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문턱에서 기웃거릴 무렵, 이 맘 때면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사랑의 김장 나누기’ 행사가 열린다. 바자회란 이름을 건 김장행사는 불우한 이웃을 강조하며 점점 대형 이벤트로 발전하고 있다. 빨강 고무장갑을 낀 숫자를 기네스북에 올리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판박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동네 YMCA도 연례행사로 김장나누기를 한다. 마치 전쟁 치루 듯 하는 김장담그기는 올해로 15년을 맞았다. 초기에는 SK와 같은 대기업이 후원하였으나, 지금은 지역의 시민단체와 교회, 개미 후원자인 개인들이 힘을 합쳐 말 그대로 사랑으로 김치를 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현수막 아래 쌓여 있는 빈 돼지저금통들은 모금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준다.

  행사는 주최 측인 Y 간사가 참가자들을 반갑게 호명하면서 분위기를 잡았다. 몇몇 시민단체와 소박한 공동체의 이름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한 기반 위에 행복과 나눔을 유지하고 있는지 느낄만하였다. 열다섯 남짓의 모임들은 ‘나눔의 집, 쉼터, 급식소,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 부모모임, 무명의 시민들과 Y 회원들’이지만, 우리 이웃의 작은 희망을 상징하고 있었다.

  올해는 해마다 반복해온 Y회관 건너 야외놀이터가 아닌 회관 지하 강당과 복도 등 좁은 실내에서 김장을 하였다. 첫 눈치고는 제법 많은 양의 눈이 내려 새벽부터 쌓였기 때문이다. 좁은 공간마다 절임김치의 포장을 뜯고, 여러 공정을 거친 후에, 완성한 김치의 재포장까지 역할분담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다만 김장 행위를 보여 주려는 행사가 아니기에, 금새 공장이 가동하듯 시스템이 작동하였다. 안양 Y의 공동김장 역사와 연륜을 보는 듯하였다.

  누군가 그랬다. “김장은 나르는 게 절반이상”이란다. 2톤 분량의 물을 뺀 절임김치와 여기에 버무릴 그만한 양의 양념 속은 적당한 비례로 순차적으로 강당으로 날라 와야 했다. 또 날라 오는 족족 버무린 김치포기들은 지하에서 1층으로 날라 가야 했다. 그런 무게감은 다시 8킬로의 소포장으로 분리하여 새 상자에 담겼고, 이를 이웃과 나눌 수 있도록 모두 360상자를 한곳으로 날라다 쌓았다. 정말 ‘절반 이상의 나르기’가 맞았다. 게다가 Y가족과 어린이들이 5상자씩 책임 분담하여 동네마다 배달한다니 그 전달은 단순한 김치만이 아닐 것이다.

  김장은 흔히 여자들 중심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근래 3년 전까지 계속된 우리 집 김장도 대부분 이웃집 여성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었다. 거의 유일한 남성인 아버지는 여러 여자들 틈에서 제 때에, 적당한 몫을 나르는 일을 도맡았다. 반제품의 절임김치나 가끔 쉬어가는 릴레이식 배달이 아니었다. 모자란 재료를 소리 높여 부르면 절인 배추 건, 양념 속이건, 섞박지 용 무든 제 때에 받쳐주기 위해 허리 펼 짬도 없이 분주하였다.

  그 일 뿐이랴. 앞마당에서 자란 배추를 미리 거두고 씻어 소금에 절이는 준비과정과 김장을 다 마친 후에 서울 인근에 사는 사남매 집에 김치택배 포장작업까지 굽은 허리는 펼 새가 없으셨다. 이렇게 ‘나르는 게 절반 이상’인 김장을 해마다 사변 치루듯 하셨으나, 그 공로를 알아주는 자식은 없었다. 김치상자는 노인의 가는 허리가 감당하기에 얼마나 무거운가!

  때가 되면 내 집 현관 앞으로 배달되는 ‘당연한’ 김치상자들이었고, 시골 사는 부모의 ‘마땅한’ 의무처럼 생각한 사랑의 선물이었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더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게 되고서 부터이고, 어머니의 기억력이 차차 시든 배추처럼 사그러들면서 부터다. 연례행사처럼 치루던 우리 집 김장 이벤트는 이젠 옛말이 되었고, 반가운 김치택배는 더 이상 어림도 없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2013년 12월, 한국의 김장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김장을 위해 서로 모이고, 함께 나누는 행위가 인류가 보존할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 붙였다. 대기업의 반짝 후원이 더는 계속되지 않아도, 큰 눈이 내려 갑자기 옹색한 공간에서 100여명이 복잡하게 움직거릴망정 그 수고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두 번 생각하니 작은 김치상자일망정 때가 되면 당연히 나누어야하는 익명의 선물은 아니었다. 나, 남을 구별하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여럿이 함께 버무린 아주 구체적인 가난한 사랑인 것이다. 오늘 ‘사랑의 김치 나누기’에 참석한 이들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Y 이사장은 이렇게 외쳤다. “고생해주십시오. 함께 갑시다.”

  해마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김장 이벤트들이 열린다. 그게 어떤 이름의 김장이든지 앞으로도 함께 고생하면서 더불어 이어가야할 인정 많은 고마운 유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