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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도 크게 미친 사나이, “걸레처럼 살아라!”-海石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민족 독립투쟁-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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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9월 30일 (일) 21:49:40
최종편집 : 2018년 10월 06일 (토) 13:33:32 [조회수 : 4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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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도 크게 미친 사나이, “걸레처럼 살아라!”
-海石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민족 독립투쟁-

노 종 해(CM리서치)

 

   
▲ 손정도 목사(孫貞道, 1882.7.26.-1931.2.19.)


1. 머리말


    한국기독교에 대해 통상적인 견해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하며 시작하려 한다. 첫째 는 한국기독교 신앙의 특색은 보수신앙으로, 복음주의적 보수신앙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고 보는 점이다.  즉 복음주의적 보수신앙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이다. 이렇게 단순히 평가할 수 있을까? 오히려 민족의 현실에서 성경을 보고 기도하며, 연합하여 역사적 현실에 참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신앙과 활동이 곧 민족의 현실과 직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기독교의 신앙을 타계적인 신앙으로 현실 도피적인 말세 지향적 신앙으로 보는 점이다. 윤리의식도 없고 사회적인 책임도 없는  신비적인 도취 속에서 신앙을 찾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부흥운동이 한국 역사적인 현실을 도외시하고 도피하는 방면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적 신앙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과 순종, 헌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현실에 대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현실참여로 사회개혁과 나라 사랑으로 나타난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한국기독교의 체험적 신앙이 정치 사회 현실참여와 민족 독립운동과 직결된 점도 보아야할 것이다. 이는 한국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일제하에서도 끊임없이 굽히지 않고 일어난 민족독립투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셋째는 한국기독교의 독립운동과 투쟁 방법이 소극적인 비폭력, 비무장, 비무력 항쟁이란 평가이다. 이러한 온건한 투쟁방법이 곧 애국계몽운동, 교육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성경의 몇몇 구절에 집착하여 당연한 기독교의 민족운동 방법으로 인식되고 또한 강요되어 왔다.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기독교에 대하여 이러한 점을 강조하여 회유하여 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한국 기독교의 민족 독립운동 방법이 비폭력, 비무장 항쟁으로만 이루어졌는가? 교육운동, 애국 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은 이러한 투쟁과 직결된 점은 없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서도 개인적으로 혹은 교회, 교단적으로, 조직적인 단체로 이웃과 함께 무력항쟁과 투쟁은 적어도 해방 이전까지 끊이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과제들을 염두에 두고 민족 독립투쟁을 위해 신앙적 결단으로 일생을 바친 손정도 목사님의 생애와 민족 독립투쟁운동을 살펴보려 한다.


2. 출생과 성장


    손정도 목사의 자는 호건(浩乾)이며 호는 해석(海石)이다. 1882년7월26일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토착 유학자이며 부농인 가정에서 손몽룡과 오신도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6세 때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셨다.(神學世界3號) 23세 청년시절 손정도는 1904년 겨울에 관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러 평양으로 길을 떠나던 중 조(趙)씨 성을 가진 목사 댁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조목사가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교리를 손정도에게 설명하는 동안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 결단이 있은 후 다음날 아침 조목사는 손정도의 상투를 자르고, 손정도는 평양 길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서 사당을 부수는 활동 등의 신앙적 결단을 보이고 증거하였다. 이 일로 집안에서 “미쳐도 크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게 되었다.(이하, 참조-손원일:‘나의 履歷書“ 한국일보, 1976.9.29.-12.21.)

    그날 밤 집안 어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손정도는 눈 덮인 들판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 신앙메모에 의하면 그날 밤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청년 손정도는 속옷 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 덮인 산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다 실신하였고 인근 주민들에 의해 구출을 받았다. 손정도는 조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 소개로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 Moor. 1874-1963) 목사 만나게 되었다.

     손정도는 평양 문요한 선교사 집에 머물면서 일하였고, 문 선교사는 손정도를 1905년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고학하면서 1908년 숭실중학을 졸업하였다. 손정도는 13세 때 2살 위인 박신일(朴信一) 양과 결혼하였고, 시집에서 견디다 못한 부인은 평양으로 남편을 찾아 왔으며, 평양기독병원에서 일하면서 남편의 학비를 도우며 자녀를 양육하였다. 당시 자녀로는 진실(眞實), 성실(誠實) 두 딸이 있었다.

    손정도는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서울로 유학길에 올라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로 훈련 받았다. 또한 서울지역 교회를 출입하면서 이승만, 이동령, 장지영, 이시영, 이준, 노백린, 조승한, 이갑, 최남선, 이필주, 전덕기 등과 어울려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손정도는 무어 선교사가 담임하던 남산현교회 전도인이었고, 1909년6월 감리교 연회에서 진남포.삼화 구역 전도사로 파송 받아 목회의 길에 들어섰으며, 1910년 신학회 과정을 수료하였다.(감리교 연회록1909년6월. p23)


