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운영은 한해 동안 그럭저럭 됐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신생 사립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마냥 신기했다. 나도 무료로 한글을 가르쳐 보기로 했다. 러시아인과 고려인 합쳐 나이 든 사람들이 열 명 가량 모였다.
한국말을 조금하는 고려인도 있었다. 그들은 ‘-습니다’ ‘-요’가 아니라, ‘-지’ ‘-오/우’ ‘-은가/는가’, ‘-아이요’로 말끝을 맺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하는 말을 부끄러워했다.

나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 거기서 교육을 받았으니 표준발음에 자신 있었다. 뭐, 쓴 대로 읽으면 되지.
웬걸, 한국어 발음은 예외도 많고 원칙도 복잡한 걸 알게 됐다. 한국어는 어근에 형태소가 붙는 교착어(膠着語)라서, 자음으로 끝나는 어근이나 낱말에 어미, 조사, 낱말이 붙으면 발음이 복잡해진다.
억양 없이 소리 내라 하고, 짧디 짧은 동사 어간에 온갖 어미를 붙여가며 발음하라 하니, 학생들은 몸부림치며 따라 했다. 강조와 억양이 없으면 말 자체가 안 되는 러시아어 때문이다.

잘 가르치고 싶어 한국어 전공 책들을 읽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들을 구해 살펴봤다. 실전 대화가 많은 어느 대학교 교재로 가르친 적이 있는데, 영어 범벅인 말이 계속 튀어나오자 모두 난감해했다.
‘궁리한다’ ‘일없다’ 이런 말들은 죽이고, ‘유턴한다’ ‘풀가동 중이다’ 따위를 살려 말해야 한국어 대화를 잘 할 수 있다니. 멋쩍고 객쩍고 부끄러운 사람은 가르치는 나였다.

내게 힘이 된 것은 이오덕 선생의 책이다. 책을 보면서 그 동안 교회 강단에서 제대로 된 한국말을 사용했는지 반성 많이 했다.
이오덕 선생의 지론이다. 우리가 쓰는 ‘–(으)ㅂ니다’ 체가 표준어로 된 것은 언문일치를 내세우며 신소설을 썼던 일본 유학파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가타부타 말하기 힘들지만, 판소리를 들어보면 한국어 표준이라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4세대를 넘어가고 있는 고려인 중에서 한국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모국어를 잃었으니 정체성도 잃었다고 봐야 할까?
거꾸로 봐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한국어를 잃었던 고려인들은 지금 모국어를 회복하고픈 마음 간절하다. 단지 가르쳐줄 선생을 찾지 못할 뿐이다. ‘어떤 이유’란 이렇다.
고려인의 한국어 상실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1세대 자신들에서부터 시작됐다. 서슬 퍼런 스탈린의 명령으로 화물열차에 실려 낯선 중앙아시아에 도착했을 때, 삶의 기반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전혀 모르는 땅에 열차가 서고 문이 열리자 내렸다. 허허벌판. 그곳은 훗날 우슈토베(Ushtobe)라는 도시가 됐다. 카자흐스탄 남동 끝자락에 있다.
쌀농사를 잘 짓는 고려인의 습성을 알았던 소련 당국은 농사지을 땅으로 그들을 산개했다. 카자흐스탄 남부와 우즈베키스탄 여러 곳으로 배치해 농업 증산정책에 활용한 것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려인 피 속에도 부지런함과 배우려는 열정이 강하다.
콜호즈(kolkhoz) 집단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일상은 누구에게나 같았다. 고려인은 일터에서 돌아오면 텃밭을 일궜다. 거기서 나온 야채나 과일을 주말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모인 돈을 윗사람에게 찔러주고 자녀를 도시에 있는 대학교로 보냈다. 지정된 거주지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면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은퇴한 트레세비치 한국역사 교수가 말했다. 오래 전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모여 사는 곳에 가서 지냈다. 어느 날 이웃이 오더니 고려인 총각에게, 텃밭에서 키운 작물을 좀 주면 자기 딸을 ‘사랑’하게 해 주겠다 했다. 회상하며 웃어 젖히는 교수를 나도 따라 웃었다.

고려인 자녀들은 다른 민족보다 훨씬 많이 대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어가 세대간 빨리 단절되는 이유가 됐다. 물론 공공장소에서 러시아말만 쓰게 했던 소련 정부정책도 이유였다. 방학이 되어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아들 딸의 한국어도 가물가물해졌다.

일이 많고 음식이 부족하면 밥을 물에 말아서 해치워야 한다. 지금도 고려인 집에 가면 상 가운데 수북이 쌓은 밥을 놓고 자리마다 맹물 그릇을 놓는다. 국은 따로 있지만 각자 밥을 퍼 물에 말아 먹는다.
1세대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물에 밥 말아 먹어라.” 자식들은 점점 그 말을 할 수 없게 됐다. 대신 ‘밥’과 ‘물’에다 억양을 듬뿍 싣고, ‘밥이 물이’ 또는 ‘밥에 물에’라고 했다. 한술 밥이 아니라 풍성한 밥상을 차리게 된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먹는다.

고려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꾸준히 신문과 잡지를 발행했고 연극단을 운영했다. 알마타에서 살았던 박일은 생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지키려 애쓴 이였고, 고려인들의 어른이었다.
한국정부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 지도자들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한국방문 후 돌아와 뱉은 박일의 일성은 ‘남한에서 쓰고 있는 말이 한국어인가, 온통 왜놈 말이지’였다. 성재 이동휘의 손녀 루드밀라에게서 직접 들었다.

한국말이 다른 언어에 영향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는 중국어에, 언제는 일본어에, 지금은 영어 남용에 휩쓸리는 불쌍한 남한 말만 한국말이겠는가? 고려인들이 지키려 애쓴 사투리 가득한 옛말도 한국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