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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
최재석  |  jschoi41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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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2월 01일 (금) 18:14:44 [조회수 :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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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 ‘이모네 집’에 간다. 전에는 ‘고모네 집’을 갔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고모네 집’이라는 식당은 찾아볼 수 없고 ‘이모네 집’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모네 집’에 간다. 그리고 어느 식당을 가든지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청할 때 음식을 날라주는 아주머니를 전에는 ‘고모’라고 불렀는데, 근래에는 ‘이모’라고 부른다.

이렇게 상호도 호칭도 바뀐 데에는 어려서부터 고모와의 접촉은 줄고 이모와의 접촉이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옛날과 달리 친할머니보다는 외할머니가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모네 집에 자주 가고 이모네와 함께 놀러가는 등, 친가 식구들보다는 외가 식구들과 더 많이 어울리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도 요즘 젊은이들은 고모보다는 이모와 더 친숙하다.

이렇게 된 것은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가정생활의 중심이 되고 어머니와 딸은 주변으로 밀려났었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여자들이 나서서 자기들이 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인간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여성해방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 운동의 영향으로 가정에서 어머니의 중요성이 인정받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는 여성 대통령, 여성 총리, 여성 CEO들이 나왔다.

이런 사회적 정황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교회에서 여성주의 신학이 대두되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남자들이 기록한 성경에서 여자들은 폄하 혹은 왜곡되었다고 말하면서, 이제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한 인격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서 여성이 왜곡된 사례를 지적하기도 하고, 예수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했다는 것을 복음서에서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예수가 그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자를 남자와 동등하게 대했단 말인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를 사람의 수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유대 남자들은 하루에 세 번씩 자기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런 사회에서 예수가 여자들을 남자와 동등하게 대했다면 그것은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복음서에서 여성의 눈으로 새롭게 읽어낸 여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살펴보겠다.


예수와 여성들

마가복음에서 보면 예수가 악령 들린 한 남자를 고쳐주었다는 이야기 바로 다음에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1: 29-31, 병행구, 마 8:14-15; 눅 4:38-39).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고쳐주었다는 두 가지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그 여인이 예수께 수종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 여자가 랍비의 식사 시중을 든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관례가 아니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가 관례에 매이지 않고 그녀를 특별히 대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마가복음 5장 25-34절에서 우리는 예수가 혈루증을 앓는 한 여자를 고친 사건을 읽는다(병행구, 마 9:20-22; 눅 8:43-48). 그 여인이 혈루증을 앓는다는 것은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부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 여인이 예수를 만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부정한 여자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는 일반인들이 싫어할 이런 일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여인을 고쳐주기까지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라고 말했다. 예수가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른 것은 그녀의 믿음을 가상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에 관한 이야기(마 8:5-13; 눅 7:1-10)를 참고하면 치유기적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예수는 믿음 안에서는 혈루증을 앓는 여자와 백인대장인 남자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주의 신학자들의 말대로 예수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 7장 24-30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을 보고 그녀의 딸의 병을 고쳐준다(병행구, 마 15:21-28). 그녀는 이방여인이다. 병든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에게 간청하는 이 여인의 믿음은 그 어떤 모욕적인 말에도 약해지지 않는다. 그러자 예수는 그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고 그녀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준다.

여기서 우리는 가버나움의 백인대장이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이었다는 데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일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예수의 치유를 끌어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예수는 믿음에 대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던 사회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 특히 여자를 사람의 수에 넣지 않는 사회에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대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서는 예수가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 받아 갔을 때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다. 남자들만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바리새인의 집에 와서 그녀가 울면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것은 아마도 그 전에 예수에게 은혜를 입었거나 예수의 설교에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주인인 바리새인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정죄하지만, 예수는 그를 초대한 바리새인보다도 이 여인이 자기를 위해서 더 헌신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녀의 죄를 용서한다.

그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창녀이다. 집주인을 비롯해서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은 그녀를 쓰레기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도 그 여인을 그렇게 대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예수는 그 여인의 극진한 헌신을 칭찬한다. 특히 이 경우에 예수는 죄인이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헌신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죄 많은 여인에 관한 기록 바로 다음에 나오는 8장 1-3절에 예수와 동행하면서 예수의 일행을 도왔던 여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이 두 사건을 연이어 언급하는 것은 예수가 여인들의 헌신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여자들을 자기와 동행하게 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처사였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예수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그 여인들이 열두 제자의 반열에 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예수와 동행하면서 중요한 임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렇게 예수는 그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역할을 배려했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여기서도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가 여자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맞는 일을 분담시켰다는 데에 주목한다.

누가복음 13장 10-17절에서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는 중에 18년 동안 귀신들려서 고생하는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고친다.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항의할 때,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는 예수의 언급에서 이 귀신들린 여인의 딱한 사정을 안타까워하는 예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예수는 이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른다.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은 세리 삭개오에게 한 예수의 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눅 19:9)과 비교할 만하다. 삭개오가 남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손”은 “아들”을 의미한다. (NIV에는 “a son of Abraham"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는 세리인 남자뿐 아니라 귀신들린 여자도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로서 구원받아야 할 이스라엘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여자를 사람 수에 넣지 않는 사회에서 예수가 그 여인도 아브라함의 딸임을 인정한 예수의 태도에 주목할 만하다.

요한복음 4장 1-26절에는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혼합주의와 헬레니즘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는 남자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외간 여인과 단 둘이서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것도 정숙하지 않은 여인과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 여자라는 점, 그리고 특히 정숙하지 않은 여자라는 세 가지 면에서 예수의 파격적인 행보를 엿볼 수 있다.

당시 한 가정의 가장이 개종을 하면, 그 가정의 모든 가솔은 그들의 개인적인 의사와 관계없이 가장을 따라서 개종을 했다. 그러니까 그 가정의 여자들이나 노예들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여인들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런데 예수가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그 여인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로, 독립적인 한 인격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종교적인 문제에 더 빨리 반응할 수 있다는 여성의 장점을 감안했을 것이다.


마치면서

여성들을 남성들의 지배로부터 행방시켜서 여성의 인격을 되찾고 권익을 확보하려는 여성해방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1960년대에 미국에서 여성주의 신학 운동이 일어났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억압받고 왜곡되어 왔다는 데에 입을 모았다. 여자들을 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단지 남자들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노예나 로봇으로 치부해 왔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근거를 성경에 두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또 바울이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말한 구절이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이런 여성 비하적인 기록이 성경에 나온 것은 남자 중심 사회에서 남자들의 관점에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회에서 여자도 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지금 그런 구절들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날마다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도해 온 교인들에게는 엉뚱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창 1:27)셨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구약에 나타나는 엄격한 아버지 같은 면이 있지만, 신약에서 강조되는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애로운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현대 교회에서 강조하는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과 맥을 같이 한다.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남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된 성경에 왜곡되게 표현된 여성상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남자들이 보지 못했던 여성상을 성경에서 밝혀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성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았고 믿음 안에서 그들은 모두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읽어냈다. 여자를 무시하던 남자들은 이것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여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오랫동안 성경에 숨겨져 있던 여성의 중요성을 찾아냈다. 따라서 여성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을 새롭게 보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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