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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예배에 목숨 걸지 말라'예배 장사'의 함정
신성남  |  sungnam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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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4월 15일 (월) 06:36:33
최종편집 : 2019년 04월 17일 (수) 12:02:38 [조회수 :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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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보면 "예배에 목숨 걸라"고 열변을 토하는 설교자들이 있다. 아울러 "설교에 목숨 걸라"고 강조하는 목회자도 많다.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예배가 중요하고 설교도 중요하다.

 

일상의 삶이 예배다

문제는 이게 다소 과장하는 측면이 크고 더 나아가 이를 종교적 목적으로 악용하는 목회자가 많다는 점이다. 나는 이런 사상을 '예배주의'라고 분류하고 싶다.

만일 그 예배의 정의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적극 지지하며 마음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한 산 제물(롬12:1)'로서의 합당한 예배를 실천하는 것이기 떄문이다.

반면에 실제 현실은 크게 다르다. 상당수 설교자들이 말하는 예배란 주로 '공예배'다. 그리고는 그 예배를 교인 동원의 수단이나 헌금 유도의 용도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단이나 사이비로 갈수록 이런 현상은 극심하고 요즘은 심지어 소위 정통이란 교회들도 그것을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 일단 교인수 늘리고 돈 걷는데는 그 예배라는 거룩한 이름의 약발이 제법 잘 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과연 예배가 사람을 바꾸는 것일까. 사람이 예배를 바꾸는 것일까? 어느 것이 더 바른 순서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우선 한국인의 생활에 뿌리 깊은 무속 신앙을 살펴 보자. 자기 인성이나 생활은 바꾸지 않은채 굿이나 제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평소 하고 싶은 대로 욕심 그대로 살면서 돈이나 정성을 바쳐 굿하고 제사하면 삶이 바뀔 것으로 기대한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제사 신앙이나 주술 신앙이다.

 

예배주의는 제사주의의 아류

구약의 유대 백성들도 이와 비슷한 오류에 빠진 적이 많았다. 자기들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살면서도 성전 제사나 절기만 잘 지키면 그걸로 종교적 의무를 다 한 것으로 간주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사1:13, 공동번역)."고 하셨을까.

여기서 '헛된 제물'이란 그것이 손상된 제물이란 의미가 아니다. 제물 자체는 아주 멀쩡하지만 그 제물을 바치는 너희 행실이 아주 틀려먹었다는 걸 뜻한다. 그 뒤의 구절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6)"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예배주의자들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한다. "영혼이 살아나려면 예배부터 변화시켜라", "예배하는 자리를 단 하나의 목숨처럼 사모하라", "준비하는 예배에 은혜의 홍수가 범람한다", "우리는 예배만으로 충분하다", "다양한 예배 체험으로 영적 희락을 발견하라", "메마른 영혼이 예배의 강물에서 펄떡이게 하라", "예배는 인생 최상급의 사명이며 복의 통로다"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숨차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를 지키면 삶의 현장에서도 승리한다"는 이 마지막 구호에 그 본심이 들어 있다.

나는 지금 공예배가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마치 하나님은 교회당 건물 속에만 또는 주일 아침에만 특정 장소에 임재하시는 것처럼 허풍을 떨며 오히려 그 순수한 예배를 종교적 이권으로 오용하고 악용하는 일부 예배주의자들의 간교함을 지적하는 거다.

 

행실을 고쳐야 바른 예배다

과연 예배의 자리를 잘 지키면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기 행실이 바뀌지 않는 신도는 매주 교회 마당만 열심히 밟고 있을 뿐이다. 그건 자기에게도 세상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작 성직자들 배를 불리는데만 도움이 된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역겨워 하실 뿐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공예배 중심 사상을 글자 그대로 따르는 맹신도들이 많다는 사실에 있다. 순진한 사람들은 예배만 잘 하면 삶이 해결되고 큰 복을 받는 것으로 오해한다. 마치 무당에게 돈 많이 바치고 큰 굿을 할수록 효험이 크다는 논리와 같다.

결론은 지금 순서가 바뀌었다는 거다. 지금 현대 예배는 인간을 바꾸는데에 크게 실패하고 있다. 오히려 스스로 행실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예배는 저절로 바뀌게 될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며 예배해도 왜 만날 그 모양 그 꼴일까. 왜 동네 교회마다 예배가 그렇게 넘치는데도 방송에 보도되는 파렴치 범죄자들은 교회 직분자들 투성이일까.

평생 예배하고 심지어 평생 설교를 하고 산 사람도 잘 안 바뀐다. 교회 비리는 거의 다 설교자들이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예배에 참석하여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쉽게 바뀌겠는가. 웃기지 마시라. 설교로 사람 잘 안 변한다. 수십 년 동안 설교한 횡령, 표절, 학력 사기, 성추행, 세습 목사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진정 공예배에 '목숨'을 걸 만한 힘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차라리 그 힘으로 먼저 성도다운 삶에 목숨을 걸기 바란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더 원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의에 목숨 걸고, 신자의 소명에 목숨 걸고, 이웃 사랑에 목숨을 걸라는 거다. 그리고 관습적인 설교 중독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비로소 삶이 점차 변화할 것이다.
 
그러면 주일마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은혜 받으라고 굳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아도 저절로 모든 예배에 은혜가 차고 넘칠 것이다.

