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의 이름은 셋으로 되어 있다.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스테첸코’. 이런 이름이면, 이름이 ‘알렉산드르’, 아버지 이름이 ‘빅토르’ 그리고 성이 ‘스테첸코’다. 상대를 존대해 부를 때는 성을 빼고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로만 부르는데, 이 긴 이름을 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러시아에서는 이름을 다 부르는 경우가 없다. 이름을 압축하고 다시 어미를 붙이면서 모두 재미있어 한다. 알렉산드르는 ‘사샤’, ‘슈샤’, ‘슈야’, ‘슈릭’, ‘산야’, ‘슈라’ 등으로 줄이고, 이중에서 본인이 원하는 이름을 불러준다. ‘사샤’로 불리길 원하고 나이가 어리면 ‘사샤치카’로 불러준다. ‘사샤치카’가 어린 ‘알렉산드르’인 것을 러시아 사람들은 다 안다.

학생 중 나탈리아라는 이름이 많았다. 줄이면 나타샤인데, 나는 그것도 부르기 힘들었다. 한국어를 배운 순서대로 나1(아딘), 나2(뜨바), 나3(뜨리), 나4(취뜨리에)로 부르자 했더니, 발상이 좋다며 재미있어들 했다.

제일 연장자였던 나1은 마흔 다섯을 넘긴 나이인데도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얼마나 열심인지 연세대학교 한국어교재를 깡그리 외웠고, 한 해가 지나자 설교를 번역했다. 매일 새벽 네 시까지 복습하고 아침 일곱 시에 공장으로 출근했다. 일년 반이 지나 연세대학교 한국어교사연수소로 보냈더니 마치고 돌아왔다. 발군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지만 새로 시작한 감리교회 교인이 되어 모든 것을 도왔다.

배우려는 사람은 늘었으나, 교재 한 권을 마치기만 하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국어가 좀 되는 듯싶으면 한국 식당으로, 회사로, 보따리 장사로 돈을 벌러 떠났다. 한국어를 잘 하면 더 큰 기회가 올 것이니 좀더 배우라 해도 막무가내로 떠났다. 고작 일이백 달러를 벌겠다고 떠나는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1이 열 살 정도인 고려인 꼬마 셋을 데려왔다. 한숨 짓고 있는 나를 보고서 데려왔다고 했다. 효과적이고 가장 빠른 한국어수업은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 부모들이 몇 차례나 아파트를 찾아와 궁금한 내 정체를 살피고 돌아갔다. 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가장 빠른 한국어 수업이 무엇인지를 갈파했던 나1의 말은 사실이 됐다. 아이들은 자라서 교회의 일꾼이 됐고, 한국어 교사가 됐을 뿐 아니라, 사물놀이와 고전무용단을 만들어 한국문화를 알리는 대사가 됐다.

나2의 남편은 러시아 화가였는데 암으로 고생했다. 아틀리에가 집이었는데 궁색했다. 암 말기였던 남편은 숨을 몰아 쉬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나2는 늘 말이 없었다. 세상 떠난 남편을 화장했다. 시 외곽 묘지에 묻는데 땅이 질퍽거렸다. 마른 땅에 묻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며칠 후 눈이 부은 채 나타난 나2는 펑펑 울어댔다. 떠나면 정리할 옷에 남편이 오천 달러를 넣은 것이다. 허리를 높게 졸라매고 숨을 몰아가며 그림 그렸던 남편이 생각났다. 나2는 그 돈을 안전하게 은행에 넣었다. 신생 은행 중 하나였는데, 돈을 삼킨 지 얼마 안 돼 파산해 버렸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2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3은 침착하고 영리한 러시아 여자였다. 나이 서른인데 혼인하는 게 어떠냐고 하면, 늦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나3은 건물 외벽 칠하는 일을 했다. 교인들이 합심해서 야간 교사양성소에 보냈는데, 몇 해를 어렵게 공부해서 수료하고 자격증을 땄다. 공장에서 학교 교사로 직장을 옮긴 나1을 따라서, 나3도 같은 학교 보조교사로 일했다.

우리는 나3이 학교에서 일하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환율이 폭락해서 교사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형편이 됐기 때문이다. 나3는 다시 건물 외벽을 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