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걷기도를 다녀왔다. 세밑이면 으레 찾아오는 한파는 더 이상 겁날 일이 아니다. 행여 떠나기 전부터 찾아오는 몸의 긴장감 때문에 길 떠날 용기를 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예년처럼 올해도 내 몫의 거리는 멀었으며, 시간은 너무 짧았다. 돌아오니 또 아쉬움이 남는다.  
 
  해를 거르지 않고 열두 차례 반복했지만 아직도 걷는 일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마 평생해도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보니 늘 그려그려 살아온 모습에서 며칠 동안이나마 탈출연습을 하는 셈이다. 어쩌면 ‘걷기도’라고 이름붙인 순간부터 부자유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이젠 그 이름의 무게도 떼어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은 ‘걷는 기도’(걷기도)는 기도방법 중에서 대단히 유용하다. 나는 이 기도법을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아버지 테비에에게 배웠다. 걸으면서 대체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기도줄을 잡는다. 평소 고요히 성찰하거나, 조용하게 입술을 읊조리지만, 걸으며 기도하는 중에 종종 흥분도 하고, 분노도 인다. 그때마다 하늘을 향해 치기어린 항변을 하는데, 누구보다 테비에가 그랬다.
 
  꼬박 삼일을 걷다보면 그런 분노와 흥분도 잠잠해지고, 다 용서가 된다. 순서 없이 한 기도지만 어느새 정리정돈이 되는 것이다. 귓등으로 지나친 기도의 부탁들이 새록새록 등장하고, 내 시야에 들어온 자연과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기도가 더 풍성해진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한동안 생각도 사라진 무심한 상태로 바뀐다. 아마 걷기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종당에는 감사가 흥처럼 절로 나오는 것은 뜻밖의 귀결이다.
 
  어느덧 걷기도 12년은 내 보물이 되었다. 여기에 순례니, 인문학이니 의미를 붙이는 일은 낯간지러운 일이니, 사양하고 싶다. 다만 연례행사로 치루는 생활밀착형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걷는 것이 목적일 수 있을까? 그것은 고달픈 짓이다. 거리, 속도, 시간, 방식 등 자기강제를 정하는 일, 모두 부질없다. 그냥 걷는다.
 
  동해안을 4년째 걸었다. 이제 푸른 바다를 보는 일도 시들하다. 걷다보면 추위로 쨍한 하늘보다 내 주린 배가 더 걱정이 된다. 작은 포구와 해변에 횟집이 즐비하지만 홀로 걷는 나그네가 들어갈 만한 식당도, 먹을 만한 메뉴도 없다. 모두 연말 손님을 기대한 탓일까, 문전에서 ‘우리 식당에는 홀로 먹을 것이 없다’는 수작을 듣기 일쑤다.
 
  게다가 하루 세끼 때맞춰 음식을 만난다는 것은 일용할 은총이다. 그래도 이번엔 첫째 날을 무난히 걸은 후 어둑할 무렵에 도루묵찌개를 파는 식당을 만났다. 어린 시절에 내가 자란 강원도 산골마을에는 겨울이면 대관령을 넘어 많은 생선이 실려 왔다. 그 가운데 새치와 도루묵이 대표적인데, 얼마나 흔했던지 장날이면 아버지는 새치와 도루묵을 양동이로 한 가득 사오셨다. 비록 혼밥이지만, 추억을 불러온 고마운 식탁이었다.
 
  마침내 예정한 사흘 째 울진 평해에서 출발한 걸음은 포항 영일만에 닿았다. 강림중공업이니, 현대힘스니 대공장들이 운집한 지역에서 포항시내 고속버스터미널을 갈 방법을 찾았다. 마침 과적화물 단속 때문에 실강이가 한창이었다. 불러도 달려 올 기색이 없는 콜택시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내가 딱했던지 현장의 사복형사들이 콜택시를 비난하면서 포항북부서까지 나를 태워주었다. 우리 시대의 천사는 민중의 지팡이를 통해서도 찾아오시더라. 
 

 
  마지막 날 영덕과 포항 사이 경계에서 자전거를 탄 한 노인을 만났다. 동해안 해파랑 길은 본래 고성과 부산 간 자전거 종주도로인데 한겨울이어서인지 통 자전거 종주객을 볼 수 없던 차에 반가웠다. 어르신(71세)은 대구 사람으로 무려 12년째 라이더 중이라고 하였다. 보여주는 수첩마다 인증도장으로 가득하였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노인은 예전에 도보여행을 했던 경험을 일러주면서, 그 기억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도 무겁게 걷는 사람을 만나면 멈추어 말동무를 한다고 했다. 그가 들려주는 말씀은 사뭇 명심보감처럼 들렸다. “동해안 걷는 사람은 굶기 쉬워요. 다 횟집만 있어서... 그러니 먹을 것 잘 챙겨서 다녀요.” 크게 공감을 준 ‘선 경험’이고, ‘산 이치’였다.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충고이기도 했다.
 
  노인은 어느새 자전거에 올라타더니 흘리듯 한마디를 남기며 달려 나갔다.
 
  “걷다가 힘들면 시내버스 타시오.”
 
  걷는 사람에게 이만한 자연스러움이 있을까? 이미 걷기를 초월한 태도처럼 자신만만하였다. 내 눈앞에서 마치 자유인이 휙 날아가는 듯하였다.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고 있다. 1년을 걸어오면서 나는 과연 더 지혜롭고, 더 잘 살고 있는지, 자꾸 뒤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