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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을 벗고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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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3월 03일 (일) 13:09:52 [조회수 :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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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을 벗고 보라

고후3:12-4:2
(2019/03/03, 변모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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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변모주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머무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간 전 세계의 이목은 베트남의 하노이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북미 정상회담이 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무너졌던 평화와 신뢰의 길을 복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때 선물처럼 이 땅에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다리던 모든 이들의 마음에 찬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길, 평화의 길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척박한 역사의 대지를 갈아엎고, 그 속에 씨를 뿌리고, 싹이 나지 않으면 움씨를 또 뿌리면서 끈질기게 버텨야 합니다. 이 민족의 가슴에 심어진 평화의 꿈이 한 여름 밤의 꿈처럼 허망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꿈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튼튼하게 자라게 할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을 앞둔 주일인 오늘은 ‘변모주일’입니다. 수난의 시간을 앞두신 예수님이 제자 셋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광과 수난은 모순된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날 제자들은 잘 안다고 여기던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잘 안다고 생각하던 이들의 낯선 모습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늘 교회에서 만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을 다른 곳에서 만났을 때, 특히 그들이 전문성을 발휘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났을 때 깜짝 놀라곤 합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은 달라 보입니다.

별일이 없을 때는 굳게 선 것처럼 보이던 이들도 곤고한 일을 만나면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사람인데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의지와 견결(堅決)한 인품을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내면에 축적된 빛과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들은 성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후광(後光)을 그렸습니다. 후광은 고양된 영혼을 나타낸 것인 동시에 그를 감싸고 있는 초월적인 힘을 가시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늘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곁에 머무시던 주님의 모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은 빛에 감싸인 채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미 수난을 예고하셨던 주님은 곤고하고 괴로운 날을 견뎌야 할 제자들에게 그런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힘을 공급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은 미구에 벌어질 우주적 파국 이야기를 전하기 전에 하늘에서 벌어지는 천상 예배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그 주위에 있던 금 면류관을 쓴 장로 스물네 명과 앞 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명, 그리고 천군 천사들은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과 그 찬양에 동참했습니다. 우주적 대합창입니다. 그 놀라운 비전을 공유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시련의 시간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비전의 사람들에게도 시련은 쓰리지만 그것이 곧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빛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하늘 예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5:16) 하고 명하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둠의 옷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13:12)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5:8)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우리도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서술(indicative)인 동시에 명령(imperative)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라고 말합니다. 발신인이 ‘그리스도’라면 수신인은 누구일까요? ‘세상’입니다.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나요? 세상에는 ‘이웃’은 물론이고 ‘피조물’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혹은 피조물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우리를 기쁨과 설렘으로 맞이합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 혹은 경고장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세상에는 그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어두워지고, 시름이 깊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잉크 삼아 영으로 쓰신 편지가 바로 우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편지에 적힌 내용은 무엇일까요? 구원 이야기 혹은 변화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자식이 빛의 자녀로 바뀐 이야기,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타적으로 변한 이야기, 절망의 심연에 갇힌 채 우울하게 살던 사람이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적개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대하던 이들이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환대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야기 말입니다. 교회사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의 향연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변화시키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속상해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변화되려 하지 않습니다. 굳어짐의 표징입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주신 까닭은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의 일꾼들은 땅만 바라보고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합니다(골3:1). 성경은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을 일러 ‘새 사람’이라 합니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골3:10) 끊임없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기 속에 고착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목표 혹은 방향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증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품어야 할 영원한 소망입니다.

∙대담한 처신
바울 사도는 이런 소망을 품고 사는 이들의 당당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고후3:12) 믿음의 사람들은 괜히 남의 눈치나 보며 지레 주눅이 들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갑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대담한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롬1:16)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이 당당함을 담대한 희망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3장 12절에 나오는 ‘대담하게 처신한다’는 구절은 4장 1절의 ‘낙심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당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요? 4장 2절이 그 대답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남에게 숨겨야 할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당당해집니다. 부끄러움이 없을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죄는 올가미가 되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죄를 짓는 순간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우리를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간교하게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들은 진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스가랴서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그의 동료들을 향해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슥3:8)이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를 앞서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근거는 지금 가시적인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8)

∙너울 말고 실상을 보라
바울 사도는 이런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너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과 만난 후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하지만 그 빛은 지속성이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모세가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얼굴에 너울을 썼다고 말합니다. 너울은 우리로 하여금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도 그 너울을 벗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빛’이건만 그들은 너울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8:1)고 말했습니다. 율법 조문은 알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보지 못할 때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너울이 벗겨져야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눈을 덮고 있는 비늘이 벗겨져야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선입견, 특권 의식, 자기 의의 너울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다른 교회에서 잠깐 목회를 할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느 주일 아침 허름한 옷차림의 젊은 사내 하나가 교회에 왔습니다. 교인들과는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지성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댕돌처럼 단단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그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교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제 귀에 들려왔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와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의 벗이 된 어떤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거칠지 않았고, 정말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듣고 있던 저는 그 사람에 대해 부쩍 궁금증이 생겨서 그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은 아까 왔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 그가 다시 교회에 왔을 때 내 눈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목회의 초창기에 겪었던 아주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이러다간 지금 이 땅에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참담해졌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자. 내 눈에 씌워진 너울을 통해 바라보면 하나님조차 왜곡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너울이 벗겨질까요?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3:16).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할 때  그 너울이 벗겨진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 운명이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는 것 말입니다. 경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자아의 동굴 속에 유폐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숨결을 받고 깨어나 새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분단의 질곡 속에 있는 이 나라가 참 가엾습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도움과 보호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롭게 열린 3월,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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