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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구감독회장이 퇴진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돈을 쓰게 만드는 현 선거법을 완전 폐기해야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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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2월 20일 (수) 14:52:40
최종편집 : 2019년 02월 22일 (금) 23:13:28 [조회수 : 4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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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8억원까지 요구 받았다”는 주장은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돈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 선거법을 완전 폐기해야한다”는데 있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조롱할 때 즐겨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한번 속는 것은 속이는 사람의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세 번 속으면 공범이 되고 네 번 속으면 공멸 한다”

 

1. 최고 8억원까지 요구 받았다

“2013년 9월24일 오전, 결심의 증인으로 총특재에 출석한 강문호 목사가 재판정에서 지난 감독회장 선거운동 기간 중 감리회의 40여개 그룹들로부터 적게는 4천만원에서 보통 1억, 많게는 8억원까지 금품을 요구받았다고 폭로했다. 감독선거의 영향 때문에 국내 11개 연회마다 목사 그룹과 장로 그룹이 각기 양측으로 나뉘어 4개정도씩 형성되어 있는데 도합 40여개의 전국 그룹들로부터 선거운동 기간 내내 금품과 향응을 요구 받았을 정도로 감리회의 지난 감독회장 선거가 온통 돈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 모든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면 이번 선거에서 최소한 20억원 정도는 썻어야 했음을 의미했다. 강문호 목사가 증언하는 동안 재판정에는 충격으로 탄식이 흘렀다”(2013년 9월 23일 당당뉴스 기사 중에서)

오래 전 사건을 다시 들춰내는 까닭은 그때나 지금이나 감리교회의 감독회장 선거판은 단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법원이 선고한 감독회장 선거무효판결은 2013년 전용재 감독회장 선거재판의 데자뷔(deja vu)다. “최고 8억원까지 요구 받았다”는 충격적인 주장으로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지나친 과장이라는 비난 속에 안타깝게도 그가 주장했던 핵심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것은 단순한 폭로가 아닌 “돈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 선거법을 완전 폐기해야한다”는 데 있었다. 연회감독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선거운동원을 운용하고 유권자들을 만나 밥만 먹어도 2억 이상의 선거비용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장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조롱할 때 즐겨 인용하는 격언이 있다. “한번 속는 것은 속이는 사람의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세 번 속으면 공범이 되고 네 번 속으면 공멸 한다”

 

   
 

 

2. 전용재감독회장과 전명구감독회장

2013년 7월, 감리교회가 5년 만에 치룬 감독회장 선거에서 전용재목사가 당선되었다. 같은 해 9월 제30회 기감 총회특별재판위원회는 “전용재후보자를 당선자로 결정한 것은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판결했다. 이후 1년여 동안 사회법에서 직무정지, 직무대행, 직무복귀 등을 반복하며 지루한 법정다툼 끝에 전용재감독회장과 고소인 신기식목사는 부정선거인정과 대승적 개혁을 전제로 소취하에 전격 합의한다(2014년 12월). 차점자였던 김충식목사를 장정개정위원장으로 해서 개혁입법을 추진키로 하고, 2015년 6월 개혁특별위위원회를 만들고 자칭 감리회대수술지도 마련해서 장정개정위원회에 개혁입법안을 제안했지만 장개위 논의과정에서 대부분 채택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듬해인 2016년 2월 개특위는 17개월 만에 해단했다.

같은 해 9월 27일에 열린 감독회장 선거에서 전명구목사가 감독회장에 당선된다. 하지만 선거무효 및 당선무효 소송이 제기되어 총특재를 거쳐 사회법에서 직무정지, 직무대행, 직무복귀를 거듭하다가 결국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전명구목사의 감독회장 당선이 무효임을 선고했다. 지난 두 번의 감독회장선거에서 동일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두 번 모두 금권선거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금권선거로 인해 사회법의 판결을 받았다. 전명구감독회장의 측근이 즉시 항고의사를 밝혔고 많은 사람들은 이제 지루한 법정다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겉으로는 항고를 진행하면서 속으로는 밀실야합을 통한 대타협(?)을 동시에 추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상을 넘어 이처럼 확신하는 확실한 근거가 따로 있다.

 

3. 사무국총무 지학수목사의 책무

2013년 전용재 감독회장에서 2016년 전명구 감독회장으로 바뀌었지만 그 과정 속에 우리가 주목해야할 인물이 한 사람 있다. 얼마 전, 성모목사의 소취하를 조건으로 소위 공정한 인재선발이란 대대적인 이벤트를 통해 사무국총무로 당당하게 선출된 지학수목사다. 전감목에서 활동하다가 신기식목사의 소송을 도와 전용재감독회장 당선무효소송에 일조했다. 그 후 감리교선거백서 등을 만들고 바른감독선거협의 총무로 활동하다가 전명구감독회장에 의해 발탁되어 백만전도운동본부장을 거쳐 사무국총무에 선출된 신출귀몰한 인사다.

