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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신앙정신과 그 현대적 의미한국감리교인은 누구인가?
성백걸  |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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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2월 26일 (화) 02:25:49
최종편집 : 2019년 02월 26일 (화) 02:26:07 [조회수 :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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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신앙정신과 그 현대적 의미

한국감리교인은 누구인가?

 

성 백 걸(백석대 교수/감리교역사와 신학연구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12:23-25)

 

 

1. 한국감리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 자기 정체성 확립의 빛으로

 

우리는 올해에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우리는 1백년 곧 한 세기에 한 번 오는 매우 의미심장한 영적이고 역사적인(spiritual and historic) “때”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옛 조선이 아닌 현 한국은 3·1운동과 그 정신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유와 인권, 정의와 인도(人道), 평화와 공존공영의 3․1정신에 바탕을 두고 옛 조선이 아닌 새로운 대한민국의 정부(임시)가 탄생했다. 현대 한국과 현대 한국인의 민족적인 정체성의 초석이 3·1운동 과정에서 놓였다. 자유독립과 정의평화의 대한민국의 길이 3·1운동을 통해 열린 것이다.

우리가 3·1운동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대한민국이 독립국임과 한국인이 자주민인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했고 또 그 온전한 실현을 향해 분투해온 역정을 오늘날 새롭게 계승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여기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3·1독립운동의 한 완성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치열하게 살아내려는 신앙과 역사의 생생한 삶의 자리라고 하겠다. 현재 큰 위기와 혼란에 빠진 한국감리교회의 어두운 절망을 헤쳐 가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와 세계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 요청되는 자기 정체성의 새로운 확립의 빛을 3·1운동의 심원한 역정에서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2, 삼천년 잠든 2천만의 생령을 깨우자

- 개화와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서 한국감리교회의 비전

 

19세기말 역동적으로 진행된 한국감리교회의 형성기는 조선왕조의 부패한 망국기와 겹쳐있다. 500년 지탱해온 나라가 해체되고 망해가는 과정이 어찌 순조롭고 조용했겠는가! 멸망의 발악이 있었고, 동시에 개혁과 혁명의 에너지가 폭발했다.

초기 한국감리교회 신앙공동체는 서양문명의 힘에 의해 중화질서가 무너지는 일대 혼돈 속에서 일어난 망국의 상황 속에서 개화와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출현했다. 교육운동, 교회운동, 의료운동, 문서운동 등 한국감리교회의 총체적인 선교운동은 복음신앙운동인 동시에 개화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근대 한국의 영적인 초석’(The Spiritual Founder of the Modern Korea)으로 3·1운동의 주역들과 교류하고 키워냈던 전덕기 목사는 ‘삼천리에 잠든 이 천만 생령들의 영혼을 일깨워 자유로운 활동의 나라’를 만들자는 큰 소리로 한국감리교회의 비전을 제시했다.

: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 너른 땅에 이 천만 생령들의 코 고는 소리 천지를 진동하여, 삼천년 깊이 든 잠을 누구라서 깨워볼까. 원수는 처처에 일어나서 잠든 사람을 보는 대로 사지를 결박하여 놓았으니 혹 그 후에 잠을 깰지라도 자유 활동은 할 수가 없도다. 이런 때를 당하여 누가 능히 요나와 요한같이 자기 몸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잠든 형제를 깨워 주리요.

누구든지 성신의 감화하심을 받은 자라야 할지니. 만일 성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의 힘과 이 세상 이치로 잠을 깨워주려 할 것 같으면, 그 육신의 든 잠은 깨울 수 있더라도 영혼의 든 잠이야 어떻게 깨 울 수 있으리오.…

그 원인을 상고하건대, 성경 말씀과 같이 깨지 못한 연고라. 그런즉 우리 청년회 회원들은 성신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깊이 든 잠을 속속히 깨어서 마귀 결박을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항상 거하여 평강한 복을 받기를 원하오며,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같이 자유활동과 좋은 사업을 많이 행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여기 보면 에는 세 가지 중요한 초점이 나타나 있다.

