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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외침] 회의가 없어진 교회들을 향하여개신교회에"목사무오류설" "목사신탁통치" 같은 천주교적인 사제의식이 있다!!
당당뉴스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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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9월 12일 (화) 00:00:00 [조회수 : 4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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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이민교회의 실상을 다루는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필명으로 올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장로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당당뉴스가 책임지고 실명을 보호합니다. 여러 글들은 無順입니다.(당당뉴스 운영자)

"회의" 라는 우리나라 말을 여러가지 한자어로 표현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네 가지를 들라고 하면  (1)會議, (2)回議, (3)會意, (4)懷疑가 있다. 그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회의(會議)는 두 명 이상이 모여서 서로 의논하고 뜻을 나누는 모임이라고 한다.
(2) 회의(回議) 는 주관자가 기안하여 관계자들에게 순차적으로 돌려서
     의견을 묻거나 동의를 구하는 일이다.  
(3) 회의(會意)는 뜻을 알아챈다는 것이다.
(4) 회의(懷疑)는 의심을 품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이민교회들 교회 속에서 어찌된 영문인지 진정한 의미의 수평적인 회중회의(會議)는 사라지고, 목회자 또는 당회의 결의가 성경적으로 옳은 것인지에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동의해 주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되어 있는 수직적인 회의들(回議,會意),  또한 안건의 의도성에 의심을 품게 만드는 "회의 아닌 회의들" 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천주교회와 차이점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교회내 정치제도의 일종인 회중회의"를 빼놓을 수 없다. 천주교는 교황->추기경->교구신부->평신도라는 성직서열하에서 조직화된 모양으로 1700년간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뿌리가 바로 "교황무오류설" 라고 알고 있다. 한마디로 모든 캐톨릭교회안에서 교황의 가르침이나 교회법에 따르는 "사제들의 회의들(回議,會意)" 은 존재할 수 있지만 함께 나누는 "수평적인 회중회의(會議)"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인 교황이 오류가 없는 성직자라는 캐톨릭선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며, 성직자들과 평신도를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함께 "회중회의(會議)" 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예배(미사)와 훈련과 양육과 신앙교육"에 있어서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아며 교회법으로 볼 때 그 자체가 불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캐톨릭교회내에서 평신도들이 교회의 부패 가능성에 대한 감사와 견제에 대한 어떤 견제와 감사기구를 존재한다는 것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건강한 견제가 없는 상태의 인간조직은 아무리 고등성을 띤 종교집단이라고 하여도 항상 부패하게 되어 있다.

미국천주교회가 작년 한 해에 성직자들의 미성년자 또는 여성에 대한 성학대, 성추행, 성폭력의 손해배상금으로 물었던 합의금이 8천만불이상이 된다고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개교회 개교단 중심의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개신교회가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이유는 교회나름대로의 견제와 감시장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는 교회내, 노회내, 교단내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목회자나 교인들이 반교회적,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를 요소가 있으면 자체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한 장치들은 사회법보다 훨씬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목회자와 성도들에 대하여 치리과 권징으로 형태로서 파직, 사임권고, 휴직, 출교, 수찬정지, 파면, 면직청원, 노회고발, 노회축출, 이단판정이라는 교회법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 있는 견제장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이러한 장치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경우, 성직자들이 어떤 반사회적인 불법의 의혹이 있으면 평신도들이 변호사들을 내세워 바로 민형사법에 따라 고발해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교회통치시대에 만들어진 "천주교성직자 차별화제도"가 지금 세상법이라는 직접적인 부메랑을 맞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회 속에도 암시적인 묵계하에서 "목사무오류설" "목사신탁통치" 와 같은 천주교적인 사제의식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는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회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껍데기는 분명히 프로테스탄트교회인데 그 내용을 보면 천주교회보다 훨씬 교묘하게 '성직자와 일반신자"를 차별화하고 "목사신탁통치"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 이라는 개신교회의 존재성과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본주의다" 라는 말도 예사로 말한다. 피상적으로는 교회의 머리도 기초도 예수그리스도라는 측면에서는 틀림이 없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때 그 의도성이 "신본주의의 교회정치"를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암시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위임통치는 성직자들인 목회자" 라는 주장을 은밀하게 암시하고 내포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목회자만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은 "캐톨릭적인 차별화된 사제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교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놓으며 교인들은 비인격적인 몬스터들이 될 확률이 대단히 높다. 이미 근래의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교인들이 벌이는 비인격화된 몬스터적인 모습을 우리들은 지켜 보고 있다.

