문이 하나 생겼어요. ”왜 주님은 군중 속에 있나요? 조용한 산이나, 동굴이나, 사막에 계시지 않고?“

그것 참 좋은 질문이다. 왜 내가 군중 속에 있을까? 군중속의 삶, 삶의 애환과 고통이 담긴 삶의 역동이 있어서 이지 않을까? 나는 주님이 책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군중 속에 계시니 그러네요! 하하. 네가 읽은 책에서도 내가 군중 속에 있다고 하지 않았니? 난 과거에도 군중 속에 있었고, 지금도 군중 속에 있어. 난 주님이 산속 수도원에 있는 줄 알았는데...조용한 곳, 특별한 곳, 샌 다미아노에 계신 줄 알았는데..오히려 주님은 군중 속에 계시다고 하네요. 난 군중을 좋아해. 군중 한 가운데...아마 군속 속에 있어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일지 모르지?!

그러면 군중 속에서 어떻게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주님은 어떤 특별한 얼굴 모양을 하고 계신가요? 특별한 옷차림을 하고 계신가요? 특별한 정당에 속해 계신가요? 아니면 어떤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시나요? 특별한 인종이신가요? 남자신가요? 여자신가요? 하하 나는 군중들의 언어로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어. 가르침 내용은 군중들의 삶 중에서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전하는 진리는 아주 쉽고 단순해. 말하자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런 것.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런 것. 진짜 쉽네요. 그러니까 군중 속에서 어려운 말로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주님이 아니네요. 난 종종 설교 한답시고 어려운 말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그럴듯한 말들을 인용해서 말하곤 했는데, 앞으로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하겠네요.

맞아. 쉬운 말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군중들과 친해질 뿐 아니라, 주님을 담는 것이기도 하지. 그리고 앞으로 군중 속에 있는 “나”를 만나려거든, 쉬운 말로 삶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란 걸 기억해. 와우. 크게 도움이 되었네요. 앞으로는 쉬운 말로 말하고, 쉬운 내용으로 글을 써야겠네요. 그런데 쉬운 말을 한다는 것이 어려워 보이니 말이에요. 그래서 네가 매고온 환자가 내게 오려면 지붕을 뚫고(머리에서), 내려가(가슴을 거쳐), 땅에 닿아야(몸)되. 사람들이 머리로만 사니까 감정을 잃어버렸고 사랑의 삶을 잃어버리게 된 거야. 정신증 환자나 편집적 분열에 속한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이야. 자기만 생각하느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거야. 모든 책임은 너에게 있는 것이고. 그해서 이웃의 아픔을 느끼고 연민하고 공감해 줄 수 없는 것이야.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야 되. 가슴까지 내려오면 손발로 이어져야지. 진리가 손으로 발로 내려가야 육화된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야.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온 이유는 진리는 이렇게 육체를 입고 땅에 닿아야 완성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해...안타까운 일이야. 자꾸 몸에서 가슴을 거쳐 머리로 가니까 진리의 표현들이 어려워져. 내려가야지. 몸으로 진리를 터득하면 말이 쉬워져. 삶도 쉬워지고. 관계도 쉬워지고...하하 모든 것이 쉬워지지. 노동하고, 걷고, 군중을 만나 같이 살면 되. 그것이 내가 군중 가운에 있는 이유야.

와. 놀랍네요. 오늘 주님께로부터 많이 배웁니다.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너도 병자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야. 너와 군중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어. 그리고 지금 너는 누군가를 고쳐 달라고 데려왔는데. 잘 봐 이 병자가 바로 너야. 이 병자의 얼굴에서 너의 모습을 보렴. 순간.

이 병자가 바로 나야. 내가 병자라는 사실이 온 몸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이 순간 나는 묵상의 자세를 다시 하여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더니 존재를 담은 기도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빌려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주 예수여. 나는 죄인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얼마 후 마음으로부터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얘야. 이제 네 자리에서 일어나렴.’ 매트(과거의 삶)를 들고, 걸어가 집으로 가거라.