첫째, 전덕기는 당시 암울한 민족현실과 겨레의 갑갑한 상황을 삼천년이나 깊이 잠든 막막한 절망의 상태로 체험하며 파악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삼천리 넓은 땅에 이천만 생령들의 코고는 소리 천지를 진동하여 삼천년 깊이 든 잠을 뉘라서 깨어볼까”라고 토로한다. 삼천년이나 영혼의 잠이 깊이 든 상태, 그래서 전덕기를 비롯한 당시 한국감리교인들의 개화와 독립운동은 적어도 이 삼천년간 잠든 겨레의 정신을 흔들어 깨워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열겠다는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고, 지녔을 내적이며 우주적인 생명력, 활화산처럼 작렬하고 있는 영혼의 에너지를 같이 느끼며 전율치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국감리교회의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삼천리 산하와 천지우주를 진동시키고 삼천년이나 깊이 잠든 수천만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그 고요하면서도 활화산 같은 영혼의 생명력에 감화되고 동참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삼천년 역사의 지평을 가르며 그들의 생명과 영혼의 불꽃이 작렬하고 있었다.

둘째, 전덕기는 자신의 전도활동이나 민족운동을 단지 인간만의 일이나 이 세상의 이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한층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초월적인 하늘의 이치(법도, 섭리, 도리)와 성령의 기운을 체화하며 실현하는 성령운동으로서 자각 하고 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누가 능히 … 몸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힘을 다하여 잠든 형제를 깨워 주리요. 누구든지 성신의 감화하심을 받은 자라야 할지니. 만일 성신의 힘을 의지 하지 않고 사람의 힘과 이 세상 이치로 잠을 깨워 주려 할 것 같으면, 그 육신의 든 잠은 깨울 수 있더라도 영혼의 든 잠이야 어떻게 깨울 수 있으리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적이고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사회정치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영혼과 내적인 신령한 생명을 자각시키고 일깨워내야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겨레의 새로운 삶과 민족의 새 역사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성령의 소리와 감화를 받고 깨어난 생명은 삼천년 묵은 세월을 갈아엎고 수천 년 잠든 적막을 가르며 적어도 삼천년의 각성된 새 역사와 새 세상을 열기 위해 평화로우면서도 역동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전덕기는 “성신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깊이 든 잠을 속속히 깨어서 마귀 결박을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항상 거하여 평강한 복을 받기 원하며,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 같이 자유활동과 좋은 사업을 많이 행하여 보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여기서 그들이 펼친 각종 민족운동 활동과 사업이 성령의 자유 활동에 따른 선한사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3·1운동의 영적 의미와 한국감리교인들의 헌신

- 하나님 나라의 삶과 대한민국의 길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산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나라를 살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이다. 3·1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길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 길이 하나로 만나는 차원에서 옛 조선이 아닌 현대 한국의 새로운 역사 지평을 열어냈다는 의미에서 더욱 더 가치가 있다, 곧 현재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이 육적인 눈에 보이는 시공물질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눈에 보이는 영성의 영원한 세계에 심원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여기서 한국감리교인들의 신앙정신과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1919년 한국개신교는 교파와 종파의 벽을 넘어 천도교와 불교 등과 뜻과 힘을 모아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개신교의 교세는 1860년 최수운에 의해 출현하여 동학혁명을 일으킨 후 재흥하여 1백만을 교세를 말하던 천도교에 비해도 불과 30여년의 역사와 신도수 15-20만을 지닌 소수 종교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총인구 1천 6백-1천 7백만 중에서 1.5% 정도였다.

그럼에도 한국개신교의 3·1독립운동 참여는 아주 커서 준비와 모의와 전국화와 대중투쟁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대표였고, 서울과 지방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투옥된 수감자 중 25%가 기독교인이었다.