전용재감독회장 시절 금권선거를 폭로하는 공격수에서 이제 전명구감독회장의 금권선거를 보위하는 수비수로 포지션이 전환되었다. 지금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행보를 살피건대 현 국면을 돌파하는 방향을 결정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전용재감독회장 때처럼 정치적 야합을 선택했던 전철을 밟지 않길 바란다. 금권타락선거라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전략을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설령 전명구감독회장의 다른 측근들이 고소인과의 암거래를 통한 담합을 시도하더라도 이를 막는 일에 앞장서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야합을 통한 미봉책은 단순히 감독회장 자리보전에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 감리교회가 금권선거의 범죄를 참회하지 않은 채 또 다시 금권선거를 반복해서 제2, 제3의 저주받은 감독회장 당선자를 만드는 참람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전명구감독회장의 즉각 용퇴를 간언하는 충신이길 부탁한다. 그것만이 모두 사는 길, 감리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길이다.

 

4. 전명구감독회장은 퇴진하라

십년이 넘도록 감독회장선거사태가 이어지는 진짜 이유는 선거브로커들과 정치몰이배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감리교회가 금권선거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까닭이다. 필자는 2016년의 대타협 아니 대야합을 통해 개혁특별위원회가 발족할 때 진정한 감리교회의 개혁은 전용재목사와의 ‘개혁합의’가 아니라 전용재목사가 ‘죽는 것’(금권선거로 처벌받고 그 직을 상실하는 것) 자체가 감리교회의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시 개혁을 미끼로 혹세무민 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당선무효에 관한 쟁송이 진행되면서 다시금 대타협을 가장한 밀실야합이 벌어진다면 다음번 감독회장선거에서도 동일한 금권선거가 계속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감리교회가 사는 길은 진정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길 외에는 없다. 회개하는 깊이만큼만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명구감독회장은 이번 판결을 수용하고 금권선거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함이 마땅하다. 그것이 감독회장으로서 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마지막 사명이다.

금권타락선거로 인해 당선무효소송에 휘말렸던 감독회장이 스스로 금권타락선거를 자백하기란 죽기보다 힘든 일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손쉬운 일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교회재판이나 세상법정의 심판은 정치적 담합이나 막대한 변호사비용으로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다. 하지만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대는 결단코 피해 갈 수 없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 앞에 섰던 나단의 심정으로 권한다. 감리교회의 최고지도자를 향한 변방에 이름 없는 후배목사의 쓴 소리를 수치스럽게 여기기 전에, 오늘의 혁신과 내일의 희망을 위해 부디 감리교회 앞에 스스로 거룩한 희생 재물이 되길 진심으로 권면 드린다. 당장은, 개인적으로 견디기 힘든 수치와 멸시일지 모르지만 장차, 교회적으로는 금권타락선거로 실추된 감리교회의 권위가 회복되는 순간이요 감리교회가 진정으로 거듭나는 존귀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피 흘림 없이는 결코 죄 사함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결단하는 순간, 주님께서 부활의 살 길을 여신다. 이것이 감리교회의 최고지도자가 구차하게 연명하기보다 대장부답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정공법을 선택하길 바라는 이유다.

 

   
 

 

5. 이철목사의 자업자득(自業自得)

이번 선거무효판결에서 이철목사의 후보자격을 문제 삼은 지방경계문제에 대한 사회법의 판결을 존중하지만 결코 동의할 순 없다. 강릉에서 만16년 동안 목회해 온 필자는 사건의 내막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문제가 된 강릉중앙교회의 이전은 지방경계법이 제정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소급적용은 부당하다. 무엇보다 지방을 분리할 당시, 이후에 교회이동은 자율에 맞길 것을 합의해서 서면으로까지 기록해 두었다. 이제 와서 부당함에 대한 때늦은 항변 따위를 하려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강릉남지방 경계문제로 벌어진 모든 사태의 결과는 당사자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강릉남지방의 경계문제가 일어난 발단은 2년 전 열린 지방 감리사선거에서 비롯되었다. 2006년도 강릉지방이 남북으로 분리했던 이유도 감리사 자리 하나를 더 확보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지방경계논란의 근본원인도 따지고 보면 ‘선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지방감리사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한 후보가 경계를 넘어간 다른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서 지방경계법을 문제 삼았다. 십년이 넘도록 아무도 문제 삼지 않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비루한 짓거리를 벌인 이유도 역시 그 잘난 ‘선거’ 때문이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더 가관이다. 지방경계문제를 제기한 측은 지난 감독회장 선거에서 같은 지방에서 출마한 이철후보가 아니라 협성대 동문이던 전명구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 했다가 미운 털이 박혔다. 강릉남지방은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강릉 모(母)교회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감리사로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이철목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감리사후보를 잡기위한 궁여지책에서 불거진 일이다. 공교롭지만 제3의 후보였던 필자는, 비루하게 다투지 말고 3명의 후보자를 놓고 제비뽑기 방식으로 감리사를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제비뽑기 선출방안은 보기 좋게(?) 묵살되고 거부됐다. 다수의 표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은 공산당 선거처럼 공개거수투표를 통해 ‘호선에 의한 다수결 투표방식’을 밀어붙였다.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평화로운 방법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힘을 과시하는 폭력적인 투표방식을 선택했다. 결국 이 문제가 발단이 되어 훗날 이철목사를 직무대행에서 낙마시킨 결정적인 사유로까지 엉뚱하게 불똥이 튄 것이다. 지난번 선거에서 후보자격 조차 없었던 이로 전락시키는 억울한(?) 상황까지 연출되고 말았다. 만일 2년 전 강릉남지방 감리사선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묻는 ‘제비뽑기’를 선택했다면, 강릉남지방의 지방경계 문제처럼 말도 안 되는 일로 벌어진 사달은 아예 일어나지 조차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6. 감리교회가 다시 사는 유일한 길