매트는 그동안 나의 삶의 방편이었고 나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나의 생각하는 방식이었고 나의 방어 논리였습니다. 이렇게 살면 되 하고 내가 계획한 나의 여정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노력으로 인생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부지런히 살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좋은 교수, 좋은 목사,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과 나의 삶의 논리는 불구가 된 나의 영적 삶을 지탱해준 방어 논리였습니다. 내게 우선적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빛에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햇살과 함께 빙그레 웃으시며 팔을 벌리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III. 상담가. 영성가, 서번트 목회자 그대 이름은 어머니.


상담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서 상담가는 품어주고, 담아주고, 기다려주고, 소극적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내담자가 건강한 독립된 개체 존재로 탄생하게 해줍니다. 상담에는 여러 기법이 있지만 인지나 의식의 영역을 넘어 무의식의 층을 다루는 상담은 그 만큼 세밀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분별력을 요합니다. 내담자가 자신의 무의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분석가를 깊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신뢰 속에서 내담자는 퇴행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역기능적인 증상의 원 자리를 찾아 알아차리기를 통해 의식화를 거쳐 재탄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때문에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기 전 몸의 영역에서 감정의 영역에서 에너지의 영역에서 무의식적 체험을 거치게 되는 데 이런 경험이 가능 한 것은 애정과 헌신적 사랑을 담은 어머니로서의 상담가라 하겠습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이 육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의 영적 삶은 육화된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든 영성이란 하나님의 어머니 품에 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번트 목회는 자신을 내어 주어 우리를 품으시는 어머니의 목회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아버지이기보다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심리적으로 탄생하기 전 빛나는 눈동자를 주고, 사랑을 주고, 상상을 주고, 말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말 걸어오심에 우리는 말의 사람이 되었고 언어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번트 목회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섬김입니다. 이 섬김의 지도력이 어머니의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이 사랑을 어머니 교회라는 말에 넣어 잠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교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와 어거스틴과 캘빈은 교회를 어머니로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상담에서 상담가의 자리가 어머니 인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어머니입니다. 교회가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어머니는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가진 어머니입니다. 자녀를 향한 집착이 아니고 자녀를 사랑하여 정성스럽게 키운 다음에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놓아주는 것이 어머니의 과제입니다. 사랑은 줌이면서 놓아줌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페리코레시스의 연합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넘쳐나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고 보존하며 변화를 이루어가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랑이 성숙함으로 이웃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홀로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사랑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다음에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곳으로 발전해 갑니다. 사랑이 성숙했을 때 우리는 공감하며, 창조성을 발휘하며 유한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유머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로 나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와 존재 되어감의 소명과 삶의 소명이 어머니 품에서 탄생된다는 점입니다. 내담자가 상담가의 어머니 품에서 재탄생되듯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머니 교회의 품에서 재탄생됩니다. 이점에서 서번트 리더십은 어머니의 품이 있는 리더십이고 지도자을 탄생시키는 리더십입니다.


IV. 어머니가 되십시오.


우리의 소명은 아픔과 고통에서 출발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우리가 경험한 고통에서 시작되었고, 이 고통에서 우리는 이 땅의 고통당하는 자들의 아픈 소리를 들으며 응답합니다. 상담이 둘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결혼이 둘이 이루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탄생 자체가 너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너와 함께 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이유는 사랑하도록 부름받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사랑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지만, 가지지 않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머니 지도력은 거기 있어 현재를 사는 지도력입니다. 속도를 천천히 하는 지도력입니다. 거기 잠잠히 서 있을 수 있는 지도력입니다. 그리고 이웃과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지도력입니다. 어머니는 품어주는 분 안아주는 분 견뎌주는 분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어머니 리더십입니다.

세상을 빠르게 변합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 변화 한 가운데 변혁의 주체자로 부름받은 지도력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화와 변혁의 역사로 가득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어머니 마리아의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가복은 1:46-53절에 있는 마리아의 기도는 예수님의 목회적 선언 기도(눅 4:18-20)에 고스란히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예수님의 목회와 하나입니다. 서번트 리더십 목회자들이 기도가 어머니 교회의 기도가 되고 어머기 교회의 기도가 한국 목회자들의 기오입니다.