목회자가 불륜하고, 횡령하고, 거짓말 하고, 축재를 하여도 "목회자는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우리 목사님은 불륜하고 살인해도 좋다"고 막가파적인 몬스터 교인들과 죽은 듯이 침묵하는 교인들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들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기대를 접어버리고 교회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며 그 통계가 고스란히 10년동안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민교회의 메인스트림인 40대 50대 이민1세 현장 목회자들은 "수평적인 회중회의(會議)" 라는 것을 한국에서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수평적인 회중회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다는 말이다.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명령하달식의 집단문화, 조직문화, 군사문화가 뿌리박혀 있다. 50대의 분위기는 후배가 선배보기를 하늘 보듯이 하라는 문화 속에 자랐다.  

신학교선후배, 목사안수선후배, 단독목회경력선후배......등 목회자들 세계 안에서 조차 이러한 문화가 그대로 배여있다.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 속에 배여있는 한국적인 문화정서와 의식과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것은 당치도 않다는 말이다. 그런 정서와 의식과 가치관으로 목회를 하는데 "수평적인 회중회의"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거나 필요성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배운 적이 없는 모르는 것을 절대로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아무리 운동신경이 발달된 사람이라도 한번도 탄 적이 없었던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스키를 타라고 하면 100%로 넘어지게 되어 있다. 배우거나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문화에 "수평적인 회중회의(會議)"라는 문화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교환하는 "회의(會議)"라는 이름으로 모여도 결국 목회자의 뜻만을 추종하고 알아채리는 "신선함과 창조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일방통행식의 회의(回議) 또는 회의(會意)" 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이민교회)의 실정이라는 것이다.

서울 금란교회의 K목사가 불륜의 합의금으로 교회헌금을 지불하고, 횡령과 배임으로 검찰에 고발되어 구속당하고 재판을 받았을 때 그의 변은 "금란교회=김목사" 라는 등식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내가 바로 교회인데, 내가 불륜의 합의금으로 교회돈을 사용하고, 내가 열었던 회의에서 정식으로 통과시켜서 돈을 사용하였는데 어떻게 불법이냐?" 는 것이었다.

담임목사가 주도하는 당회와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자기 뜻만을 맞추어 놓은 안건을 전부 통과시켜 놓고는 제직회의나 공동의회가 통과 시켜 주었다는 일방통행식 회의(回議) 또는 회의(會意)" 로 만들고서는 자기정당화나 자기합리화의 도구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K목사에 반대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치리하여 출교조치를 취하였다고 출교당한 중직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교회내 각종 회의의 사회를 맡고 있는 사회자가 담임목사인데 어떤 용기있는 성도가 담임목사의 뜻에 반하는 발언을 할 수 있으면 불편한 저항을 할 수 있겠는가? 거의 할 수가 없다. 저항을 한다면 어떤 이유로든지 분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카리마적인 담임목사가 목회하는 상당수의 교회들 가운데 교회의 회의에 다수결로 통과된 안건이니 더이상 잔말이나 군소리를 하지말라는 "입막기 보증수표" 로 회의를 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전체 통계는 아니지만 나눔과 뜻을 모으는 진정한 의미의 "성령이 유기적으로 역사하는 회중회의"가 사라진 십수개 이민 교회를 취재하여 분석해 보면 공통적인 현상은 평소에 "(1)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운동을 하거나 함께 소풍을 가거나 함께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다 (2) 목회자와 성도들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사람"이라는 관계를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성도로서 서로 가슴을 열고 삶과 인격을 나누는 소그룹 성경공부시간 및 소그룹 기도시간을 전혀 갖지 않는다" 것이다.

교인 1천명이 모이는데 교회의 담임목사가 "나는 너무 고독합니다" "나에게 동역할 수 있는 동역성도들이 없다" 라고 고백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나만이 신탁된 성직자" 라는 카톨릭적인 사제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아니면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우울성 정신질환자" 일 것이다.

서구교회들은 "회의"가 많았기 때문에 망해가고 한국교회는 "회의"보다는 기도와 예배가 많기 때문에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다면서 "교회내 회의 폐지론"을 주장하면서 무조건 목회자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망먼을 퍼뜨리는 몰지각한 부흥사들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였으며, 예수님께 직접 배웠던 사도들이 있었던 예루살렘교회는 회의가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서 사도들은 자기들의 권위만을 주장하지 않고서 나누었으며 회의를 열었다.