다 지난 일을 장황하게 다시 들춰내는 이유가 있다. 나 자신이 제비뽑기를 주장했던 감리사후보 당사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누누이 밝힌 대로 사람들에 의해 투표로 뽑히는, 돈에 의해 결정되는 감독선거제도의 폐지를 십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했기에 감리사 같은 직책 따위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비뽑기>와 <투표에 의한 선거>의 차이가 무엇인지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제비뽑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을 구하는 선거방식이다. 이와 달리 후보자를 세우고 지지를 얻어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제비뽑기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께 결정권을 주지 않고 ‘내가’, ‘우리가’ 스스로 뽑는 결정하겠다는 데 숨겨진 속셈이 있다. 투표에 의한 선거방식의 본질은 ‘하나님의 결정을 믿을 수 없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결정권을 가로채서 벌어지는 선거후유증은 강릉남지방에서만 벌어진 에피소드가 아니다. 감리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선거판에 해당하는 일이며 현재 벌어지는 감리교선거사태를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번 선거무효판결에 반대하며 법원에 선처를 구하는 연회감독들의 성명서를 보면서 교회지도자들의 안이한 현실 인식에 다시금 실소와 탄식을 금할 수 없다. 탄원서에서 감독들은 “감리회가 더 이상의 혼란과 분열로 인하여 사회적 신뢰를 잃고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극심한 혼란을 경험한 직무대행체제 보다는 전명구감독회장 체제가 감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직무정지 가처분을 기각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한다”고 읍소했다. 감리교회의 혼란과 분열로 사회적 신뢰를 잃은 것과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결정권을 가로채서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는 저주받은 금권선거 때문이다.

 

   
 

 

7. 부담금납부 거부운동을 제안하며

과연 전명구감독회장이 퇴진하는 용단을 내릴까, 과연 선거프로커들과 정치꾼들이 모략을 멈출까, 어쩌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편이 더 빠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두 번 다시 속지 않는 것이다. 지상명령인 전도를 앞세우고 개혁이라는 미명에 속아서 지금 당장의 허물을 회개하지 않고, 개혁을 엿으로 바꿔 먹는 농간에 속아서는 안 된다. 더 이상 감리교회가 알량한 투표권을 돈으로 매수해서 사람의 머리 숫자로 하나님의 결정권을 가로채는 악행을 거듭하도록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제 모든 감리교회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결정권을 세우는 싸움에 함께 나서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부담금 납부거부’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패악한 지도자를 징벌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지난 세월 금권선거로 병든 감리교회의 실상은 실로 처참하다. 지역의 교회들은 아사(餓死)직전인데 교회지도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잔치를 벌일 생각만 하고 있다. 감리교회의 정책을 담당해야 할 본부직원들은 A4용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업무를 수행하며 점심메뉴선정에 몰두한다는 조롱을 듣고 있다. 비등해진 감리교본부개혁의 여론에 밀려 2020년까지 본부직원감축을 장정에 까지 넣을 만큼 심각한 재정압박 속에서 오히려 임시직을 정규직으로 불법적인 충원까지 감행하고 있다. 감리교회가 선교역량을 상실한 것은 2년 마다 감투싸움에 선교적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까지 썩어버린 감리교회를 개혁하는 길은 고사(枯死)시키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금권선거의 악행이 계속 불타오르는 것을 권력욕, 명예욕, 물욕에 눈먼 불나방들만 탓할 게 아니다. 그들이 멋대로 활개 칠 수 있도록 속절없이 장작을 던져 주고 있는 우리들의 무지와 무관심이 더 크다. 언제까지 주님께 드려진 귀한 헌물이 자기안위를 위한 막대한 변호사비용으로 지불되는 것을 두고 봐야 한단 말인가, 이제 개체교회마다 지금까지의 악행에 동조한 것을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가 맺어야 할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 돈으로 세워진 종교권력이 더 이상 멋대로 헌금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향후 2년간 부담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감리교본부는 반드시 고사(枯死)한다. 그 지경이 되어야 비로소 살 길을 찾아 회개의 길로 나서게 될 것이다.