특히 여성기독교인들의 참여와 활동은 아주 각별했다. 전체 수감자 중 5%를 차지하고 있던 여성 수감자의 80%가 기독교인이었다. 거사가 은밀히 진행되어 폭발할 수 있었던 데는 여학생들의 연락 활동이 주효했다. 세브란스 의학부 대표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이갑성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특별히 우리나라 여성들과 같은 여성은 없다고 그때에 내가 단정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의논만 하였고, 결국 그것을 연락하고 시행하는 일인 가장 책임이 무겁고 위험한 일은 전부 여성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 여학생들은 일어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백번 죽어도 좋으니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때 비밀서류를 전할 때 남쪽에는 스물 미만의 어린 학생은 몸수색을 안 했기 때문에 괜찮았으나, 이북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로 가는 학생들은 아무리 어려도 몸수색을 하였기 때문에 남학생들은 갈 수가 없었고, 62명의 여학생들이 그 무서운 일을 다 해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한국감리교인들의 참여와 투쟁은 실로 놀라웠다.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중 9명이 이필주 목사, 신홍식 목사, 오화영 목사, 최석모 목사, 신석구 목사, 정춘수 목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박동완 전도사였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이 해주읍감리교회 전도사 정재용이었고,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박석훈 목사, 원산에서 원산중앙교회 곽명리 전도사와 이가순 전도사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 후 경기도 개성, 강화, 인천, 수원, 고양, 옹진, 충청도 천안, 공주, 아산, 강경, 대전, 충주, 강원도 원주, 춘천, 철원, 김화, 강릉, 양양, 고성, 통천, 평안도 영변, 태천, 진남포, 강서, 황해도 해주, 연안 등에서 한국감리교회와 학교와 신앙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끌었던 것이다. 유관순과 그 가족의 독립운동과 피해, 수원 제암리교회와 수촌교회의 방화학살 사건은 당시 한국감리교회의 참여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1919년 북감리교회 통계를 보면, 교회당 472개, 교인총수 35,482명, 목사 65명, 전도사 262명이었다. 남감리교회는 입교인 5,077명, 학습인 800명, 합계 5,877명이었다.

 

 

4. 3·1운동의 신앙정신과 그 현대적 의미의 빛

- 손정도 목사의 신앙운동과 독립운동과 선교운동을 중심으로

 

1) 손정도의 복음신앙운동 - 인류사의 새 생명으로!

 

여기서 망국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손정도 목사의 복음신앙운동과 독립운동과 선교운동을 성찰하면서 그 민족사적이고 인류 보편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자. 그가 태어나 자란 시대는 수백 년 지속한 조선 전통이 생명력과 창조력을 잃고 피폐한 상태로 떨어져 민족 전통의 변혁과 재창조가 이루어져야 하는 전환의 시대였다. 여기에 거의 전 세계를 장악한 서구 근대 제국주의의 전철을 밟은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떨어진 조국의 비극과 동양의 불행한 생활을 겪으며 저항하고 투쟁해야 했던 세기적인 대결의 시대였다.

바로 그때 손정도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과 민족구원, 그리고 인류평화의 빛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온몸으로 만나고 믿고 모시고 따른 예수님의 복음의 길에 전적인 투신을 했고, 거기에 조국독립의 길과 인류평화의 길을 융합하고 통합해내며, 아낌없이 인생의 불꽃을 살랐다. 낡은 조선 전통의 변혁과 어두운 근대 제국주의 극복의 길이 환하게 열렸다. 그렇게 이 땅에서 출현한 손정도의 한국 기독교 패러다임은 근대 제국주의와 얽힌 근대 기독교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서 인류 보편적인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지평을 열어낸 세기적인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초기 한국 기독교의 빛은 한국 전통의 변혁과 재창조와 함께 서구적 근대 제국주의의 비극을 넘는 민족사적이고 인류 보편사적인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다.

손정도는 1882년 7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오흥리에서 태어났다. 유교 선비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로서 입신출세하려고 했다. 23세 때인 1904년 관리채용시험을 보러 평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평양 근처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조 목사(?)에게 서구 근대문명과 기독교를 소개받고 마음을 바꿔 관리의 길을 포기하고 다음 날 상투를 자른 후 집으로 돌아갔으며 집 안에 있는 사당을 부수게 된다.