한마디로 나눔과 기도와 뜻을 모으는 "회의"는 사도들의 권위가 있었던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한 모습이기도 하였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이 한 제자들을 뽑을 때, 사도들인 11사도가 일방통행식으로 맛디아를 뽑은 것이 아니었다. 간절히 함께 나누고 기도한 후, 제비뽑기방식으로 맛디아를 택하였던 것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율법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교회는 회의를 열어서 서로 진지하게 나누었며 해결책을 제시하였고 대표를 뽑아서 의견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무조건 믿어라 무조건 따라라 하는 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에 있었던 회의의 모든 촛점은 항상 "복음증거" 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회의" 는 90%이상이 "교회운영"에 관련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복음증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더구나 그 회의의 내용은 "목회자의 목회방침 또는 당회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수기역할을 하는 도구"로 전락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이런 식이 반복되면 교인들은 "목회자와 직분자들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빠져들게 되고 형식적인 종교생활만이 남게 되는 살았다 하나 죽은 교회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미국교회는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교회내 직분의 수직구조를 깨기 위하여 20세이상이면 시무장로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임기는 3년으로 제한하며 그 후에 다시 시무를 위해서는 재신임투표후 3년을 시무하며 그 후에는 1년을 반드시 휴무하도록 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교회에서는 항존직이라는 시무장로직도 공동의회에서 그 사람을 시무집사로 공천을 하여 피택을 시키면 과거에 시무장로였던 사람들이 시무집사로 섬기도록 하는 역발상의 교회들조차 있다. 한국교회에서 시무장로하였던 사람을 시무집사로 공천하고 피택한다고 하면 아마 목회자 또는 공천위원들과 피택당사자 간은 원수지간이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열리는 다양한 모임과 제직회나 임시, 또는 정기공동의회에서 "어떻게 하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우리들은 과연 복음증거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우리들은 차세대들의 교육내용이 과연 말씀대로 적절하게 교육되어지고 있는가, 전도와 선교와 구제에 집중하고 있는가" 를 고민하고 기도하는 회의의 모습을 가지는 곳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민교회들 90%는 작은 교회들이다. 작은 교회들이 가지는 최고의 장점은 "모든 성도들이 얼굴을 맞대고 자주 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 모임을 회의처럼 진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혈연, 지연, 학연을 초월한 영원히 함께 주와 함께 할 형제자매들의 관계성 속에 있다.

성도수가 많아지고 교회 조직이 비대한 대형교회는 성도들간의 유기적인 관계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군중 속에 고독감, 목회자와 점점 더 멀어지는 교제상실감" 을 느낄 수 있는 불행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마 "진정한 인격적인 나눔이 있는 회의(會議)는 사라지고 위에서 하달된 뜻에 대한 기계적인 동의만 해주는 회의(回議)와 알아서 아부하고 알아서 뜻을 모으는 회의(會意)와 이것이 과연 내가 꿈꾸는 교회인가라는 의심의 회의(懷疑)" 만 늘어갈 것이다.

90%이상의 작은 교회들인 이민교회들이 작다는 장점을 잘 살리는 길은 "회의가 곧 교제의 모임이고 교제의 모임이 곧 회의 모습"을 가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꿈꾸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고 연습시키고 체험시키는 1차적인 모든 책임은 당연히 지도자로 세움받은 목회자에게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모인 성도들이 피어나고 자유할 수 있는 가르치는 직분의 책임과 권한을 목회자에게 주셨는데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내 생각만을 고집하고, 하나님 주신 것을 땅에 파묻어 둔다면 복지부동한다면 불원간 주님 앞에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책망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고착화 되어 있는 묵었던 틀을 깨는 패러다임의 대전환 속에서 모험이 따르지만 두 배의 열매를 남기기 위해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마음문을 활짝 열고서 함께 나눔의 도전을 한다면 "충성스러운 종" 이라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민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골수까지 박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교회내 유교적이며,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명령하달식 문화에서 하루빨리 탈피하여 모두가 함께 나누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제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나누고 하나 되는 참된 교제의 회중회의(會議)를 가지는 성숙한 모습" 을 통해서 자라는 차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자산으로 물려줄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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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220.188.51.24)
2006-09-13 09:44:28
목회자와 성도의 차이
좋은 의견을 잘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쓰신 분이 저의 답글을 볼 순 없겠지만 이글을 함께 보는 믿음의 분들에게 작은 저의 의견을 드립니다.

신학교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는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깝지도 말고 멀어도 안 된다." 지금 저의 생각은 그 말씀이 딱 맞다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짊어가지고 가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어줍니다. 때로는 가정문제이기도 하고, 사업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부부문제, 자녀 문제, 같은 교인간의 문제.

목사에게 털어놓으면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겠지라는 믿음으로 고백하는 교인들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으려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어찌 목사를 믿고 털어놓은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두렵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교인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신학교 때 선배 목사님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할 때 가방을 들어주는 사람이 목사를 쫒아낼 사람이다."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는 동감합니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한 번 삐뚜러지면 목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니까요. 그에게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던 고민들이 그대로 공격의 화살이 되어 돌아오니까요.

목사는 목사대로 어려움이 많답니다. 이상하게 성경대로 목회를 하려고 하면 더 어려워지고, 세상의 방법대로 목회를 하면 조금은 쉬워지지요. 여기에 목사가 빠지는 유혹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상 생각합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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