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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흥하기 위해서라면 예수는 쇠해도 좋은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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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11월 03일 (토) 18:37:51
최종편집 : 2018년 11월 10일 (토) 00:52:32 [조회수 : 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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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떠오르면 밤을 밝히던 별들은 자취를 감춘다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0)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이 생각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끼곤 했다. 자신보다 예수님을 먼저 생각한다고 하는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세월이 많이 흐른 후였다.

세례자 요한, 그는 빛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고 이 땅에 온 사람이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다(요1:6-8 참조). 그는 이 같은 자기의 정체성을 아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자기가 증언하는 대상으로 빛 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와 더 이상의 증언이 필요 없게 되었으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한 것이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면 밤을 밝히던 별들은 자취를 감추는 것이 정한 이치, 마찬가지로 빛 되시고 진리 되신 구세주가 오셨으니 지금까지 등불을 들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며 길을 안내했던 선지자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 그분의 뒤로 숨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자신을 신부로 알아 신부로서의 할 일을 유감없이 해 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예수와 이스라엘 백성으로 대표되는 우리 믿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어 주는 역할이었다. 신랑 되신 예수와 신부 된 이스라엘의 혼인 준비가 그의 사명이었다.

혼인이 끝났는데도 중매쟁이가 신랑 주위에서 얼쩡거려서는 안 된다. 그의 역할은 신랑 신부 둘이 만나 혼인을 하는 데까지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쇠하여’ 사라질 것을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명을 완수한 그는 자신의 말대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신부된 우리가 해야 할 일뿐이다. 그런데 신부가 해야 할 일은 신랑에 대한 정절을 지키며 신부로서 바로 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부된 우리가 바로 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신랑과 신부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고전12:27)이라 말씀하시고, 그 ‘몸’이 곧 ‘교회’이며, 그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골:1:18 참조). 누구나 아는 것처럼 교회는 그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모여 유기적인 관계를 같는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믿는 사람들 자체가 교회인데 어떻게 떼어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믿음의 나는 교회의 한 부분이다. 교회가 몸이고 나는 그 몸의 무엇인가의 한 지체이다. 손이나 발일 수도 있고, 눈이나 귀, 코나 입일 수도 있다. 어떻든 많은 지체 중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지체들에게 명령을 내려 움직이게 하는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썩은 동아줄은 생명줄이 될 수 없다

이에 믿는 사람치고 그 정도의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거냐고 하품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필자라고 모르지 않다. 그러나 보라, 우리 교회들의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교회를 대표한다는 담임목사가 머리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어 버렸다.

그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교회에 돈을 많이 바치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하나님께 헌금을 힘에 겹도록 드리는 것이 신앙의 척도라고 말만은 점잖게 하지만 맘은 온통 잿밥에 가 있다. 나는 아니라고 반박할 목사들도 많겠지만, 그렇다면 목사님은 기복신앙 같은 것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세속의 물길이 터져 교회로 흘러듦으로 세인들의 지탄을 받도록 타락케 한 것은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육적 욕구의 충족에 초점이 맞춰진 세속적인 것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라면 삼십대 초반에 십자가의 형틀에서 목숨을 잃은 예수 그리스도와 온갖 핍박과 가난을 숙명처럼 앉고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도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 하는데, 기복신앙만 걷어내어도 우리의 교회들은 문제의 대부분을 털어내는 결과를 얻어 영적 풍요와 함께 세상으로부터의 칭송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로 세속의 물길을 튼 것은 누구인가. 목사들 아닌가. 주일성수 잘하고, 헌금을 힘에 겹도록 하고, 교회봉사 열심히 하면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건강하며 장수한다고 하는 설교를 말씀선포라는 미명으로 목이 쉬도록 열을 올려 한 것이 목사들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그는 쇠해야 하고 나는 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예수는 쇠하고 설교자인 자신은 흥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는 말이다.

구복신앙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여 쇠하게 하는 반기독교적 사고의 산물이다. 예수는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 목사에게만 있고 교인들에게는 없는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선악과를 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돌린 아담처럼 목사가 가르친 것이니 내게는 책임이 없다 할 것인가.

목사들 중 혹자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설교를 하는 것이라 항변하기도 한다. 축복을 해도 발꿈치로 꾹꾹 눌러 해 주지 않으면 교인들이 떠나니 도리가 없다고도 한다. 목사들 중에도 교인들 중에도 예수는 간 데 없고 자기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다 해도 제대로만 위한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살겠다고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것이 썩은 동아줄이니 뭐라 하는 것이다. 정말 살기를 바란다면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 생명줄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는데, 누군들 아니라 하겠는가. 그럼에도 기복신앙에 빠진 것은 그것이 썩은 동아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셨다

교회에서의 분쟁이나 다툼들을 보라. 명분은 하나님의 뜻 어쩌고 하지만, 실은 자기의 주장을 내세워 판을 키움으로 극단의 상황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는 간 곳 없고 인간의 혈기만이 남아 교회의 상처를 깊게 한다. 마치 ‘그(예수)는 쇠하여야 하겠고 나는 흥하여야 하리라’라고 외치는 꼴이다.

문제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정말로 있느냐에 있다. 머리 되신 예수의 뜻에 따를 의지가 있느냐에 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박이 터지게 싸워 교회에 상처를 줄 것이 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필자도 동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을 덮어 두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옳은 자신이 생각을 접음으로 교회를 보호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솔로몬의 명재판을 안다. 재판관 솔로몬은 사실 관계를 밝히는 것보다 자식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어미의 마음을 보았다. 자기의 생각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교회세습이 그런 것처럼 사단이 괴물 같이 큰 입을 벌려 교회를 통째로 삼키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 터지게 싸우면 안 되고 자기의 생각을 접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라면 어떻게 자기의 옳은 생각을 접을 수 있겠는가. 물론 싸워야 한다. 그러나 박이 터지게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것이지 육적인 것이 아니다. 저들은 불의와 악을 무기로 하여 교회를 삼키려 하지만, 우리는 진리와 선을 무기로 하여 싸워야 한다.

싸움에는 현장에서 직접 하는 방법도 있고, 현장을 떠나 간접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다. 현장을 떠나는 것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우선 보기로는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이 지고 죽인 형 가인이 이긴 것 같지만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는 쇠하여야 하겠고 나는 흥하여야 하리라’라고 할 것인가의. 입이나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예수의 쇠함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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