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성가대에서는 가을 산행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총무가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어서 계룡산에서 가장 힘들다는 장군봉을 오르기로 했다. 나는 20여 년 전에 거기를 갔다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번 등산에는 끼고 싶지 않았다. 그곳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곳곳에 높은 암벽이 많아서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오르내려야 하는 힘든 코스이기 때문에 내 나이에 그 봉우리에 오르는 것은 분명 무리였다.

그런데 총무가 옛날과는 달리 험한 곳에는 철제 사다리를 설치해 놓았기 때문에 나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고, 성가대의 단합을 위해서 동참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성가대를 위해서 동참해 달라고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장군봉에는 오르지 않고 중간에서 쉬운 길로 내려오겠다고 총무에게 양해를 구하고 동행하기로 했다. 험한 산을 오르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먼저 내게 어려움이 생길 것이고 대원들에게도 누가 될 것이기 때문 내 나이에 장군봉을 오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원들은 9시 반에 교회에서 오 장로가 운영하는 밀알장애인복지관의 중형 버스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웃 동에 사는 유 집사가 자기는 약속이 있어서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일찍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가려는데 자기 차로 가지 않겠느냐고 전화해왔다. 그러면 나도 유 집사와 같이 갔다가 유집사가 내려올 때 함께 내려오면 될 것 같아서 교회로 가지 않고 유 집사의 승용차로 장군봉 밑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우리는 정시에 갔지만, 대원들을 태운 버스가 예정보다 좀 늦게 와서 10시 반이 넘어서야 산행을 시작했다.

총무가 정상에 가기 어려운 사람은 중간에서 내려가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유 집사 등 내려갈 사람들과 함께 행동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중간 지점에 갔는데, 일찍 내려가야 한다던 유 집사를 포함해서 모든 대원이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나 혼자만 내려가야 할 판이었다. 전체 분위기를 깨는 돌출행동은 피해야 할 것 같아서 힘들더라도 같이 가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런데 총무를 찾으니 총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모두들 올라가는데, 당신 혼자 내려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올라가다 보니 철제 계단은 보이지 않고 밧줄을 타고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 어찌하겠는가? 힘이 들더라도 따라가는 수밖에. 나는 줄이 있는 곳에서는 줄을 잡고, 줄이 없는 절벽은 나무나 바위를 잡고 반쯤 기어서 오르내렸다. 정강이가 두어 군데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쳐서 좀 아팠지만, 젊은이들에게 약한 것을 보이기 싫어서 아프다는 소리도 안했다. 그런데 정상에 가까워지니까 총무가 말한 대로 철제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다리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해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바위를 타는 것보다는 발을 딛기가 쉬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니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팠지만 한 칸씩 올라가다 보니 정상이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마는....’ 양사언의 시조가 생각났다.

정상에 올라서니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모두 내 발 밑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산이 온통 붉은 옷을 입고 있어서 장관이었다. 그 장관을 내려다보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저절로 나왔다. 높은 산을 힘들여 오르는 것은 바로 이런 기분 때문이다. 총무가 나를 강권하지 않았으면, 이 상쾌한 기분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힘은 들었지만 따라오기를 잘 했다는, 끌고 올라온 총무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려오는 길은 아주 가파른 비탈길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뛰어내려가기도 했지만, 헛디딜까 봐서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힘주어 옮기다 보니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발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웠다. 전에는 전혀 겪어 보지 못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다리가 풀린다는 말을 듣기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마음먹은 대로 쉬운 길로 내려가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내 다리로 내려가야 할 판이었다. 천신만고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인 듯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양쪽 허벅지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성가연습을 해야 하니까, 특별히 오늘은 곡 중 솔로를 맡았으니까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서 8시 반에 차를 몰고 교회로 갔다.

오늘은 대장이 1부 예배 기도를 맡아서 부대장이 준비 예배를 인도했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난 다음, 부대장이 퍽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지난 주일에 22명이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금요일 낮까지 3명이 사정이 생겨서 못가겠다고 연락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 참여하지 못한다던 사람들 중에서 3명이 자기들도 가겠다고 해서 결국 22명이 함께 산행을 하게 되었지요. 참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복지관 버스가 중형이어서 좌석이 넉넉할 줄 알았더니 장애인들을 위해서 특별히 개조한 버스여서 좌석이 22석이었습니다. 이것 놀라운 일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부대장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참석자들의 숫자 22명을 채워주시고 사람 수에 맞게 22석의 버스를 준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행부에서 조금 무리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몇 분은 장군봉까지 못 갈 줄 알았는데, 결국 모든 사람이 올라갔고, 염려했던 것과 달리 무사히 다녀왔으니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자기는 이번 기회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얻었노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렇다면, 장군봉을 올라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한 내가 내 의사와는 달리 대원들을 따라 올라간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상까지 그 험한 바위벽을 오르내리면서 올라가느라 힘들었고 내려오는 길에는 다리가 풀렸지만, 그 험한 산행 동안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셨던 것 아닌가? 하나님은 나를 붙드셔서 나를 장군봉에 세우시고 내 생애에 마지막으로 그 아래에 펼쳐진 장관을 보여주신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내 힘으로 오르고 내려온 것으로 생각했으니 내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번번이 당신의 은혜를 잊고 사는 나 같은 자와 함께 하심을 감사하면서 예배에 참석했다. 오늘의 찬양곡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를 편곡한 곡이었다. 나는 그 곡 중에 나오는 바리톤 솔로 부분,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를 노래했다. 어제 산행을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이 곡의 노랫말이 겹치면서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 부분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흐느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리에 잔뜩 힘을 주고 무사히 노래를 마쳤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절망에 빠져 있을 때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내 손을 잡아 주셨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음을 잊기 일쑤였고,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었다.

그 노래를 다시 불러 본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