여기서 손정도가 조선 전통과 맺은 관계를 주의하여 파악해야 한다. 우선, 모든 인간은 전통의 물결 속에 태어나 그 전통의 생명을 호흡하며 자라난다. 그는 23세까지 조선의 전통 유교 선비 집안에서 과거 공부를 하며 성장한 유학의 서생이었다. 생각해보라. 한 인간이 20세 초반까지 성장했다면, 그의 정서와 세계관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한학의 훈도 속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정신세계는 동양적 혹은 유학적인 가치관으로 방향이 잡혀 있었다. 이 전이해는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계속 작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하는 데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한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1세대 개신교인들의 공통된 현상이며, 그들의 삶과 사상으로 표출된 한국 기독교 패러다임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구적 기독교 유형을 넘은 새로운 지평을 꽃피워 냈다.

그에게 전통은 상투를 자르고 사당을 부순 혁명적이고 전복적인 행위에서 나타나듯이 생명의 숨결이나 자유의 빛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억압과 부패와 질곡의 낡은 껍데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 전통 자체의 변혁을 통해 가부장적인 수직적 지배체제와 위력을 지니고 다가오는 서구 근대문명의 힘에 대응하면서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 내기에는 피폐하고 무기력한 상태였다. 조선 전통은 본연의 가치와 진리를 자기 초월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게 하여 새 시대를 책임지고 운용하기에는 절망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손정도의 전통혁명과전통전복의 행동이 일어났으며,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이 결정적인 생명력과 창조력을 제공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 감리교 무어 J.Z. Moore 선교사의 주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들어가 신학문과 기독교 진리를 공부하고 1908년 조만식, 선우혁, 김득수 등과 동기로 졸업했다. 그런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무렵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복음체험, 곧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고 획득하게 된다. 간절하게 찾고 있던 자기 내적 생명의 거듭남과 함께 절망에 빠진 조국의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체험 안에서 품게 되는 것이다.

손정도는 “외촌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나지막한 언덕 잔잔한 솔밭에 몸을 이끌었다. 어떤 탐스런 솔포기 뒤에 엎디려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를 얼마 동안이나 하였던지 밤을 새웠다. 또 혹은 귀 뒤에 하얀 눈이 치를 넘도록 쌓였다. 이는 다 기도를 그치고 일어날 때에 처음 안 감각이었다. 또 때로는 학교기도실에서 밤을 보내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길에 가나 방에 앉거나 오매 간에 광명한 종교적 정화의 세계를 찾기 위하여 또는 캄캄한 조선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살길을 찾기 위하여 쉬임 없는 기도이었다.” 그런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답답한 앞길의 광명을 찾으려고 애닳게 호소하던 나의 앞에는 신의 광명한 빛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상의 빛으로 빛났다. 인자하시고도 건실하신 구주 예수께서 자애 깊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임하셨다. 나도 흐득였고 그도 흐느끼셨다. 이 흐득임은 슬프거나 답답해서가 아니라 너무 감격하고 말할 수 없이 기쁜 그 극에서 정화된 눈물이다. 광명을 찾은 즐거움이오 앞으로 나아갈 그 길을 하도 애쓴 뒤에 발견한 기쁨에 넘치는 눈물이다.” 바로 손정도의 고백이다.

이어 그는 2천만 동포 구원의 환상과 함께 사명감을 지니게 된다. “나 자신 앞에 2천만의 남녀동포가 하나도 빠짐없이 죽 늘어선 것이 보였다. 즉 사망에 빠지는 그들, 죄악의 멍에에 차꼬를 당한 그들을 구원하고 해방함이 나의 책임이라고 보여줌이다. 그들을 보고 나는 또한 통곡하였다. 그러나 기쁘다, 미덥다, 할만하다고 생각됨은 만능의 구주께서 나와 같이 하시기 때문”이었다. “그 이튿날은 마침 주일이었다. 남산재예배당으로 향하고 올라갈 때에 자기의 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우묵우묵 오르고 내림을 느꼈다. 이는 2천만을 구원할 무거운 짐을 자기의 등에 진 까닭에 자기의 몸이 그만큼 중대함의 상징이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놀랍게도, 이것은 전덕기 목사가 ‘삼천리 땅에 이천만 생령들의 삼천 년 깊이 든 잠을 깨워 자유활동’을 하게 하자고 외친, 성령체험의 사명감과 상통한다.

