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십자가를 수집하면서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얼굴처럼 풍부한 표정을 한 십자가들을 만난다. 한 뿌리이나, 수천 갈래의 십자가 모형 속에서 그 다양한 고백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벼룩시장에서 대개 자신의 상품 또는 작품 값을 올리려고 강조하는 뻔한 수작이 있다. ‘진짜(Original), 골동품(Antiquität), 손 세공품(Handarbeit)’과 같은 말들이다. 물론 중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으로 십자가의 의미와 값을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재질과 모양 그리고 표현이 서로 다른 것은 보는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메시지와 유난한 강조점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자기 십자가’(마 10:38)를 지고, “날마다”(눅 9:23) 따를 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바로 십자가의 구체성이다. 십자가의 모습은 십인십색(十人十色)이요,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모든 교회의 가장 전통적인 십자가 모습은 십자고상(十字苦像, Kruzifix)이다. 이런 모델을 가리켜 천주교회의 것이다, 개신교회의 것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분리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표현하려는 심미안이고, 예술적 솜씨이며, 고난의 영성이다. 조형과 도안에 있어서 뛰어난 미적 감각은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물한다. 무엇보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된 십자가 이미지들은 믿음의 차원을 각성시킨다. 상상력을 부추기고 선입견의 좁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오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 유럽인들의 십자가에는 고난의 개인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 구원의 특수성과 보편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사건 이래 수많은 화가들이 그렸다. 그 가운데 벨기에 안트베어프 미술관에 소장된 루벤스(1577-1640)의 대작 ‘창 찌르기’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안드레아 만테냐(1460년 경)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수난의 깊이가 진하게 전해져 온다.

  더욱 생생한 것은 자화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1606-1669)의 십자가 처형에 관한 연작(連作)들이다. 그의 작품 역시 잔혹한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특별히 십자가 아래 모여 있는 구경꾼들의 독특한 표정으로 더욱 잘 알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얼굴을 구경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는 중이다. “나도 거기 있었어요.” 사실 우리도 자주 렘브란트와 함께 그 자리에 서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들인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향해 <나를 따르라>(Nachfolge)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종교적인 위안과 자기도취에 빠지는 값싼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값비싼 은혜’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밖이 아닌 안에 존재하는 적(敵)을 가리켜 ‘싸구려 은총’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리스도가 한 인간을 부르실 때는 와서 죽을 것을 명한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합리적인 눈으로 십자가의 길을 쳐다본다면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그러나 ‘고난과 영광’으로 대비되는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나, 때때로 십자가를 무심히 바라보며 “나도 거기 있었어요”라고 실토하는 이들 모두 십자가의 팔 둘레를 벗어날 수 없다. 고난주간은 그 사랑의 무게와 은총의 둘레에 참여하는 기간이다. 나만의 무게와 고유한 느낌으로 내 십자가를 생의 의미로 삼을 수 있는 안성마춤의 기회가 될 듯하다.

▲ 'The Raising the Cross' 1633 by렘브란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