 

에필로그. 가시와 찔레, 전갈 가운데 거할찌라도(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

감리교회의 개혁에 대한 붓을 꺾고 두문불출한지 어느새 5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예배당을 건축하고 책도 쓰면서 목회에만 전념하노라고 핑계했지만, 사실은 갈멜산의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무력감으로 절망한 채 로뎀나무 그늘 아래 고개를 숙인 엘리야의 뒷모습 같은 부끄러운 실존이었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순전히, 요즘 읽고 있는 ‘에스겔서’ 때문이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회개를 촉구하라’, 말씀을 읽는 가운데 거부할 수 없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고 싶어서 억지로 순종할 따름이다. 믿거나 말거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를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에스겔3장16절~21절)

 

동영상 : '가시와 찔레, 전갈 가운데 거할찌라도' 에스겔33장 [김명섭목사의 말씀학교]

https://youtu.be/RnQN8LTPfto?list=PLEFWZJfo_nlHrGcYqgzGT13uSyEBwfl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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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182.221.41.246)
2019-02-21 07:13:34
돈선거는 미친짓이다!!!
거룩한 교회의 적, '금권타락선거' 척결해야


나는 지난 6년 동안 감리교사태 이전으로의 회귀를 정상화라고 여기는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번 선거에도 공개적인 불참을 선언했다. 금권타락선거의 연속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선거방식과 총회구조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사도성, 보편성, 거룩성의 빛에서 볼 때 정상적이지 않았다.


① 사도적인가? 사도성이란, 공교회를 위한 봉사의 기능이다. 한국감리교회의 감독제도는 봉사는 없고 명예만 존재한다. 감독제의 핵심적인 기능은 파송제(임명, 인사, 치리등)와 봉급제(교회운영과 목회자의 생활보장등)이다. 하지만, 이미 청빙제와 개교회주의 속에서 그 기능은 전무하다. 해서, KMC의 감독제는 명예만 누릴 뿐 책임은 감당하지 않는다. 실제로, 연회감독의 기능은 목사안수와 회의주재 등에 머물고 있다.

한국감리교회는 ‘의회제’와 ‘감독제’를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외적인 형식은 유지하지만 본질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기독교대한감리회와 그에 속한 감독제도와 의회제도는 사도성, 보편성, 거룩성 이라는 공교회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反교회적이기 때문이다.



② 보편적인가? 영적인 지도력을 선출하는 과정과 방법에 있어서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함으로 보편성이라는 의회정신의 기초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연회정회원들에게 의무만을 강요하고 부여된 권리는 연급에 의해 제한하는 부당한 구조다.

무엇보다 총대선출에 있어서 연회원들에 의해 연회에서 선출하도록 되어 있지만 30대, 40대, 50대의 대다수의 정회원목회자들과 개체교회의 평신도(장로가 없는 교회) 대표들을 제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한마디로 전체 연회원들(지역교회대표)에 의해 그 대표성이 위임되어야 할 입법총대선출권한을 왜곡하여 미래지향적인 의견수렴을 막음으로 변화와 개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구조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현재 연령별로 시행되고 있는 은급제도이다.


③ 거룩한가? 거룩성에 비추어 볼 때 한국감리교회의 감독선거는 성령에 역사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속적인 권위 즉 '돈'에 의해 결정된다. 개체교회 담임목사의 인사제도 역시 혈연과 권리금(?), 은퇴비 명목의 은밀한 뒷거래를 통해 역시 ‘돈’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를 법적으로 제한하거나 공정한 인사 시스템을 법제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특수한 계층(은퇴를 앞둔 일부 특권층)에 의한 입법의회구조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한국감리교회의 현실은 무늬만 감독제이며 의회적이지도 않다. 교회의 영적인 지도력 곧 리더쉽(감리교의 감독제)은 필요하며 그 전통(성직제도)은 실로 소중하다. 하지만, 교회의 건강한 리더쉽은 보편적인 의회를 통해서 견제하고 보완될 때 비로소 그 권위를 인정 받고 존경 받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행 감독제도는 사도직 계승에서는 무능하고, 거룩해야 할 선거방식은 타락했고, 이를 견제해야 할 의회는 보편성을 상실한 채 무력화됐다. 오늘날 감독선거는 30년전 장충체육관 선거 같은 간접선거이며, 국회에 해당하는 입법총회의 총대 선출은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이교도적인(유교)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독재 권력을 제한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인 삼권분립(三權分立)은 실종되고 입법, 행정, 사법을 독점하고 전횡한다. 감리교개혁의 가장 우선 과제는 감독제도를 섬김의 사역을 감당하는 ‘봉사직’으로, 의회제도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보편적인 의회’로, 돈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체 교회지도자들의 참여로 선출되는 ‘거룩한 방식’으로 혁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모든 개혁논의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다.