아무튼, 손정도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체험의 핵심은 그의 생명이 부활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인류사의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데 있다. 그 새 생명은 개인사와 민족사와 인류사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며 새로운 삶의 세계를 열어가는 우주적인 생명력과 창조력을 지닌 하나님의 새 생명이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진리의 공선이 어떻게 인류의 맘에 비추어 그것을 변화하게 하며 새 생명이 되어 거룩함과 화평함의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는지” 온몸으로 보여주며 신앙운동과 독립운동과 선교운동을 전개했다.

 

2) 손정도의 독립운동 - 동양 평화는 오직 조선독립에!

 

손정도는 1908년 협성성경학원 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에 들어갔고, 1910년 5월 중국 북경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1912년 3월부터 봉천 북방과 하르빈 남방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 신민회의 안창호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선교운동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신민회는 대한제국이 강제합병 당한 후 실력양성운동, 독립무관학교 설립, 해외 민족운동근거지 확보 등을 위해 긴밀히 움직이다가 일제의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 조작에 걸려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손정도는 2백여 명의 교우가 생겨 하얼빈 공원가에 2층 예배당을 건축했고 동포를 위한 공동묘지도 마련했다. 그런데 그는 1912년 7월 하얼빈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동포 90여 명과 함께 체포되는데, 일제의 간계인 가츠라 암살음모사건에 주모자로 걸린 것이다. 하얼빈은 3년 전에 안중근이 이토오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었다.

당시 러시아 “희랍교회 신부는 재감 중에 있는 목사님을 방문하여 설유說諭 하는 말이, 지금 피금被禁 중 한인 전부를 일영사관으로 옮기라 하니, 당신은 기독교 목사니, 우리 교회로 입교할 것이면 보호하여 일영사관에 옮기지 않겠노라 하였다. 목사님 대답에, 나는 한국 기독교감리회 파견 목사로 당지에 주임하고 있으며 전도하노라. 귀 교회로 갈 수도 없고, 나는 일본영사의 취체 取締 하는 죄가 없으니 귀 신부는 염려하지 마시오”라고 대답했다.

그 뒤 일본 영사관으로 이송되어 3개월 동안 취조를 받으며 “거꾸로 매달고 코에 고춧물을 붓고, 죽편혁편으로 난타도 하며, 어떤 때에는 결박하여 꿇어 앉힌 몸에 죽편 맹타와 죽침 화침질하는 악형”을 당했다. 손정도는 그 모든 고통을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할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나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없는 죄를 거짓말로 있다고 못 하겠노라. 너희는 나의 육신을 죽이나,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영원한 천국에 영접하신다”는 강인한 영생신앙으로 이겨냈다. 그는 경성 조선총독부 경무부로 압송되어 다시 생사를 오가는 고문을 받는 가운데 “두려워 말라. 내 너와 함께 하리니”라며 눈물을 흘리고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했다. 그리고 “북쪽 멀리 하얼빈에서부터 서울까지 아홉 번이나 죽었다가 겨우 피어났다는 악독무도惡毒無道 한 왜정 倭政 고문의 정황”을 증거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려 했다는 죄목이 첨가되어 있었다. 그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은 이후 손정도의 육체에 계속 고통을 주었고 그의 생명을 단축했다.

