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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없는 말로 담아내는 어느 인생의 마음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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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10월 24일 (수) 17:55:55
최종편집 : 2018년 11월 10일 (토) 00:52:18 [조회수 : 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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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속의 화초가 될 것인가, 뿌리 깊은 나무가 될 것인가

이번 추석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내 인생행로에 또 한 번의 어려운 고비가 닥쳐왔습니다. 기간으로 보면 한 달이 채 못 되어 지나갔으니(아직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지만)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로 인한 고통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역경이었습니다.

연휴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몸이 점점 좋지 않아져 동네 의원을 찾았으나 임시방편일 뿐 명절을 전후하여 견디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연휴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 마지막 날인 지난달(9월) 26일 종합병원을 찾았더니 바로 입원을 하라하여 방법이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선택의 여지없이 의사의 말에 따랐습니다.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맹장을 잘라내는 것 같이 간단하지도 않은 수술도 받았습니다. 이달(10월) 13일(토)에 퇴원을 했으니 18일간의 입원이었습니다. 지금도 회복 중이니 발병에서 일상으로의 완전한 복귀까지 1개월로는 안 될 것 같고,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 18일간의 입원동안이 필자에게는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어려운 고비’이라든가 ‘역경’이라해 놓고 ‘은혜의 기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할 사람도 있을 줄로 압니다만, 그게 사실이니 어쩝니까.

인간치고 어려운 고비 없이 평탄한 길만 걸으며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를 받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늘 위로’를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약 믿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지 아니하고 그저 곱게만 자란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하여 ‘온실 속의 화초’라 하기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으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타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지요.

우리는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 찬송을 하기도 하는데, 그렇습니다. 그리스천은 그래야 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해서는 작은 풍랑에도 좌초되고 맙니다.

나무는 바람이 있어 뿌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풍랑’이나 ‘바람’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풍랑’도 ‘바람’도 1년 내내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심한 ‘풍랑’이나 거센 ‘바람’이라 할지라도 그리 오래지 않아 지나가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지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나간다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면 배는 뒤집히고,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에게 지지 않으려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이 부족하여 질 수밖에 없다 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시니 우리는 지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있는 것이지요.

 

‘징계’는 ‘징벌’과 같지 않습니다

저의 인생길에는 참으로 많은 고비가, 역경이 있었습니다.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것들이었으나 살아 온 발자취를 뒤돌아보니 그것들은 한결같이 은총이었습니다. 그 한 고비 한 고비를 지나는 동안 저의 신앙은 작을지라도 한 단계씩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전력도 있어 이번의 극심한 육체적 고통 가운데에서도 병실에서의 저는 두려움 아닌 희망의 은총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죽을병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그렇다면 이번의 어려운 고비가 건강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겪어 온 모든 역경의 고비들은 하나 같이 징벌이나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며 반추해보니 그랬습니다. 제가 겪은 한 번의 고비에는 그 심적 고통이 어찌나 컸던지 불과 2,3개월 동안에 71kg이었던 체중이 62kg까지 준 적도 있었으나, 저는 그때 사람들이 흔히 성령체험이라고들 하는 믿음의 체험들을 여러 번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느껴 보기도 하고, 성찬식 때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어 입에 들어오는 체험도 했습니다. 세족식 때 저의 발을 씻겨 주시는 분은 성도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느껴지는 외에도 여러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신비주의자도 아니요, 그 같은 체험에 특별히 큰 의미를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에 관한 간증 같은 것을 한 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걸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때의 그 고비가 주었던 아픔과 그 같은 체험들이 저의 신앙을 한 층 성장시킨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30년 가까이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지금도 기도 중에 가끔, 정말이지 가끔 그때 일이 생각나면 깊은 은혜에 잠기기도 합니다.

또 한 번의 고비는 생활인으로서 저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큼 중대한 시점에서 다가왔는데, 욕심 많은 저는 그때 그 많은 욕심 가운데 상당부분을 덜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어려운 고비들을 저는 적잖게 넘어 왔고, 그때마다 크건 작건 신앙의 성장을 은총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질병을 통한 고비도 징벌이나 채찍 아닌 은총으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병상의 육체적 고통도 은총을 내려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희망으로 완화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8)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징계’는 ‘징벌’과는 많이 다릅니다. ‘징벌’은 ‘죄’에 대한 ‘벌’을 의미하나, ‘징계’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을 받은 자들’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히12:11)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징계’는 은총으로 이어지는 ‘연단’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어려운 고비들은 주로 신앙성장을 위한 것이었으나,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게 육신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그 육신적 은총 또한 덤으로 주신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은 육적 건강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신앙성장이 배제될 수는 없고 그럴 리도 없다는 것은 재언을 요치 않습니다. 그러니 늙은 말년에 이 무슨 횡재인가 싶기도 합니다.

이번 고비로 말미암아 건강은 이미 그 이전보다 더 좋아지는 징조를 보이고 있으니 그로 인해 감사한 마음이 일어 그게 더 큰 감사를 부르리라는 예감이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신앙성장에 대한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까지 겹쳐지고 있으니 이 같은 일을 보고 은혜 위에 은혜라 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사랑의 첫 단계 배려는 나 아닌 남에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얼마 전부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는 말씀에 사로잡혀, 그리 되어 가기 위해 기도하며 나름의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요6:28)라는 질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6:29)라 대답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살짝 망각한 채 교회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며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봉사며 전도와 헌금 같은 것에 꽂혀 예수라는 푯대는 보지 않고 달리다가 본질을 놓친 것이지요.

교회 건물마다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를 멋들어지게 장식품처럼 만들어 세워 놓고, 교회성장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몸집을 불려 헌금이 늘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들처럼 욕심을 키워 가고, 그것도 모자라 교회를 제 것인 양 자식에게 못 물려주어 안달까지 나는 현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서 예수는 믿지 않아 자기 일을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어떻게 헌금에 눈독을 들이고, 교회세습을 하며, 교인들을 상대로 성추행 같은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각자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닐까요? 아닐 리가 없지요. 나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정확히 예수를 믿는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저의 구체적인 생각은 지난번 칼럼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나>에 어느 정도 드러내보였습니다만, 한 가지 더 내보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요, 정을 맞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으니 마음에 나 있는 모를 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누가 뭐래도 사랑의 마음인데, 사랑은 남을 향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배려가 사랑의 첫 단계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배려는 자기 아닌 남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번 고비를 통해 자신이 정을 맞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모서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 들어내는 데에 온힘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해이해지려 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손과 발을 눈앞에 떠올리며 그러기로 했습니다.

 

기도하며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애를 쓰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한다면 늙은이 주제에 주책이라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이니 어쩝니까. 저는 이번 고비를 넘으며 그 같은 얼간이가 되어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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