예수님의 고백한 하나님은 사랑과 은총으로 만물에게 다가가고 자기 비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되 죽기까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이루려고 한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넘실되는 나라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도리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마 5:3-5)


힘을 숭배한 교회는 애굽이 된 교회입니다. 힘의 논리가 된 교회는 타락한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경계를 나누고 강력한 법을 행사하는 아버지가 우선이 지도력이 아니고 품고 기다려 주고 사랑의 어머니가 우선인 지도력입니다. 섬김은 약해 보이지만 그 섬김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의 지도력은 생산성을 지향하는 위로의 지도력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나아가 심리적 생명과 영적 생명을 탄생시키는 아래로의 지도력입니다. 이런 점에서 섬김의 지도력은 어머니의 지도력과 담아 있습니다. 어머니 그 위대한 이름으로 상담가, 영성가, 섬김의 목회자는 하나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5월 13일. 서번트 리더십 학교 강의)

 

2007년 5/6월 호 「얼라이브 나우」에 실린 셜리 몬토야의 글 “영의 나무”(The Spirit Tree)

내가 태어나고 자란 디네(Diné 나바조인 발음으로 디-나이 dih-NAY) 보호지역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이 나라가 다른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문제들은 다른 세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바조 종족은 서구 유럽과 전통적인 디네 문화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흐름이 다른 두 세계의 역동 사이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외부에서 웅웅거리고 윙윙거리는 세상의 소리를 들으면서 이 소리들을 내면으로는 들이지 않은 채 그저 소박하게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 머물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나는 내가 세상 속으로 발을 디디기 전에 이미 하루하루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남편 로버트가 커피를 갈아내고 사이 커피 향을 맡으면서 내가 컵을 그곳으로 가져갈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일어나 빛을 발하고 싶은 힘을 가집니다.

많은 일들이 풍요롭게 일어납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진료소 앞에 서 있는 참나무 한 그루를 보았습니다. 난 나무에서 떨어진 나무 잎 몇 개를 주웠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나무 잎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색깔들도 황금색, 노란색, 초록색, 갈색, 빨간 색의 여러 줄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거대하고 하늘을 치솟아 오른 나무가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어 하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분명 이 참나무의 힘은 하루 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나무가 자라기까지 양분을 빨아들이고 물을 공급받으며 햇볕과 돌봄을 반은 시간이 여러 해가 걸린 것이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나무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기도는 이렇게 기도하는 듯싶었습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나는 많은 팔과 다양한 모양과 색깔을 한 잎들을 가진 크고 강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빛을 받아들임을 축하하기 위해 나는 나의 팔을 듭니다. 나는 당신 사람들과 이 땅에 피조물을 위해 쉼터를 제공합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나는 여름에는 훈훈한 바람을 가져와 겨울에는 거친 돌풍의 채찍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합니다. 나는 약하고 혼돈을 느끼며 누군가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오래 참음과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선물합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나는 잎과 가지들이 계절과 더불어 자라고 해가 지나면서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내가 죽음에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를 이 땅에 심고 나를 키워준 분의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포근함을 느낍니다.

당신의 성령으로 나는 당신의 창조적인 손과 현존의 가르침을 제공합니다. 나는 나의 모든 부분이 온전한 아름다움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자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나는 쉼터입니다. 나는 아름다움입니다. 나는 사랑입니다. 나는 영의 나무입니다.     


Letting go and Letting God
흘러 보내는 것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흘러 보내는 것은 돌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돌봄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흘러 보내는 것은 나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도울 수 없음이 아니라, 자연스런 결과로부터 배우기를 허락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능력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이 내 손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흘러 보내는 것은 다른 이를 바꾸려 하거나 탓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돌봄에 빠지는 것이 아니가 관심을 갖고 돌보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모든 결과를 조정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해 주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가 한 사람의 인간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칭얼거리고 꾸짖고 논쟁하는 대신 나의 결점을 찾아내어 교정하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내 욕망에 모든 것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도래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 안에 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누군가를 비판하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꿈꾼 대로 대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며 미래를 위해 사는 것이다.
흘러 보내는 것은 덜 두려워하고 더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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