여기서 손정도와 일제와의 대결 실상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그에게 가해진 고문과 악형은 일개 경찰 끄나풀의 악행을 넘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이었으며, 더 나아가 전 지구의 80%를 장악하고 있던 근대 제국주의의 세력이 가한 폭행이었다. 그것은 세계 1, 2차 대전을 일으키며 전 인류를 파괴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암흑의 세력이기도 했다. 그는 그 어두운 세력을 이겨내고 민족독립과 인류평화 세계를 밝히는 사랑과 생명의 빛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손정도에게는 고구려인의 기상과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 같은 조선인의 이상형이 살아있었고, 그의 생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로 만나 새로운 한국 기독교인의 패러다임으로 출현했다. 장사씨름대회에서 우승하여 황소를 탄 경력의 그였다.

1912년 11월 1년간 진도 유배형을 받은 손정도는 1913년 11월 5일 유배에서 풀려났다. 진도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는 1914년 6월부터 서울 동대문교회 목사로 1년간, 다음 해 4월부터 정동교회에서 3년 동안 목회하며 2천3백여 명의 큰 교회로 부흥시켰다. 그의 학생 교우였던 유관순이 보여주듯이, 이 기간 손정도의 목회는 신앙운동이요 동시에 민족독립운동의 외침이었다. 바로 현순과 손정도 등의 복음운동과 민족운동이 일궈낸 바탕 위에서 1919년 3·1운동이 가능하게 된다.

그는 1918년 6월 미감리교연회에서 신체의 병을 이유로 1년 휴직하고 평양으로 이주한 후 신한청년당에 가입했다. 1919년 1월 의친왕 이강 공과 하란사의 파리 평화회의 참가를 준비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했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현순 목사와 같이 임시정부 조직에 나서 4월부터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일했다. 1920년 1월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했으며,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원동 임시위원회를 설립했다. 1921년 8월 임시정부 임시국무원 교통 총장, 1922년 11월 한국 노병회勞兵會노공 부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미주 한인들은 특히 독립자금으로 상해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손정도는 민족의 살길이 오직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유하는 독립에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평화의 관건이 조선의 독립에 있다고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했으며, 여기에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이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독립과 국민이 가져야 할 민족주의를 부르짖고, 신앙자유의 용기로 화평한 복음을 전하며 진리와 정의로 선한 싸움을 싸워보리란 결심으로 하나님께 약속”하고 투신했다.

 

3) 손정도의 선교운동 - 근대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넘어서!

 

손정도는 상해임시정부운동에서 다시 만주선교운동으로 돌아왔다. 1924년 9월부터 미감리교길림신첩교회 목사로, 1926년부터 길림교회와액목현額穆縣 교회를 겸하여 시무하며 동포들을 돌보았다. 1927년 1월 김일성을 만나 육문중학교를 다니던 그를 도와준 일화는 유명하다. 1927년 2월 안창호 등이 길림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자, 20세기 중국의 거목인 북경의 장학량을 만나 석방시켰다. 그때 손정도는 액목현에 토지를 구하고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으며, ‘농민호조사’ 農民互助社를 설립하여 동포들의 자립을 도모했다. 길림의 상황이 악화되자, 1929년 가족과 함께 봉천을 거쳐 북경으로 옮겼다. 그의 건강은 고문 후유증으로 밤잠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1931년 2월 19일, 북경에서 항일운동을 협의하려고 길림으로 온 직후 여관방에서 임종을 지키는 사람 하나 없이 많은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식민지 만주국을 세웠다. 농민 호조사의액목현 농장도 만척회사에 몰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으로 함몰되어갔다. 그런데 우리는 손정도의 만주 선교운동이 근대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넘어서 인류 평화의 큰 비전을 지니고 전개되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현대가 직면한 큰 죄악으로 계급주의와 자본주의와 유물주의를 지적했으며, 인류의 죄악이 결국은 전쟁의 비극을 겪게 한다고 보았다.

