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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돌, 머릿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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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4월 14일 (일) 16:45:33 [조회수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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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돌, 머릿돌
시118:19-29
(2019/04/14,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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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이것이 주님의 문이다.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이 날은 주님이 구별해 주신 날, 우리 모두 이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주님, 간구합니다. 우리를 형통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에게는 복이 있다. 주님의 집에서 우리가 너희를 축복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 나뭇가지로 축제의 단을 장식하고, 제단의 뿔도 꾸며라.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 기리겠습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호산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남산에는 벚꽃이 한창이고 조팝나무 흰 꽃도 세상을 환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꽃 시절을 한갓지게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이웃 가운데 아픈 기억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동해안 일대에 일어난 산불로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들은 망연자실한 채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검게 탄 것은 숲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가슴은 여전히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다가옵니다. 유족들은 여전히 그 참담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픔의 기억을 안고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영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나귀를 타는 행위는 상징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순례의 명절에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에 몰리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로마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보내곤 했습니다. 로마 군단의 깃발과 기마병을 앞세운 그 행렬은 ‘조금이라도 반란의 조짐이 보이면 다 죽는다‘는 무언의 협박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주님의 행렬은 로마군인들의 행렬과 대비됩니다. 느릿느릿 걷는 나귀는 평화 시대를 상징합니다.

옛날에 솔로몬은 선왕인 다윗의 나귀를 타고 기혼에 가서 사독 제사장과 나단 예언자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고 나귀를 탄 채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왕상1:45). 그의 통치 시대가 평화의 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겁니다. 사람들은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구현하셨던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 깔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11:9-10) 민족주의적 열정과 아울러 종교적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이지만 오시는 주님에 대한 찬양이라고 보아도 좋겠습니다. 오랜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생활에 지쳤을 법도 하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선민이라는 자부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 시대의 영화로움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왔으니 그런 열망이 더욱 커졌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3대 순례 명절이 되면 ‘할렐 시편’을 부르곤 했습니다. 할렐 시편이란 ‘할렐루야’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시를 말합니다. 삶이 제 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믿었기에 할렐 시편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 118편에는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 시도 할렐 시편에 포함시킵니다. 그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
이 시편은 찬양대가 축제에 참석한 회중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제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가면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주님의 통치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합니다. 찬양대는 이스라엘 온 백성과 아론의 집 곧 제사장의 무리,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소개된 개종자들을 찬양의 자리로 부릅니다. 찬양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삶의 어려움이 없기에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시련이 없기에 주님이 인자하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으며,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치 않는 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괴롭힐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고백은 기억 공동체에 속하여 있을 때 비로소 진실한 고백이 됩니다. 홀로 겪을 때 고통이 우리를 압도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겪을 때 고통은 상대화되게 마련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진다는 말은 통속적이지만 삶의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배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내가 홀로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다른 이들 역시 나 못지않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 때 비애는 줄어들고, 고통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여유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하나님이 베푸신 해방과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절기행사를 통해 그들은 조상들이 경험했던 구원의 감격을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맛보았습니다. 할렐 시편을 부르며 행진하는 이들은 당장은 해답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다”(시118:5).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곤경에 빠진 자를 건져 넓은 곳에 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 속에 머물 때 우리는 살아갈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됩니다. “주님은 내 편이시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사람이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으랴?”(시118:6) 이런 담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신학자인 알란 뵈삭은 느부갓네살이 만든 금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였다가 화덕 속에 던져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야기를 해설하면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불을 끄지 않으셨다. 그 이상을 하셨다. 하나님은 맹렬히 타오르는 화덕 속에 들어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계셨다. 그리고 그들은 순종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순종에 뒤따르는 신적 연대성의 기쁨을 발견했다“(Allan Boesak, , WCC, 1984, p.32). 이사야도 위험이나 시험을 없애주시기보다는 그것을 함께 감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들려줍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사63:9). 사랑과 긍휼로 구하여 주시고, 백성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시련과 괴로움은 쓰라리지만 우리는 그 모든 난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삶의 이유
이런 확신이 있는 이들은 세상의 위협 앞에서 위축되거나 뒷걸음질치지 않고 당당하게 선 사람이 됩니다. 시인은 10절부터 12절 사이에서 자기를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이들을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물리칠 수 있었다고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불의 혹은 어둠과 맞서 싸우지 않고는 이런 고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사는 이들은 이런 강건한 고백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런 반복된 경험을 통해 시인은 마침내 “주님은 나의 능력, 나의 노래, 나를 구원하여 주시는 분”(시118:14)이라는 고백에 이릅니다.

주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유월절 이야기의 핵심은 노예생활로부터 자유로, 애도에서 축제로, 모욕에서 존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그런 삶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주님은 죽음이 삶의 최종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셨고, 죽음을 넘어서는 참 생명을 우리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고통 앞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을 거쳐 기쁨에 이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인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시118:17)고 노래합니다. 삶의 이유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지금 세상 앞에 전할 삶의 이야기가 있는지요? 믿음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다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맛본 영적 자유로움을 증언할 수 있는지요?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온 순례자들은 이제 “구원의 문들을 열어라. 내가 그 문들로 들어가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시118:19)고 노래합니다. 그 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21:27).

순례자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118:22)는 고백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류 세계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들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8).

왜 그럴까요?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지금 아픈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벼랑 끝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형편에 처한 이들의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절감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괴감에 빠진 이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기에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으며, 연약한 이들의 벗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신 것은 그가 넘어진 적이 없는 강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절망을 넘어 희망에 이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의 신비나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주간 주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유대인인 카프란(Moredechai Kaplan)의 말이 제게는 큰 도전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회당에 들어올 때의 그 사람으로 회당을 떠난다면, 당신은 회당에 오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순절을 지나고도 여전히 옛 사람에 머문다면 우리는 사순절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도 오늘의 시인이 당도했던 신앙고백에 이를 수 있기를 빕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행보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에서 천대받고 잊혀진 이들 곁에 다가설 때 비로소 우리는 그곳에 주님이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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