김명섭 2013년 09월 27일 (금)
리플달기
15 0
박광재 (116.127.228.190)
2019-02-24 05:42:25
김명섭 목사님게 올립니다.
박광재
받는사람

오늘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김목사님께서 한국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한 세속적인 금권불법 타락선거를 완전히 타파하기 위하여

선택과 결정의 주권을 온전히 성삼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성경의 선택방법인 제비뽑기 선거제도를 제안하시고 주장하신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글을 읽고 한국감리교회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다름아닌 김명섭 목사님께서 한국감리교회의 목사님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의인 한 사람만 찾아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감리교회에 성삼위 하나님께 선택과 결정의 절대주권을 돌려드리고자 하시는 김목사님께서 존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장로교회의 목사입니다. 그러나 감리교도들 보다 더 감리교회를 사랑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입니다.

그 까닭은 저의 선조(박성대 : 한국감리교회 제1호 본처 전도사 겸 장로님)들께서 한국감리교회의 기초를 놓으신 까닭입니다.

저는 비록 장로교회의 목사로 부르심을 받아서 금년에 목회 40주년을 맞이하여 교단헌법에 따라서 은퇴를 하기 위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50년 전 신구약 성경속에서 제비뽑기 제도를 재발견하게 해주셨습니다.


제비뽑기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목회학적, 세속정치적, 문화인류학적인 연구를 하다보니까 이 제도야 말로 금권선거로 말미암아 망하게된

한국교회와 국가정치를 새롭게 개혁할 성경의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감리교회의 연회와 총회의 현장을 20여 년 이상 찾아 다니면서 감리사 및 감독회장을 제비뽑을 것을 홍보하며 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감리교회를 사랑한 까닭도 있습니다만 세계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리 선생의 삶과 사역 가운데에서 성경의 제비뽑기를 실시한

사실에 근거하여 한국감리교회가 이 선거제도를 한국교회 최초로 받아드릴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감독선거제도를 성경의 제비뽑기 선거제도로 개혁하고자 하셨던 김진호 감독님을 비롯한 김한옥 목사님과 강문호 목사님 등 감리교단의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도 교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감리교회가 감독선거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나 감치일을 당하면서도 회개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인하여 저도 그동안 김목사님처럼 로뎀나무

아래에서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김목사님의 글을 읽고 다시금 한국감리교회를 향한 새 희망을 얻었습니다.

한국감리교회는 김목사님과 같은 목사님들이 계시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치 않은 7000명의 성도들이 존재함을 믿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번 미주자치연회에서 감독선거를 총회현장에서 목사 20명 장로 20명 등 총40명을 제비뽑아서 감독을 선출하는 절충형 (제비뽑기 + 직접선거)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저는 지나간 30년동안 미주지역을 수십 차례나 왕래하면서 방문할 때마다 크리스천위클리(사장:조명환 목사)에 "한국감리교회의 감독선거 오직 제비뽑아야 한다"는 전면광고와 세미나를 인도해 왔습니다.

그 결과로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화와 초교파 장로연합선거단에서와 여러교회들에서 지도자들을 제비뽑기로 선출한바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미주감리교회 자치연회의 박효우 감독님과 은희곤 감독님을 비롯한 연회원들께서 감독선거에 제비뽑를 가미한 선거제도를 관철시키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하늘에 손바닥 만한 구름을 뜨게 하시고 축복의 장마비를 쏟아 부으셨듯이 미국으로부터 한국감리교회의 하늘에도 손바닥 만한 희망의 구름이 뜨게 하셨습니다.

더욱 함께 기도하시면서 한국감리교회의 개혁과 경건성 회복을 위하여 공조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요한 웨슬리 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감리교회 132년 역사상 최초로 제비뽑힌 감리사이신 강화북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신 박원재 목사님은 저의 친형님이되십니다.

강화북지방에서 감리사를 제비뽑은 후에 제2차로 강릉지방에서 루아교회에서 제비를 뽑아서 감리사를 세우셨지요. 김목사님과 같은 목사님들이 계셔서 가능했구나 생각합니다.