그러면 어떻게 평화와 생명 세계를 실현해갈 수 있을까? 그는 아주 독특한 사랑과 평화사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인류 보편사적이고우주사적인 의미와 가치가 환히 보인다. 천지 우주 만물과 인간들이 자기중심을 지니고 충돌하지 않으며 조화롭게 살도 창조되었는데, 그 생명의 중심이 바로 ‘서로 살리는 사랑’이다. : 곧 “사람은 자신 自身 과 외신 外身 이 있습니다. 외신은 부모 처자로부터 세계 인류까지, 그리고 일월성신까지 이르는 무궁무진한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외신과 서로 사랑하고 돕지 아니하면 세계는 한시라도 유지되지 못합니다. 만일 태양이 그 빛을 잃으면 땅이 곡식을 내지 못하고, 물이 맛을 내지 못하면 세계는 망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면 자멸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천하 만물의 중심을 가지고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만물이 그 중심을 잃으면 공중의 무수한 별들이 피차에 부딪혀서 망하는 것 같습니다. … 세계 모든 사람은 서로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서로 부딪쳐 멸망하지 않고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 피차에 덕으로 행하고 서로 도우면 공덕 公德 이 됩니다.” 실로 놀라운 통찰이다.

그런데 인간 생명의 중심은 곧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믿음이다. 이 생명의 깊은 중심인 산 믿음을 상실한 데 인류 충돌과 전쟁 비극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을 믿는 생명의 중심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 된 불행한 인격을 정의롭고 행복한 인격으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나님을 아는 맘이 그 생명 속에서 발아되고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에게 만물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 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라고 했다.

손정도는 그 사랑의 길과 평화 세계를 새로 연 구원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다. 그는 “지방이 지방을 다투며, 나라가 나라를 다투며, 민족을 황색·흑색·백색으로 분간하고, 동쪽과 서쪽으로 분간해서 이처럼 야단스럽게 물고 늘어져 서로 눈을 부릅뜨고 칼을 겨누며 서로 대포를 겨누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 너희들이 가지고자 하는 것이 너희가 죽이는 사람보다 더 귀하며, 더 친하며, 더 아름다우며, 더 보배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 … 악하고 어두운 세계를 철창으로 질그릇처럼 부스러뜨리듯 하고 평화의 세계, 즉 사랑의 세계를 짓고자 하노라”라는 큰 비전으로 투신했다.

그는 고백한다. : “이 세상에 전쟁을 억누르고 평화를 얻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음부의 권세를 근본적으로 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 와서 깨달은 사람마다 자기 몸을 희생해서라도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자 했습니다. 공자도 그런 사람이고 석가도 그런 사람이고 모하메드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함에도 많은 효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고 음부의 권세를 멸한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초점이 나타나 있다. 사망의 권세와 전쟁의 세력을 극복해온 효력으로 유교의 공자와 불교의 석가와 이슬람의 모하메드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를 멸한 결정적인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되고 있다. 여기서 종파와 벽을 넘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대의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며, 손정도를 비롯한 당시 한국감리교인들을 이것을 독립운동에서 보여주었다.

실로, 손정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생명 안에서 인류 우주사의 새 생명으로 꽃 피어나기를, 동북아시아의 평화 질서를 세우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실현하기를, 종교전쟁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우상과 망상과 허상을 깨고 인류의 평화와 사랑의 세계를 여는 예수 생명화의 복음선교를 실천하기를 간절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한국감리교회가 새롭게 품어야 할 3·1독립운동의 신앙정신과 그 현대적인 의미의 한 빛이 있다.

 

 

5. 평화통일의 씨를 피땀 흘려 심는 사람들

- 3·1운동 창조적 계승과 한국감리교회의 사명

 

또한 한국감리교회가 지니고 있던 3·1독립운동의 신앙정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1분인 신석구 목사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역사현실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각오로 독립운동에 임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천고에 씻지 못할 치욕. 경술합방도 불과 10년에 일본 관리와 조선 주구배의 탄압으로 민족의 사상은 점점 사그라져 감을 볼 때에, 이 모양으로 30년만 경과하면 민족정신은 아주 소멸될 듯한 감이 있어 근심은 깊어가나, 전도가 망연히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각에 곧 뜻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믿지 아니하였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어느 형제가 나에게 말하기를, ‘어떤 선생님 말씀이 시기상조라 합디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오,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하였다.…

