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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길에서 벗어나라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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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2월 08일 (금) 01:28:13
최종편집 : 2019년 02월 08일 (금) 01:30:05 [조회수 : 5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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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간의 갈등 이야기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지키고 있는 동산을 바라보며 아담과 하와는 암담했을 것이다. 게다가 뿌리 뽑힌 자로 살아가야 할 미래는 불확실했다. 척박한 땅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아나고 있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고단한 운명 앞에서 아담은 한숨을 내쉬었을까?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된 것 같은 얼떨떨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둘이어서 좋았다. 자기 그림자가 아닌 누군가가 실체로서 곁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위안이다.

둘은 시간 속의 삶에 적응했다. 그리고 은총처럼 찾아온 선물이 있었다.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여 아이 이름을 가인이라 했다. 연이어 아벨이 태어났다. 다복한 삶이 시작되었다. 두 아들은 장성하여 저마다의 일을 수행했다. 가인은 농사꾼이 되었고, 아벨은 목동이 되었다. 둘은 각각 자기 노동의 열매를 여호와께 바쳤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아벨은 양의 새끼와 그 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4:4b-5a). 차이가 발생했다. 그 차이가 가인의 감정을 격동시켰다. 가인은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자신이 왜 여호와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성찰보다는 분하다는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누구에 대한 분노였을까? 제물을 거부하신 하나님? 혹은 동생 아벨? 그런데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을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관점에서 해석을 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가인과 아벨의 갈등을 ‘형제간의 경쟁’(sibling rivalry)의 관점에서 풀어낸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형은 뒤늦게 등장한 동생에게 부모의 사랑이 몰리는 것을 못 견뎌하고, 동생은 형을 보고 배우면서도 경쟁의식을 품고 대한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형제들은 갈등 관계 속에 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다른 형제들은 원인은 각기 다르지만 협력하며 살기보다는 경쟁하며 살아간다. 물론 성경은 그들이 어떻게 화해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갈등하는 두 주체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와는 달리 출애굽기에는 매우 협조적인 두 형제가 등장한다. 모세와 아론이다. 둘은 상호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멋진 동역자이다.

가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사이의 충돌로 읽으려는 이들도 있다. 한곳에 터 잡고 살아가는 이들은 늘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을 불길한 눈으로 바라보았고, 유목민들은 정착생활에 만족하는 이들을 경멸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분리되어 살아갈 때는 상관이 없지만, 삶의 경계가 인접한 경우에는 물과 초지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까닭을 밝히기 위해서 가인이 바친 제물에 정성이 깃들지 않았다든지, 인색한 마음으로 바쳤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니라”라는 구절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존재 자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나중에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은 그런 가정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질투의 파괴성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장남과 차남 사이에 벌어진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동생의 편을 드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지만 이것도 그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나?”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모른다”이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b)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분(Deus Revelatus)인 동시에 숨어 계신 분(Deus Absconditus)이다. 어두운 데 계셔서 인간의 이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 부분은 어둠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여하튼 일은 벌어졌다.

가인의 가슴에 분노가 파종되었다. 형제로서의 띠앗은 스러지고 적대감만 남았다. 아벨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그의 가슴에 열패감을 안겨주었다. 질투 혹은 시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성경에서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을 드러내기 위해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 외에는 거의 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도 그럴 것이 질투 혹은 시기는 은밀하든 노골적이든 타자 관계의 어긋남을 보여주니 말이다. 자신에게 귀착되었으면 했던 칭찬 혹은 보상이 다른 이에게 주어질 때 사람들은 그 칭찬과 보상을 누리는 이들을 시기한다. 신원하 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빌어 이렇게 설명한다.

“누가 정당한 몫 이상의 대우를 받으면 화가 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감정이 ‘네메시스’ 즉 ‘의분’이며, 이 감정이 중용을 지키면 덕이지만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악이 된다고 말했다. 그 감정이 지나치면 친구가 잘되어 칭찬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토노스’(phthonos) 즉 시기다. 반대로 그 감정이 모자라면 친구가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낮은 자리로 내려갈 때 은근히 기뻐하게 되는데, 이것은 ‘에피카이레카키아(epikairekakia) 즉 ‘심술’과 ‘고소히 여기는 것‘이다.”1)

