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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라근성과 일본, 그리고 우리의 자세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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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11월 29일 (목) 01:52:39
최종편집 : 2018년 11월 29일 (목) 01:53:14 [조회수 :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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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라근성과 일본, 그리고 우리의 자세

— 문제는 본질에 있다 —

 

 

한글전용시대와 일제의 잔재

 

한글전용시대가 열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사실상 국한문혼용으로 학교교육을 받은 탓인지 필자는 어쩌다 정말 어쩌다 ( )안에 한자를 써넣는 식의 한자 혼용을 하기도 한다. 주로 쓰고자 하는 낱말에 동음이의어가 있어 의미에 혼동의 우려가 있을 때 그리한다.

예를 들어 ‘그는 그 일로 패자가 되었다’라고 쓴다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헷갈리기 쉬울 것이다. 아마 ‘패자’라는 단어를 싸움이나 경기에서 진 사람(敗者)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사람이 많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로 된 게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쓴 사람이 그런 의미로 썼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불효막심한 자식(悖子)이나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覇者)이라는 의미로 썼다면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 한 의미 파악이 어렵게 된다.

그런데 한자로 쓰지 않아도 쓰고자 하는 말의 의미가 분명한데도 굳이 한자를 쓰는 사람도 있고, 그에 한술 더 떠 한글 낱말 뒤의 ( )안에 한자를 써 넣는 것이 아니라 한자를 먼저 쓰고 그 뒤의 ( )안에 한글을 써 넣는 사람도 있는데, 필자로서는 그 이유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이다. ‘只今(지금)은 그 같은 그녀도 女高時節(여고시절)엔 꿈 많은 文學少女(문학소녀)였다.’ 한자를 병기하지 않는다 해도 의미 전달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로 어려운 한자도 아닌데 굳이 그 같은 표기방법을 택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싶다.

국한문혼용 시대에는 한자를 많이 쓰는 것이 유식하게 보이기라도 하다는 듯 되도록 한자를 많이 쓰고 어려운 한자에는 ( )안에 그에 해당하는 한글을 써 넣은 일도 많았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한글전용시대가 아닌가.

이에 뭘 그렇게 까다롭게 따지는 거냐, 그러면서도 당신은 ‘국한자혼용’이라 써야 할 것을 가지고 ‘국한문혼용’이라 쓴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필자도 일부 동의한다. ‘天’은 한문이 아니라 한자이다. 그리고 한문은 한자로 쓴 문장이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라면 일본사람들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일반인들도 ‘한자’와 ‘한문’라는 말을 구별해서 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을 무작정 칭찬하자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청년 시절까지는 정말이지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국을 비하하며 일본은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한국 사람을 가리켜 ‘엽전은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그 불행했던 일제 36년 동안에 일본인들이 ‘조선인은 어쩔 수 없다’(朝鮮人はしょうがない)라는 말로도 모자라 더 경멸하는 의미로 ‘선인은 어쩔 수 없다’(鮮人はしょうがない)라 했는데, 그것을 본떠 한 말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을 보고는 단결심이 강하다, 정직하다, 친절하다는 등등으로 칭찬 일색이었다.

일제의 민족정신말살정책의 잔재가 그렇게 끈질기게 오래도록 뿌리가 뽑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일본인은 친절하다며 우리도 그 면에서는 배워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일본의 친절과 위안부 할머니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은 뼈 속까지 친절한 사람들이다. 한 번은, 필자가 일본 체류기간에 있었던 일인데, 거주하던 시내 중심가 공터 저쪽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쳐 길을 물은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한 인부가 작업을 멈추고 달려와서는 따라오라 하더니 길을 가르쳐 주기 쉬운 길모퉁이까지 가서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어찌어찌 가라고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또 한 번은 일행 몇이서 어느 관광지에 놀러갔다가 시내버스를 탔는데, 출발하고 100m 쯤이나 갔을까 했을 때 기사에게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버스를 길가에 대어 세우더니 어찌어찌 가라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는 ‘알았다, 고맙다’ 하자 다시 출발했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한 친절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것으로 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1980년대 초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만원 버스나 지하철 같은 차 안에서 빈자리가 나면 옆 사람들이 무슨 쟁탈전이라도 벌이듯이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때이다. 그러나 일본에 가 보니 그렇지 않았다. 똑 같이 붐비는 차 안인데도 자리가 나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앉는 것이었다. 필자로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부러운 생각은 사라지고 말았다. 8,90대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흔들리는 차 안에서 휘청거려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가 짐까지 들고 쩔쩔매고 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좀처럼 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그들의 친절은 인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습관적이라는 것을 필자는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야 알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제 입에 든 것까지도 파내어 주고 싶어 하는 우리의 차고 넘치는 인정이 그들에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엔 상당히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일본인이 잘 가꾸어진 정원수라면 우리는 거칠 것 없이 하늘로 치솟은 원시림이라 느끼게 되었다. 손질이 잘된 정원수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에는 자연미가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밋밋하게 쭉쭉 뻗은 원시림은 속이 다 시원할 만큼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아름다움이라는 면에서도 누구라 해서 원시림을 가리켜 정원수만 못하다 할 것인가.