저는 금년에 은퇴를 하는 까닭에 시간적인 여유가 좀 더 생길 것임으로 다시금 감리교회의 총회현장을 쫒아다니며 감독회장 선거제도를 제비뽑기 선거제도로 개혁할 때까지 힘을 보태겠습니다.

가능하다고 할 것이면 한번 강릉으로 목사님을 만나 뵙기 위하여 방문하고 싶기도 합니다. 주안에서 승리하세요 . 샬 롬 !

주후 2019년2월23일(토)

예장합동총회소속 영광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제28대 총동창회장

도성 박 광 재 목사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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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182.221.41.246)
2019-02-21 07:02:54
의인은 멸절하였는가
시편 제 12편의 연구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저희가 각각 이웃을 향하여 헛된 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맘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큰 것을 말하는 혀를 끊어버리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혀로 이기겠노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리오“하는도다.
여호와 가라사대 “궁핍한 자의 빼앗김을 당함과 가난한 자의 탄식함을 인하여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내가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은 순전한 말씀이라
땅 풀무에 단련한 은 같으니, 곧 일곱 번 단련한 것이로다.
여호와여 당신이 저희를 지키시고
이 세대에서 영영토록 보호하시리이다.
인자 중에 비루한 것이 높아질 때에
악한 자가 두루 다니는도다.

이 시는 도덕적 타락이 극도에 달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기도다. 전장(全章)을 3단으로 볼 수 있으니 시인은 제1단에서 무신(無信)과 위선의 세대 중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빌고, 그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절(滅絶)시키기를 구한다(1〜4절). 제2단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몸소 대답하여 불의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를 도울 것을 말씀하신다(5절). 그리하여 제3단에서 시인은 위로를 얻은 다음 하나님을 찬송한다(6〜8절).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구원하옵소서” 하는 말은 시인의 가슴에서, 전혼(全魂)에서 쥐어 짜이어서 폭발되듯이 나오는 호소의 부르짖음이다. 그는 그 부르짖음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한다. 자기네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향하여 타는 듯한 애소(哀訴)를 하는 그이 가슴 안에는 큰 근심 비통이 있다. 그것이 1절 하반에 나타난 것이다. 즉 인자 중에서(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혹은 교회에서) 경건한 자 신실한 자가 끊어져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불행이요 비통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민족에나 경건한 자 신실한 자가 적어지고 불의한 자가 늘어가는 것이 그 멸망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가 줄어지고 진실무위(眞實無爲)한 인물이 찾아볼 수 없이 된 것은 과연 통탄불기(痛嘆不己)할 일이었을 것이다.

모든 지체(肢體)가 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이로되, 그 모든 지체에 다 각각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몸속에 영혼이 있어 비로소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이 있고 생활기능이 있는 것과 같이, 한 국가사회 안에 허다한 사람이 있으되, 그 모든 사람이 다 생명을 가지는 것이 아니요, 그중에 소수의 의인이 있어서 그 사회, 그 문화의 부패를 방지하고 사멸을 면케 하고 생장발전이 있게 한다. 의인은 실로 인류사회의 귀한 혼이다. 그 혼의 광휘가 성하면 성할수록 그 사회는 건전한 발달을 하고, 그 혼의 세력이 감쇠(減衰)하면 하는 것을 따라 그 사회는 퇴패(頺敗)하고, 그 문화는 타락한다. 고로 경건 진실한 인물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날은 그 사회 그 민족의 사멸의 일(日)이다. 고금 모든 민족 중에 이 사실에 대하여 가장 진지(眞摯)하고 민감(敏感)이였던 자는 이스라엘이었다. 구약 중에는 이러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독자는 몸소 다음의 성경구절을 찾아 참고하기를 바란다. 「호세아」 제4장 1절, 「미가」 제7장 2절, 「예레미아」 제7장 28절, 제5장 1절, 「이사야」 제57장 1절, 제59장 14절, 그리고 본지 전호 김교신(金敎臣)형의 영원의 긍정을 다시 보아 이스라엘 민족이 ‘진실’이란 것을 얼마나 중히 여기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저희가 각각 이웃을 향하여 헛된 것을 말하며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맘으로 말하는도다.

신실되고 경건한 자가 끊어진 반면에 일어나는 현상은 위선과 거짓말이 일반으로 유행하는 것이었다. 고로 시인은 ‘저희’라는 말로 일반 사회의 사람 혹은 전 단체의 사람을 가리켰다. 그리고 “각각 이웃을 향하여”라는 말을 보면 그 헛된 말, 거짓말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하는 바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내적으로는 썩은 고기같이 부패하고, 외적으로는 장식한 무덤같이 평화한 사회에서는 진실한 우의(友誼)와 희생적 화합은 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는 말과 행하는 일은 가유(訶諛)와 교사(巧詐)와 간사(奸詐)한 사교(社交), 교활한 수단, 이중인격, 약속의 배기(背棄)뿐이다.