이렇게 보면 질투 혹은 시기는 저열한 감정이다. 자기가 중심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인간 속에 깃든 그런 어둔 그림자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질투는 늘 적개심 혹은 분노의 감정과 연결될 때가 많다. 그때 질투는 매우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는 질투가 빚어낸 참극을 보여준다. 오셀로의 기수인 이아고는 자기가 아닌 캐시오가 승진하자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캐시오에 대한 반감은 물론이고 자신을 신뢰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캐시오의 손을 들어준 오셀로에 대한 반감이 특히 더 심했다. 그래서 오셀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공작을 진행한다. 캐시오와 오셀로의 아내인 데스데모나가 마치 내연 관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아고의 꾐에 빠져 술에 취한 캐시오가 주정을 부리자, 오셀로는 그의 지위를 박탈하고 만다. 그것을 딱하게 여긴 데스데모나는 캐시오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남편을 설득하려 한다. 이아고는 쾌재를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오, 지옥의 신이여! 마귀가 검은 죄를 씌울 때 처음에는 지금의 나처럼 천사 같은 모습을 보여줘. 고지식한 이 바보가 지위를 되찾으려 그녀한테 매달리고 그녀가 남편에게 그를 위해 변호할 때 나는 그녀가 욕정을 채우려고 그를 불러오기 위해 그런다는 독약을 귀에 부어 넣겠다. 그녀가 캐시오에게 좋은 일을 해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무어인과의 신뢰는 깨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그녀의 선(善)을 그들을 모두 옭아 넣을 그물로 삼을 테다.”2)

이아고는 우연히 손에 넣은 데스데모나의 손수건, 오셀로가 아내에게 사랑의 징표로 주었던 그 손수건을 캐시오의 집에 떨어뜨린다. 캐시오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본 오셀로는 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고 결국 아내를 죽이고 만다. 질투심이 분노를 거쳐 살인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이 희곡은 잘 보여준다.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는 질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유가 있어서 질투하는 게 아니고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거예요. 스스로 잉태하고 태어나는 괴물이지요.”3) 그 괴물이 천사같은 데스데모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변형된 보복

가인 역시 격렬한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자기에게 귀속되어야 할 여호와의 사랑이 동생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항의할 수도 없고, 또 보복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가인은 미움의 표적을 동생으로 바꾼다. 자기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폭력의 충동을 해소할 대상으로 동생을 선택한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비극이 또 있을까? 그는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자를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것이다.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 소설 제목은 ‘벌레 이야기’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아들 알암이를 애지중지 키우던 아내는 어느 날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알암이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이다. 아내는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터전이 흔들렸다. 아내는 약국집 김집사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줄 닻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는 다소 위험한 발상을 한다. 감옥에 갇힌 범인을 찾아가 그를 용서한다고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위에서는 말렸지만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옥에 다녀온 아내는 더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범인은 이미 감옥에서 전도를 받아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범인이 오히려 아내를 위로했다. 이 뒤집힌 현실을 아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내는 절규한다.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할 수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4) 이미 용서받았기에 용서를 할 수도 없었다는 사실은 아주 잔인하게 아내의 가슴을 할퀴었다. 아내는 김집사에게 이렇게 절규한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게서 그럴 빼앗아가 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5)

이 문단은 용서에 대한 무거운 논쟁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작가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사람끼리 풀기도 전에 신 앞에 가져가는 것이 온당한가를 묻고 있다.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어느 누가’ 속에는 신도 포함된다. 결국 아내는 절망감을 떨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자살은 ‘자기 살해’이지만, 이 경우에는 불경스럽게도 신에 대한 변형된 보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의 표적을 빼앗아간 신에 대한 보복으로서의 자기 제거, 문학은 이렇게 섬뜩하다.

여호와에 대한 보복을 감행할 수 없었던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인 아벨을 제거함으로 신에게 보복하려 한다. 가인의 안색이 변한 것을 알아차린 여호와는 가인에게 엄중하게 경고한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질투 혹은 시기는 들을 귀를 닫아버린다. 이성적 사고는 마비되고, 시민적 상식은 작동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시기심의 위험을 이렇게 경고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27:4)

 

피로 더럽혀진 땅

질투 혹은 시기심에 사로잡힌 영혼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다. 그 길이 파멸의 길일지라도 멈추지 못한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돌로 쳐 죽이고 만다. 이것은 라스콜리니코프적 살인이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중인물인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한 인간에게는 자기 이상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고 만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를 자유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부자유의 속박 속으로 몰아넣는다. 노파로부터 가져온 돈은 자기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기고, 쫓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친다. 그는 더 이상 사소한 윤리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아니라, 자기 무게에 짓눌린 죄인으로 소냐 앞에 엎드린다.

