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계
가보지 않은 길
황창진  |  산돌교회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8년 12월 03일 (월) 09:55:44
최종편집 : 2018년 12월 03일 (월) 19:47:53 [조회수 : 50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황창진 목사(산돌교회)

  인간에게는 사회 역사적으로,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유전자가 있다.(양명수, ‘한국교회 인문학에서 배운다’ 참조)  이 유전자는 항상 자신이 걸었던 길로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간다. 그 길은 소유 지향적인 길이고 권력지향적인 길이다.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많이 소유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유전자의 인도를 받으며 거의 본능적으로 그 길을 걸어간다. 많이 소유하는 것에 대한 만족감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획득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타인의 몫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으며 소유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한다. 권력으로 이끌어 가는 유전자의 길잡이 역할도 인간은 거부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질 수만 있으며 ‘권불십년’같은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간에 모아들인 자신의 소유를 풀어서 시간을 사고 공간을 사며 자신에게 유리한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서 획득한 권력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들에게 다른 유전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 유전자가 가는 길은 위에서 소개한 소유와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유전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 길에는 내려놓음, 낮아짐, 대가없는 사랑, 나누어 주고 조용히 사라짐, 십자가에 오름, 정직과 공의를 실현함, 화해와 일치를 일구어냄, 새로운 존재에로의 부활 등의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사회역사적으로 주어진 그 유전자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불의가 가득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소리를 전하는 그 고단한 삶의 자리로 자신을 내몰기는 정말 싫었다. 안정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명목 하에 낯선 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고난을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설교자들은 손쉽게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요나의 이 순간을 불순종의 순간으로 규정하곤 한다. 그러나 실존의 관점에서 이 대목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 누구라도 손쉽게 ‘예, 가겠습니다.’ 하고 길을 떠날 수 있는 그런 장면과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요나의 머뭇거림, 니느웨가 아닌 욥바로 가는 요나의 심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엄중함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이라는 처절한 과정을 통과해 내면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고 엄중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러나 나는 . . .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요나서2:8-9

  엘리야는 아합과의 대치국면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다. 절대 권력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아합이 나라 안에 받아들인 이방종교를 물리치라는 이야기를 용기 있게 해나가는 예언자이다. 그 당시의 하나님의 예언자는 엘리야 한 사람이고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은 850명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굴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신이 참된 신인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갈멜산에서 이방종교와의 대결을 벌인다. 돈과 권력의 총합 앞에서 굴하지 않고 싸운 엘리야의 싸움에 관해서 뜻밖으로 성서는 엘리야의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상황으로는 패배하는 것이 맞는데도 엘리야가 이겼다고 보도를 하고 있느니 조금은 낯설다. 현실적 싸움에서 순수 하나님이 막강한 돈과 권력인 거대 우상을 이긴 경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승자의 모습이다. 그는 브엘세바 근처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에게 죽기를 청하고 있다. 이긴 자가 죽기를 청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공의를 위하는 일에 관하여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는 이기고도 고통스러워하는 엘리야의 모습으로서의 이 실존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유전자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해온 이야기로서의 예수 믿고 복 받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자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엄중한 삶에 대한 각오와 결단을 요구받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의 연장선상에서라면 어쩌면 우리가 평소에 이야기하는 ‘실존’은 ‘Here ans now’가 없는, 그리고 실천이 없는, 관념으로서의 실존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쓴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이 우리들 안에서 본성으로서의 기존의 유전자가 작동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 안에 있는 ‘예수의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냈다. 기꺼이 예수는 자신의 내면에 ‘예수의 유전자’를 작동시켜서 기존의 유전자가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시며 십자가에 오르시고야 말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실존으로서의 예수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하거니와 삶의 자리에서 실천적 삶으로 다가오시는 예수가 더욱 중요한 시절이다.

  오늘,
  감리교회가 돈과 권력이라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하여 많이 아파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길로 이끌어 가는 예수의 유전자는 감리교도들에게 요나의 물고기 뱃속의 경험을 통하여 니느웨로 가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기고도 고통스러워하는 엘리야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유전자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경험하는 통증이 상식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동력이 된다.
 
 

황창진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