과장이 너무 심하다 하지 마라. BTS를 낳은 우리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예정되어 있는 BTS의 방송출연을 막는 그들을 보라.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참배, 역사가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는 우리 땅 독도에 대한 망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보이고 있는 파렴치의 극치 등등의 면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의 친절에 대한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단결심이 강하다 함은 국수주의적 이기심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요, 정직함이라 함은 그 정의조차 제대로 내릴 수 없는 혼미한 정신의 소유자들에 의한 평가에 불과하다.

 

 

‘섬나라근성’이란 ‘시야가 좁고 폐쇄적이며 옹졸한 성질’

 

그때 그 불행했던 시절 그들은 우리가 저희의 일본어를 쉽게 익혀 잘하는 것을 보고 조선인은 식민지인으로 알맞은 족속이라 했다. 저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말을 잘할 수 없는데, 우리의 뛰어난 언어감각에 느낀 부러움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 그들이 우리 땅에 들어와 저질렀던 비인간적 만행은 필자가 굳이 여기에서 지면을 소모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필자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일본이 만약 패전으로 저희 일본 같은 나라에 의해 점령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마 지금의 일본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저희가 우리나라를 침탈하여 저질렀던 것과 똑 같은 만행이 자행되었다면 아마 재기불능에 가깝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다행히도 일본을 점령한 것이 미군이었다.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에 도착하자 민주화를 주축으로 하는 농지개혁과 노동개혁을 통해 경제개혁에도 노력을 기울여 일본 부흥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자기들은 전쟁의 피해국이라고 아파 죽겠다며 엄살을 부린다. 그러기에 일본의 국민성을 가리켜 섬나라근성이라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우리의 국어사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이 ‘섬나라근성’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국어사전 <고지엔(廣辭苑)>에는 ‘시마구니곤조(島國根性)’라고 해서 그 설명을 ‘다른 나라와의 교섭이 적기 때문에 시야가 좁고 폐쇄적이며 옹졸한 성질’이라고 달고 있다. 원인이 ‘다른 나라와의 교섭이 적기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시야가 좁고 폐쇄적이며 옹졸한 성질’이라 한 설명은 자기들 일본인의 국민성을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시각으로 파악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집단에 친일파 후손들이 더 많이 포진되어 있을까 

 

여기까지 필자가 피력한 것만으로 본다면 일본인은 예외 없이 나쁜 사람들뿐이고 우리 한국인은 훌륭한 사람들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도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만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불행했던 일제 36년을 보자.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자들이 자기 동족인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필자가 여기에 그 파렴치한 짓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겠지만, 그들은 일제에 빌붙어 동족의 고통을 가중시킨 대가로, 일반 백성들이나 애국지사들이 자녀를 가르치기는커녕 먹을 것이 없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던 그때, 배에 기름기를 올리며 자식들을 많이 가르쳤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그래도 최악의 사태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8.15 광복을 맞았는데도 그들의 세상은 계속되었다. 다시 꾸린 우리 정부는 일제에 빌붙어 쌓은 그 알량한 경험과 많이 배운 자식들의 학식을 높이 사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대거 등용하여 썼다. 다시 친일파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는 지금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다. 반면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은 대개가 가난의 대물림으로 여전히 사회의 그늘진 곳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가끔 어느 집단에 친일파 후손들이 더 많이 포진되어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볼 때가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보수진영에일까 진보진영에일까 하는 그런 망상에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통계를 내 본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기도 한데, 글쎄 어떨지.

사족에도 못 미치는 말을 했는데, 이제 글의 매듭을 짓고자 한다. 문제는 무엇이 됐건 그 본질이 어떠한가에 있다. 본연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다. 일의 옳고 그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면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인가 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 같은 본질에 대한 것들을, 옳고 그름이나 합리적인 면에 대한 것들을 간과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은 한글전용시대의 한자사용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도 그렇고, 일본이 어떻고 한국이 어떠며 정치 같은 것은 또 어떤가 하는 것도 다 그렇다.

요즘 정치나 사회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왜들 이러는가 싶을 때가 많다. 말은 주로 한 집단이나 개인의 유불리에 대한 것에 집중되어 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말이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진영이나 당사자 자신에게 유리한 언행을 하면 찬사를 보내지만, 불리할 것 같은 언행에는 어리석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고서는 사회도 나라도 바른 길로 갈 수가 없다.

필자는 앞에서 일본인들의 친절은 인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습관에 의한 것이라며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그런 친절이라 할지라도 불친절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바람직한 것이라는 건 재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친절이 지금은 비록 그들만 못할지라도 넘치는 인정이 마음으로부터의 친절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일 뿐이고, 습관적인 친절보다는 됨됨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민족이다. 그리고 지금 그 가능성이 한창 물이 올라 상승세를 타고 있다.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불과 반세기만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낸 우리이다.

그러나 아무리 옥토라 할지라도 가꾸지 않으면 풍년은 기약할 수 없는 법, 본질을 살리는 거름도 주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그름이라는 잡초를 뽑아내며, 합리적으로 손질을 하지 않으면 풍요로운 수확은 어렵게 된다. 내로남불이나 진영논리로부터 벗어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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