가인은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라는 여호와의 질문 앞에 세워진다. 그는 퉁명스럽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되묻는다. 그 때 여호와는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고 있다고 말한다. 무고한 사람의 피가 흐른 땅은 더럽혀진 땅이다. 히브리 전통에서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께 귀속된다. 다른 이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것에 손을 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사는 땅은 곧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의 피가 흘러 더럽혀진 땅은 불모의 공간으로 변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이마에 표를 받은 가인은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놋(Nod) 땅에 정착한다.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란 뜻이다. 형제에게 등을 돌리고 여호와께 등을 돌린 인간의 삶이 불안임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지금 이 땅에도 얼마나 많은 피가 허비되고 있나 돌아볼 일이다. 생산성 제고와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하에 위험을 외주화하는 기업들의 행태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되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죽어도 괜찮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인신제물을 요구했던 몰록은 오늘 이 땅에서 되살아나 수많은 생명을 삼키고 있다. 광장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소리와 굴뚝 위에서 부르짖는 이들의 소리,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노동 현장에서 죽음의 벼랑 앞에 내몰린 이들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땅은 온통 무고한 우리 이웃들의 피의 외침으로 가득 찰지도 모른다.

난민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그들은 현대판 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 그들의 문화·전통·종교는 존중받지 못한다. 오히려 언제든 사회 불안을 일으킬 수도 있는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지도 딱하기 이를 데 없다. 죽음이 일상이 되었기에 가까운 벗들이 “‘그래, 또 봐!‘하고 헤어져 놓고는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악몽” 속에서 살아간다. “단언하건대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면 개인적 습관이나 생각뿐 아니라 사회 언어적 행동 양식까지도 바뀐다. 잘 지냈느냐는 인사 대신에 ‘아직 살아있었구나!’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6) 이런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아벨의 운명을 겪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어느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포도 수확철이 되어 주인은 일꾼들을 찾기 위해 거리에 나갔다가 사람들에게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부탁한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오후 5시에 일터에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마침내 품삯을 지불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주인은 일을 돕는 이들에게 맨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지불하라고 지시한다. 늦게 온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들은 주인의 자애로운 처사에 놀랐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왔던 이들은 주인의 처사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뙤약볕 밑에서 소금 땀을 흘리며 일한 그들을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이 그들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주인은 물론이고 뒤늦게 온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싹텄다. 마침내 그들은 주인의 처사가 정의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주인은 단호하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20:13-14).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더 보탤 말은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가시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반응인지도 모르겠다.

렘브란트는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 한 점을 남겼다. 창가에 탁자가 놓여 있고 주인은 그 옆에 앉아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이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모자를 쓰고 붉은색 옷을 입은 주인은 벽을 등지고 앉아 있다. 그는 일꾼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있다. 그의 오른손은 가슴에 놓여 있다. 마치 ‘이게 바로 내 뜻’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품삯을 받고 있는 이의 모습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가 좌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주인을 바라본다. 불량하게 내민 팔과 구부정한 자세가 그의 마음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화면의 오른쪽에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투덜거리고 있는 것인지, 뜻밖의 대접에 감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들 뒤에는 거의 상체를 벗다시피 한 사람 하나가 포도주 통을 굴리고 있다. 그는 가장 가련한 처지에 있다가 주인의 호의를 입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주인의 고마운 마음 씀에 보답할 길을 찾다가 포도주 통을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를 통해 절박한 처지에 몰린 동료들에게 베풀어진 호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협한 마음을 폭로하신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에게 복지의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이 많이 강퍅해졌다. 산술적인 공평함이 아니라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는 능력이 퇴화된 것이다. 무정한 마음들이 이루는 세상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주어진 호의를 사심 없이 함께 기꺼워하고 경축할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천국의 마음일 것이다.

 

요구받음의 경험

질투 혹은 시기심의 악덕은 치유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그 악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나의 ‘있음‘의 근거가 내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놀람으로 자각할 때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는 신비로 다가온다. 초월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릴 때 삶은 누추해지고 무거워진다. 자기 삶의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리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리고 일쑤 시기심의 노예로 전락한다. 아브라함 헤셸은 말한다.

“끝없는 놀람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빚진 자라는 느낌을 새삼스럽게 한다. 외경하는 자는 결코 자만심을 가질 수가 없다. 외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이 은혜로 받은 것임을 알 따름이다. 세계는 사물들이 아니라 사명(使命)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무엇엔가에 요구되고 있는 상태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다.”7)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여호와의 이 질문 속에는 인간은 ‘아우’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책임을 느낄 때 참 사람이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 우리 앞에 현전하여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존재로 대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시기심의 악덕은 스러진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우리의 눈물은 우리 영혼에 더께처럼 앉아 있는 질투 혹은 시기심을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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