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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사람이고 교인들은 동물인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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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년 01월 27일 (일) 23:54:37
최종편집 : 2019년 03월 23일 (토) 02:44:04 [조회수 :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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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낯 뜨거운 고백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요21:15-17에 기록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필자는 예수께서 왜 베드로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사람이고 양은 동물 아닌가.

이리 말하면 고개를 갸웃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동물인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양은 그냥 동물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과 대칭되는 말은 동물이 아니라 짐승이다. 그러니 ‘사람이 동물인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라는 표현보다 ‘사람이 짐승인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라 해야 말의 맞는 조합이 될 것이다. ‘사람’을 ‘짐승’에 비유한 것인데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것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예수를 모른다고 거푸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다시 바다로 되돌아가서는 어부가 되어 물고기를 잡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사람이고 신자는 짐승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필자로서는 아무리해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것들은 다 이해가 되는데, 아니 이해가 된다기보다 믿어지는데, 세상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까지도 믿어지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만은 그리 표현 하신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성경에서의 기적이라 하면 먼저 모세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미니 바닷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자손이 마른 땅 같이 걸어 도망갔던 일, 그러기 이전의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한 일이며, 애굽에 내린 하나님의 10가지 재앙, 모두 모세를 통해 이뤄진 기적들이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숫한 기사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예수께서 친히 나인성의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 등등 성경에는 갖가지의 기적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기적들을 별 의심 없이 믿는다. 믿는다기보다 믿어진다. 이유 같은 것을 따지지도 않고, 따질 필요도 느끼지 않는 채 그냥 믿고 믿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베드로에게 하신 내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니, 성경말씀이니 믿지 못한 것은 아닌데, 그런 표현을 하신 그 뜻을 모르겠다.

사실을 말하면 필자도 성경말씀 중 믿어지지가 않아서 애를 먹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이다. 필자는 모태신앙이 아니라 20대 중반에서야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인지, 믿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이것이 믿어지지 않아 애를 먹은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정말 괴로웠다. 마치 사단이 믿음의 마음속에 들어와 냅다 휘저어 의심을 뿌리고 나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니 은혜로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그런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른 기사와 이적은 다 믿어지는데 왜 동정녀 탄생만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분의 동정녀 탄생이 없었다면, 그분의 부활 또한 없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에 비하면 성경의 다른 기사와 이적들은, 기적들은 모두 조족지혈에 지나지 않지 않는가.

그런데 베드로에게 하신 앞에 든 말씀의 표현에 대해 왜인지 모르겠다한 필자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현재형으로 썼으나, 지금은 알고도 남음이 있으니 과거형으로 썼어야 맞다. 문재(文才)의 허약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사과드림과 동시에 낯 뜨겁고 부끄러운 자신에 대해 고백하고 싶은 것도 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아마 전술한 내용에 대부분이 공감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이고 신자는 짐승이냐는 말에 어떻게 공감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께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필자가 낯 뜨겁고 부끄러운 것은 그래서이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을 자신만이 알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 왔기 때문이다. 나름 배울 만큼 배우고 명색이 목사라는 자가 이보다도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고백하고 싶다는 것은, 필자는 이런 속빈 강정 같은 사람인데다가 얼마 전에야 예수께서 그리 말씀하신 데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도 한참이나 없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목사는 목자(shepherd) 아닌 목양견(shepherd dog)

 