여호와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큰 것을 말하는 혀를 끊어버리시리니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혀로 이기겠노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를 주관하리오”하는 도다.

시인의 열정은 구원을 구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그는 거세(擧世)의 도도한 허위, 위선을 미워하고 자기 동족을 위하여 분개하기를 심히 하는 고로 다시금 나아가 그 악인, 불의자의 멸절을 빈다. 입을 조심하고 혀를 금하라는 것은 동양의 도덕훈(道德訓)에도 있는 것이지만은 과연 입술과 혀는 무서운 물건이다. 그는 제한을 모른다. 더구나 이 타락한 세대에서는 심하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혀에다 무한의 자유를 주고 마음대로 간교를 말하고 대언장어(大言壯語)를 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혀로 이기겠다”한다. “혀로 이기리라”는 말은 혹은 “혀에 권능을 주리라”라고 번역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누가 우리의 말을 금하거나 제지하거나 할까. 누가 우리를 주관하고 다스릴까.

우리는 우리의 혀가 있고 입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우리 위에 주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를 볼 때에 우리에게 생각되는 것은 현금 이 세대다. 이론 만능이라고 해서 된 것 못된 것들 저마다 절대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부르짖는다. 마치 독한 물건과 더러운 냄새 나는 것을 임의로 가상(街上) 위에 내어던짐 같다. 개인에 있어서나 단체에 있어서나 타락의 징조는 위선, 쓸데없는 변설이 늘어가는 데서 보인다. 그러나 진실한 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런 불신, 불건(不虔)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고로 하나님을 향하여 그를 멸하옵소서 하고 구한다. 만일 이것을 도덕 정도의 낮은 것이라고 비난하면 이는 시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말이요, 불의에 대한 의분을 가져보지 못한 자다. 의에 대한 사모가 간절하면 할수록 불의에 향하여는 강한 반발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호와 가라사대 “궁핍한 자의 빼앗김을 당함과 가난한 자의 탄식함을 인하여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내가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

시인의 이 뜨겁고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여호와 신은 응답하셨다. 시인은 이것을 직접 신의 입에서 들었다. 이때에 시인은 단순한 시인만이 아니요 선지자다. 하나님에 호소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듣는다. 고로 이때에 시는 예언으로 표시된다. 하나님은 시인의 입을 빌어 위선자와 불의한 자들로 인하여 곤란당하는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몸소 일어날 것을 말하였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불의가 가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첫째 결과는 불행한 자의 수난이다. 궁핍한 자 간난한 자 그들은 과연 가련한 자들이다. 사회의 하층에 있어서 혜택을 입는 데는 가장 떨어지고, 불의로 인하여 희생이 되는 데는 제 일위다.

그런 것을 정의의 하나님, 공평의 하나님 여호와는 묵과하지 않는다. 그는 물론 많이 참고 기다린다. 그러나 불의를 간과하는 이방신은 아니다. 고로 시인의 애소(哀訴)에 응대하여 “이제는 내가 일어나리라”한다. ‘일어난다’ 함은 처치(處置)를 취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길이 참음으로써 기다리고 견디어 왔으나 더 유예(猶豫)할 수 없는 때에 왔다. 하나님은 이제 자기 백성이 불의한 자로 인하여 곤란함을 보고 노(怒)를 발하여 일어나는 날이다. 아 하나님이 노하시는 날 그날이 얼마나 두려운가. 그날 전 인류는 전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또 우리는 그런 하나님임으로 인하여서 정의를 지키고 불의를 간과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는 하나님임으로 인하여서 그를 믿고 의지한다. 과연 그는 자기에 대한 의무를 지키지 않는 진실하지 않은 자에겐 무서운 하나님이요, 자기에게 간구하고 의지하여 충성한 자에게는 “사모하는 평안에 두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전한 말씀이라
땅 풀무에 단련한 은 같으니, 곧 일곱 번 단련한 것이로다.

발호(跋扈)하는 불의를 보고 시인은 맘에 번뇌하고 통탄하였다. 사랑하는 동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슬퍼하였다. 의인의 씨가 인자 중에서 끊어져 버리고 세상이 불의와 사악의 시랑배(豺狼輩)의 짓밟는 바가 되고 말 것일까고 절망하려 하였다. 하나님은 영원히 백성을 버리었는가 원망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탄식은 여호와 보좌에 올라갔고, 그의 부르짖음은 전능하신 자의 귀에 청취되었다. 그는 이제 여호와 자신의 입에서 직접 구원의 약속을 들었다. 고로 이제 그의 입은 찬미로 넘친다. 이제 의심도 없어지고 확신과 희망이 빛난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항상 공의롭고 진실하였음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 말씀의 순결함을 형용하여 일곱 번 단련한 은이라 하였다.