 

신성남 / 집사,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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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222.100.38.174)
2019-04-15 22:43:58
‘이장림과 携擧族(휴거족)’의 주고받기式 예배
성경번역가 겸 목사였던 다미선교회의 이장림(현재는 ‘이답게’로 改名)이 16C의 점성술사 노스트라다무스, 요한계시록 등과 종말론 관련 서적에 푹 빠져 수시로 예배시간에 종말론에 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장림이 뿌려놓은 떡밥을 덥석 물은 신도들 역시 世紀末 특유의 사회분위기에 휩싸여 종말론에 심취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휴거일이 언제인지 신도들 사이에서 토론과 설왕설래가 일어났다. 이장림이 휴거일을 특정하여 제시하지 아니한 채 막연하게 가까운 장래에 휴거된다고만 하였기에...

한 젊은 광신도가 이장림의 설교에 비추어보면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시작된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딱히 이를 부정할 수 없었던 이장림 역시 이 주장에 슬그머니 편승하였다. 자기가 뿌린 떡밥을 문 신도들의 입에서 떡밥을 빼앗는다면 자기가 쫓겨날 지경으로까지 올라간 열기와 광기에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 또라이 방송국이 전국에 휴거실황중계를 하는 가운데 나방 한 마리가 붕 날아가자 와~~~ 하며 휴거의 전조라고 환희에 젖어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게 ‘제대로 된 휴거의 마지막 예배’가 되고 말았다.

극단적으로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의 경우를 例示하였지만 우리가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예배시간에 목사가 양심은 있어서 조금은 쭈뼛하면서 설교를 한다. 선배 목사들이 설교하는 걸 흉내 내기도 하고 또는 자기 나름대로의 소명의식이 있어서... 그런데 신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자기의 말이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령 ‘예배에 목숨을 걸어라’는 식의 설교가 먹혀들어갔다면... 이젠 이를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미 설교는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신도들의 설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목사가 이와 다르게 설교하고 싶어도 이젠 신도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미몽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이제부터 목사가 신도들의 입맛에 맞게 설교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는 점점 쇠퇴해지게 된다. 신도들의 입맛에 잘 맞추어 예배, 설교하는 목사는 대형교회 목사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이장림 목사가 ‘휴거’라는 떡밥을 뿌렸고, 그 떡밥을 문 광신도 하나가 ‘휴거일’을 특정했고, 이젠 이장림 목사조차도 ‘휴거일’ 특정에 따라 갈 수밖에 없었던 것과 이른바 正統대형교회가 굴러가는 과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휴거일을 특정하여 큰 코를 다친 異端에 비해 正統대형교회는 두루뭉술하게 성경을 인용하여 아직 큰 코를 다치지 않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그 과정은 유사하다. 목사가 신도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내일 당장 문을 닫아야한다. 서로서로 주고받으면서 共存共生하는 관계가 목사-신도 관계이다.

국민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뽑는다는 말이 맞는다면, 신도 수준의 목사를 가진다는 말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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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티끌 (39.7.51.10)
2019-04-16 16:11:49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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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구 (1.254.130.226)
2019-04-16 11:58:20
삶의 예배를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라.
목회자가 예배에 온 열정을 쏟지만 그 뒷모습은 온갖 부패가 가득한 것은 필자의 지적과 같이 부패한 교회의 전형적인 현상이었고,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며, 더 나아가 심판을 받는 것이 성경의 모든 교회가 동일한 현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형적인 부패가 현대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사안이라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부패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목회자를 책망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로부터 전형적인 부패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처럼 목회자들이 하나님도 성경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깨달은 것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선배 목사들이 말한 설교를 토대로 자기 나름대로의 양념을 추가하여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현대교회의 목회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에 성경도 모르고 따라서 하나님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성도들 앞에서는 오히려 성경에 박식하며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의롭게 보이며, 또 경건하게 보이기 위한 작업을 예배 시간에 온 열정을 다 쏟아 부으며, 기도 시간마다 간절히 부르짖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어 성도들도 예배에 소명 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며 또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고 부르짖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예배에 열정과 부르짖는 목사들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추악한 모습을 가진 목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배와 삶이 다른 목회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현대교회 목회자들은 자기 입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시간 날 때마다 욕을 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들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모습을 따라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암 환자와 다를 바가 없는 현실입니다.
성도들이여 목회자들의 현실이 이와 같다면 아무리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자고 할지라도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을뿐더러 목회자가 위선자로서 심판을 받는다면 성도들 역시 그 나물에 그 밥과 같은 처지로서 갖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정한 예배, 삶의 예배를 드리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성경을 바로 아는 지난(至難: 지극히 어려운)한 성경 묵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안 됩니다. 진정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삶의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경 묵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묵상은 현대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한 과제입니다. 우리들은 조그마한 것 하나도 따지도 묻고 살펴봅니다. 그런데 현대교회 성도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선 누가 어떤 말을 하든 끌면 끄는 대로 “아멘”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천국이 걸린 문제가, 또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가 그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성도 여러분들이 목사를 신뢰할 수 없다면 목사의 각성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들이 말씀을 묵상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시간만 있다면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천국에 관한 것을 잘못 선택한다면 죽어서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고통만이 남을 뿐입니다. 그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말씀을 엉터리로 전한 담임목사를 원망하렵니까?
죽어서 원망하지 않으려면 지금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성경 묵상을 함으로 목사들이 전하는 말씀들이 ‘진짜 그런가?’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며,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과 내가 가진 구원의 확신이 올바른지 끊임없이 확인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 지식 없는 내가 어찌 묵상할 수 있을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묵상을 계속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행동해 보세요.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또한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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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법규 (122.101.20.49)
2019-04-16 06:24:54
뭐든지 상식과 도를 벗어나면 반드시 뒷탈이 생기게 마련이다.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도를 벗어나면 오히려 믿음이 없음만 못할것 같다라는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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