그때 특이한 것 두 가지를 기록한다. 1은 단결이다. 그 때 세 종교 단체 외에 경성시내 중등 이상 공사립학교 남녀 학생들에게 다 연락하였으되 정각까지 비밀이 탄로되지 아니한 것은 그 단합된 정신이 어떠하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2는 희생적 정신이다. 그 때에는 33인은 물론이거니와 삼척동자까지라도 애국심이 충일하여 생명을 불구하고 돌진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밀알 하나’ 말씀처럼 자신이 독립을 위해 죽으면 자식 삼남매의 마음속에 만이라도 민족독립의 정신을 심을 터이니 족하다는 신앙의 말이다. 여기서 오늘날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감리교인들이란 바로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의 씨를 피땀 흘려 심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독립과 평화와 통일의 길이 힘겨운 고난의 길만은 아니다. 신석구 목사의 옥중투쟁과 영적인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과 바꿀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참된 신앙인이 누리는 아름다운 환희의 삶을 들려주고 있다. :

“경무 총감부에 구류되었다가 1주일만에 서대문 감옥에 이수되어 독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세간의 모든 복잡한 생각을 다 포기하고 다만 묵도하는 중 영혼을 예비하고 앉아 있으니까, 감방이 나에게는 천당같이 아름다우며 자나 깨나 주님께서 늘 내 우편에 계심을 든든히 믿음에 말할 수 없는 환희 중에 잠겨 지냈다. 나는 40여 년 신앙생활 중 그때 5개월 간 독방생활 할 때 같이 기쁨의 생활을 한 때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기연회 지역인 ‘제암리교회와 수촌리교회 방화사건’의 현장을 방문해서 참상을 세계에 알렸던 수원지방 노블 감리사의 보고에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 “3월 1일부터 조선독립운동이 시작된 후로 교회를 심방하기에 불능한 것은 선교사들이 회당을 심방한 후에는 순사의 조사가 막심함으로 9월 1일까지 교회시찰하기가 곤란하였습니다.

목사 5인과 인도자 13인이 수감되었고 교인 13인이 일병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 52인이 없어졌습니다. 그 중 목사 3인은 놓여나고 1인은 보석으로 나왔습니다. 남양과 제암과 오산 구역의 7개 교당이 일병에게 파괴를 당하였고, 그 근방에 329개 가옥이 불탔고, 1,600인이 거처할 곳이 없게 되었고, 그 지경에 참사자의 수를 분명히 알기 어려우나 믿을만한 통지에 의한 즉 신자와 불신자를 합하여 82명이라 합니다.

피소된 회당 3처는 다시 건축하였고 기타 3처 회당은 건축 중입니다. …

제암회당에서 일병에게 피살된 자가 23인이나 되는 고로 금일까지 참배자는 여하히 변고를 당할까 무서워하는 중에 있으며, 이 지경 신자 334인 중에 173인은 혹은 피살 혹 피수 혹 도피하였나이다.

제암지경에 있는 교인들은 생각할 수 없는 변을 당하며 악형과 총검의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어느 때나 올 터인즉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 예수께 전심 참으로 충성하겠다.’ 하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 말라 일병이 또 올까 두렵다.’ 함으로 이것이 어렵습니다.”

 

곧 우리는 “제암지경에 있는 교인들은 생각할 수 없는 변을 당하며 악형과 총검의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어느 때나 올 터인즉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 예수께 전심 참으로 충성하겠다.“다는 대목에 더욱 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죽음의 참상과 방화의 잿더미에서도 불사조처럼 독실하게 솟아난 아주 돈독하고 놀라운 신앙고백인 것이다.

생사를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신앙으로 사랑과 평화와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오로지 걷는 성도의 삶, 이것이 경기연회 지역의 감리교인들이 독립운동의 역정에서 온몸으로 보여준 복음생명의 진리이다.

 

여기 3·1운동의 신앙정신과 한국감리교인이 지녀야 할 자기 정체성의 언제나 새로운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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