여호와여 당신이 저희를 지키시고
이 세대에서 영영토록 보호하시리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 앞에 서는 것은 확신의 지팡이와 희망의 빛이다. 고로 시인은 현재의 타락한 세상을 보면서도, 불의 허위가 우세한 것을 보면서도 다시는 더 낙담하지 않고 비탄하지 않는다. 그의 눈앞에는 구원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진실의 신 여호와가 몸소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인제 노래한다. 전능의 신 당신이 저희를 지키고 보호하시리라고. “이 세대”란 것은 이 불의의 발호(跋扈)하는 세대란 말이다. 그중에서도 영원토록 보호하실 것임을 믿는다.

인자 중에 비루한 것이 높아질 때에
악한 자가 두루 다니는도다.

비루한 것이 높아지는 때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시대다. 도덕 표준이 저하한 시대다. 양심의 권위가 박약해진 시대다. 고로 때는 악인이 기탄없이 두려움도 없이 대보활보로 사회에 횡행한다. 악을 행하고 부끄러워도 않고 도리어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로 안다. 일반 사회도 이를 인허(認許)한다. 그런 시대에 있어서는 의인이 존재할 수가 없다. 시인은 이제, 이 의인이 아주 절종되어버린 듯한 무서운 현실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비탄의 반복은 아니다. 도리어 그 현실을 눈에 보면서 용기를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의 약속의 순전함을 믿는다. 고로 7절과 8절은 의미로 보아서는 바꾸어놓는 것이 무방하다(훕펠트시-네). 그렇지 않으면 푸릭스의 역(譯)대로 8절 첫머리에 ‘비록’이라는 말을 넣는 것이 마땅하다. 즉 이 악이 권세를 가지는 이 세대에서도 신실한 여호와 신은 의인을 보호하시리라는 확신의 위로다.

시는 수천 년 전의 것이요 특정한 한 민족 이스라엘의 사회에 관한 것이다. 마는「시편」이 전체로 그런 것같이 또는 성경의 기사가 다 그런 것같이 이 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감격과 공명을 일으키는 시다. 사회나 문화의 그런 상태가 있는 한까지 이 시는 언제든지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 조선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로 부를 노래는 이 시다. 이 시를 조선에 보내면서 우리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하나 이것이 현실인 고로 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금 더 비통한 것은 이 기도의 시를 곡음(哭吟)하여야 할 형편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도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음이다. 이스라엘의 시인은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 중에서 끊어져버리고 만 줄로 알고 통곡 애호하였으나, 통곡하는 저 자신이 있는 때까지는 오히려 의인의 씨가 있었다. 정말 슬프고 정말 두려운 것은 “의인이 망하여도 맘에 두는 자가 없고, 경건한 자가 세상을 떠나도 의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화를 피함인 줄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사야」, 제57장 1절)

병고를 느끼는 때까지는 오히려 소망이 있으나 병이 있어도 병고를 깨닫지 못하는 몸은 생명이 이미 떠나간 사해(死骸)에 불과하다. 악 중에 가장 두려운 악은 스스로 악임을 의식치 못하는 악이다. 사회의 암흑면에 숨어서 눈을 숨겨가며 하는 위선은 아직도 용서할 점이 있으나, 위선을 하며 위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당한 것으로 알고 자타가 공허(公許)하여가며 하는 세대는 멸망의 길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오직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 불의를 통리(痛詈)하고 질책해주었으면 한다. 이제 삼천리 안에는 허위뿐 아닌가. 이 백성은 거짓말하는 백성이 되어 버리고 말지 않았나. 아첨하는 백성이 되어버리고 말지 않았나. 귀를 돌리어 사회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왈 운동, 왈 획책, 왈 수단, 왈 사교 등등이 아닌가. 관리(官吏)는 나라의 것을 투식(偸食)하고 백성은 사회의 것을 도적하고 실업가는 투기가요 교육자는 어르는 엿장수요 종교가는 속이는 마술사가 아닌가. 어디 진실을 위하여 희생되었다는 일개의 소식을 듣는 것이 있나. 2천만을 들어 황해에 던지려면 말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여기 의인이 완전한 의인이 못 나더라도 적어도 의의 간구자가 나여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한강 가에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 중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 “독사의 종류들아” 하고 의의 철편(鐵鞭)을 휘날리기다. 아 아 누가 우리에게도 있어서 백두산정에 올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시 제12편을 올리고 “내가 이제는 일어날 것이요 저를 그 사모하는 평안에 두리라”하는 가신(嘉信)을 받아가지고 기쁨의 눈물로 하산할 것인가.


**** 성서조선 1930. 11월, 22호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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