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크리스천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나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8년 09월 30일 (일) 23:13:25 [조회수 : 333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공간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크리스천이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성령님도 없다.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의 정도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구체적 실체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믿는 우리를 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성경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라 말하는데, 그렇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가. 필자로서는 그것을 바르고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포괄적으로,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라는 말로, 이보다 정확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예수님도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 되지만, 이 만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본질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흔히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로 시작되는 개념으로도 충분치 않다. 굳이 말하자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고 한 찬송가의 가사가 가장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죄투성이인 우리 인간이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누구도 그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범주 안에 들 수 있는 것과 들 수 없는 것을 분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나름대로 그 사랑의 실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예수님께는 전혀 없는데 인간에게는 많은 것들을 골라 자신에게서 하나하나 지워 가는 것이 그것이다. 아니 하나하나라기보다 조금씩 없애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욕심, 미움, 거짓, 시기, 질투, 중상, 모략, 이간질, 음란, 자기자랑, 자기현시욕, 공명심 같은 것들은 예수님께는 전혀 없으나 인간에게는 너무 많아 마음을 더럽게 한다. 그런 것들이 인간의 인간됨을 저해하여 사단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킴으로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그런 유의 것들을 조금씩 없애 가는 것이 그만큼 예수님의 마음에 가까워지게 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돌처럼 딱딱하지도 차갑지도 않고, 부드러우며 따스하다. 한없이 포근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쉬어도 좁지 않을 만큼 넉넉하다. 그러니 우리의 돌 같이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을 조금씩이라도 녹여 내어 새 솜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 되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을 넉넉함을 행해 넓혀가야 할 것이다.

 

 

인격이 밑바닥을 기고도 신앙 좋은 사람은 없다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이다. 앞에 열거한 것들도 따지고 보면 많은 부분이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에서 적용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토록 소중한 대인관계를 가장 원활하게 발전시켜 갈 수 있는 방법을 들어 보라 한다면 어떠한 것을 제시하겠는가.

필자라면 어떠한 경우,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대적하거나 대항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대적할 만한 일을 아예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고, 부득이 그런 일에 부닥쳤을 경우에는 먼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어쩌다 보니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무조건 지는 것이 제일이다.

사람을 대할 때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불문하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눈길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눈길은 마음이 거칠며 차갑고서는 가질 수가 없다. 마음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대인관계는 만남으로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직접이 아니라 서면이나 통신수단을 통한 것 같은 방법으로 관계를 갖는 것도 간접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면 만남이라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인관계가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면, 그 준비, 그러니까 마음을 조금이라도 비워 깨끗하게 하고, 부드럽고 따스하며 넉넉한 마음이 되게 하는 연단과 훈련은 홀로 흘리는 땀이 최고이다. 사색이 마음을 기르는 최적의 단련장이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은 나 홀로 기르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그것의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쯤으로 필자가 기도를 말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 챌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기도, 기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 방법으로 기도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 중에서도 기도만큼 큰 은총도 없을 것이다. 기도를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과 단 둘이서만 만나는 독대라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다. 만약 기도가 없다면 믿는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고 참담하겠는가.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고 하는 말이 실증적으로 입증되게 하는 것도 기도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 소중한 기도를 하다가 뭔가 생각이 떠오르면,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하여 영감이 떠오르면, 하던 기도를 멈추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에 관한 사색에 들어간다. 필자가 쓴 글들 중에는 이렇게 하여 얻은 것을 소재로 한 게 많다.

기도 중에 떠오른 생각이 사색을 통해 어느 정도 숙성되고 정리되면 그것이 자신의 신앙에 반영되게 해 주시라고, 인격의 자양분이 되게 해 주시라고 다시 기도를 시작한다. 신앙의 성장이란 인격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인격이 밑바닥을 기고도 신앙 좋은 사람은 없다. 그러고도 만약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신앙과 인격은 별개의 것인가

 

우리 기독교가 지탄을 받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인격향상이 배제된 채 신앙성장을 강조해 왔다는 사실이다. 교회 밖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교회봉사 잘하고, 헌금 잘하고, 전도에 열심이면 믿음이 좋다고 치켜세운다. 그러니 그런 유의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도, 아니 그러기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이다.

그 같은 믿음은 그게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아닌 남을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 대인관계는 윤활유 다한 기계의 작동처럼 되고 말 것이다. 대인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과의 관계는 나빠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다 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거짓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믿음은 최고의 가치일 수밖에 없다. 만약 믿음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크리스천일 수 없다. 입으로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라 찬송을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조그마한 손익에도 예수를 외면하고 마는 우리가 아닌가, 되돌아볼 일이다.

나에게 있어 믿음이 최고의 가치라면 그것을 위해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 믿음은 인격이니 인격에 흠이 될 일이라면 기를 쓰고 하지 말아야 하고, 인격의 고양을 위해서라면 값 비싼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인격이 있어 인간인 것이다.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인 것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인격이 있어 크리스천인 것이다.

보라.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 했던 사람이 대통령씩이나 해 먹은 사람이란다. 다스는 누구 것이냐는 유행어의 발원지가 분명함에도,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인격도 인격이고, 올린머리 손질이며 얼굴에 분칠하는 데에 하루 두 시간씩이나 공을 드린 것도 인격이라면 그게 거지의 인격이 아니고 뭐겠는가. 아니 없어 밥 얻어먹는 것은 죄 될 리 없지만, 저들이야 감옥소행이 마땅치 아니한가.

인격이 땅바닥을 기어 인간답지 못한 인간에게 부드럽고 따스한 마음을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매한가지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 같은 불행은 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나에게는 그런 요소가 조금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필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저들보다 더 못한 부분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전면적으로 볼 때 인격이 저들보다 못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마뜩치 못했던 일엔 채찍질하며 회개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만 의의 길로 가려고 기도하며 애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 은혜이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은 행복하고, 그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고 따스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그러하면 남을 보는 눈길 또한 그렇다는 것은 재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는 이미 천국이 도래해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신앙을 기른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인격을 기른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