필자는 초신자 때부터 목사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었다. 목사는 성직자인데, 필자가 만난 목사들에게서는 아무리 해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목사라는 호칭은 기를 목(牧)자에 스승 사(師)를 써서 사람을 기르는 스승이라는 뜻이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면에서 볼 때 성직자라는 말보다 못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해도 그들 목사를 고운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부모를 포함한 어른이 어린아이를 기른다 하면 맞는 말이지만, 성인들 간의 누가 누구를 기른다는 말인가. ‘牧’자는 ‘친다’는 뜻도 있으니 더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사실을 말하면 성경에 ‘목사’라는 말은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도 ‘목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포이멘’을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그것을 공동번역은 ‘목자’라고 그대로 옮겼는데, 그게 옳은 번역이다. ‘포이멘’의 영역(英譯)은 'shepherd'이니 우리말의 ‘양치기’ 즉 ‘목자’이다. 그런 것을, 그러니까 ‘놈 자(者)’자를 ‘스승 사(師)’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목자’라고 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자”(요10:11)라 하셨다. ‘양치기’라고 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 그것도 자리가 없어 마구간으로 오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어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의 정의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라 내리시고, 삯꾼 목사에 대해서도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하셨다. 그런데 필자는 초신자 때부터 이미 많은 ‘목사’들에게서 이 같은 ‘삯꾼’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신자를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부각시킴으로 당신과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강조하기 위함이셨다. ‘양’은 ‘목자’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목자’가 없으면 사나운 짐승들에게 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양’이다. 그 같은 ‘양’임을 잘 아시기에 그분께서 그 양들의 앞에 ‘목자’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아 온 많은 목사들은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 그 양들을 보호하려 함이 아니라 털을 깎아 제 옷 해 입고 교회건물을 치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러기에 필자는 목사들이 받은 삯만큼이라도 일을 했으면 했다. 그러는 가운데 ‘목사’가 ‘목자’로 변화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질 나쁜 ‘목사님’으로 변해 갔다. 양털에 눈독을 들이는 건 이제 문제꺼리도 되지 않는다. 이리가 되어 양을 직접 해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에 성법죄자들이 있다는 것이 그 확실한 증거이다.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세습하고, 교회를 목회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며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모두 나열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양을 먹이’고 ‘내 양을 치라’ 하셨지 네 양을 그리하라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목자’여야 할 ‘목사’들은, 아니 ‘목사님’들은 자기 양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각자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예수의 양이 아니라, 자기의 뜻에 맞는 자기의 양을 만들려 한다.

진정한 목자,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아니 ‘진정한’이라든가 ‘선한’이라는 수식어를 뺀 그냥 ‘목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목사’라고 부르는 ‘목자’는 ‘목자(shepherd)’가 아니라 양을 치는 목양견(shepherd dog)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교회의 담임목사실 출입문에 붙은 ‘목양실’이라는 표찰이 마뜩찮다.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 때문인지 모르지만, 목사님들이 그 안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일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에 대한 생각, 교회를 위한 일을 제일 많이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말씀에 부합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예수의 말씀대로 ‘청함을 받았을 때에’ ‘끝자리에 앉으’며, 교인들보다 낮은 데로 내려가기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교인이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에는 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소중한 가치일 뿐 아니라 성도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 교인들이 즉 교회이고 교회가 곧 교인들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교회가 교인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이 교회를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필자의 생각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인에 대한 생각이 목사와 교인들이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교인들은 물론 교회가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기 바라기보다, 자기가 교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가 ‘목자’라면 당연히 교회가 교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회에 임해야 한다. 교회를 목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양들이 푸른 풀을 뜯으며 영혼을 살찌우는 목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목자(shepherd)’ 아닌 ‘목양견(shepherd dog)’이 되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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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47.210.132)
2019-01-28 20:08:22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지 교인을 위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목사’가 ‘목자’라면 당연히 교회가 교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회에 임해야 한다.>> 라는 따위의 본문에 나와 있는 글은 아주 위험천만한 글이다.

惡貨가 良貨를 驅逐한 꼴이다. ‘같잖은 목사’를 비판하는 데 치중하다보니... 교회의 本質까지도 왜곡하면서까지 ‘같잖은 목사’를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교회가 교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회에 임하면 교회는 타락한다. 교인이 복을 원하면,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고 목사가 설교하고, 교인이 재산을 원하면, ‘믿으면 하나님이 재산을 준다’고 목사가 교인 수준의 눈높이에서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니 교인과 목사가 타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재산이나 복을 주는 物主이고, 교인은 열심히 믿으면 재산이나 복을 받는 受惠者이고, 목사는 물주와 수혜자 사이에서 福費를 챙기는 복덕방주인 꼴이다. 대형교회는 이런 福費가 연간 수천억원을 오간다고 한다.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교회가 사람(목사나 교인)을 위해 있으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회가 교인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운운하는 건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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