3. 만주선교와 독립운동


    그의 목회는 곧 민족독립운동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젊고 열정에 불탔던 아버지는 설교 때마다 일제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규탄했다”고 술회 했다. 교회는 부흥하였고, 선교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당시 많은 애국지사들과 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못 이겨 만주 등 해외로 이주해 감으로, 감리교회는 만주 선교사 파송이 시급함을 알아, 만주선교를 계획하던 중 1911년 목사안수 받는 손정도 목사를 만주지역 선교사로 조선 감리회 매연회(朝鮮 監理會 每年會)에서 파송하였다.(그리스도회보,1911.7.15.) 손정도 목사는 만주의 안동, 길림을 비롯한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선교사가 되었고, 그의 전도활동은 사실상 독립운동이었다. 1912년3월5일 제5회 조선 예수교 감리회 연회 때에도 손정도 목사를 만주 “봉천 북 지방” 할빈 남방에 파송키로 하였다.(제5회 조선 예수교 감리회 연회록.p16)

    그러나 국내에선 기독교 지도자들을 탄압하고 민족운동의 근거지를 말살키 위해, 1912년에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한105인사건아 있었듯이, 만주에서도 기독교 애국지사들을 제거키 위해 가쯔라(桂太郞) 수상 암살음모 사건 때문에 검거열풍이 일어났다. 가쯔라(1849-1913)는 청일전쟁 때 일본의 제3사단장이었으며, 전후에는 대만 총독을 거쳐 3번 일본 수상이 된 인물로써 제1차 내각 때 영.일동맹을 맺고 노일전쟁을 강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한 한국인들의 원수였다.

    또한 일본 수상인 가쯔라는 1905년7월29일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테프트(W.H. Taft) 육군장군 사이에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묵인한다는 가쯔라-테프트 밀약(密約)을 맺었던 자이며, 제2차 내각 때 한일합병을 강행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애국지사들은 이 가쯔라를 암살하려 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러시아 방문길의 가쯔라 수상을 암살하려 했다는 협의로 일경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 경무총감부로 30여명과 함께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얼굴형태가 달라지기까지 하였고, 이후 출옥 후에도 건강이 악화되었다. 일본 경찰은 모의사실을 끝내 부인하는 손정도에게 아무 협의를 캐지 못하고 풀어 주었으나 곧 손정도 목사가 황해도 금광을 습격하여 북간도의 한인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기를 대주려 하였다는 협의로 다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거주제한 1년이란 행정처분 받고, 전남 진도로 유배되었다. 손목사는 진도귀양살이 중에도 복음전파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본업”에 열중하였고 진도 주민들을 깨우쳤다.

    1913년에 열린 감리회 제6회 연회일기를 보면 1913년6월7일 당시 노블 감리사는 “중화민국”에서 선교하다가 진도로 유배당한 선교사 손정도 목사의 편지를 연회 회중에게 낭독하였는데, “노블 감리사께서 해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회장께서 말씀하시기를 손정도씨는 먼섬가운데 유배를 당하고 난중에 있을지라도 예전에 사도 요한이 발마섬에 있을 때에 신령한 은혜와 묵시를 더 많이 받은 줄 믿는다”고 설명하였고, 1913년6월2일 연회 회기 중에 손정도 목사와 그 가족을 위해 “금년에는 30원씩 주기로 결의하였을 뿐 아니라 중화민국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결의 선포하였다.

    당시 감리교회는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기도할 뿐 아니라 계속 월급을 지급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연회결의를 보면, “금년에는 외국선교는 정지하고 국내에 교회 없는 구역에 전도인을 파송키로 하였는데 먼저는 정선, 평창에 전도인 2인을 파송하엿는데 월급은 20원씩 주고 반이비까지 지출키로 가결하다”고 한 것을 보아 손정도 목사를 특별히 기억한 것을 볼 수 있다.

     손정도 목사가 진도 유배를 끝내고 1914년 돌아왔을 때 감리교회는 그를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서울의 동대문교회 담임자로 파송하였다. 이해에 우리는 전덕기 목사가 별세하신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정도 목사를 준비해 주셨고, 손정도 목사를 통해 신앙적 민족 독립투쟁은 계속 되었다.

    손원일 제독은 이 시절을, “아버지의 명성은 서울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일예배 때는 교회마당에도 신도들이 가득했다.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이 찾아오고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된다”고 술회하였다.

    당시 감리교회는 얼마나 멋있고 살아있는가, 목회일선에서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라, 재판받고 투옥되고 유배된 목회자들을 아끼고 목사의 가족까지 돌보고 보호해 주며 계속 파송시켰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요한 일을 맡길줄 아는 점은 오늘날에도 한국기독교계에 살아 있어야할 점이다.

 

4. 국내 목회와 독립운동


    손정도 목사는 1년간 동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며 민족독립의 신앙을 고취시키며 운동하다가 1915년에는 감리교회의 모교회이며 애국지사들이 드나드던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요새인 정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하여 당시 김종우 전도사(후에 감독됨)와 함께 목회를 1918년까지 하였다. 교인 수는 급증하여 1917년에는 교인 수가 2,283명을 헤아려 단일 교회 중 가장 큰 교회로 부흥 성장하였고, 설 자리가 없게 되어 교회 증축공사도 하였으며 예배 풍경도 변화시켜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도 없애 버렸고, 교회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 장낙도, 최병헌, 손정도, 김유순 목사-제7회 연회 고 전덕기 목사 추도회 때 정동교회에서(1914)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1917년 협성신학교를 제5회로 졸업하였고, 1918년에 장로 목사(Elder)로 안수를 받았으며, 만주선교사로 재 파송 받았으나(연회록,1918.p33), 이해 말 자진하여 신병을 치료하며 쉬겠다는 표면적 이유로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제12회 연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렸는데 당시 연회록에 보면 손정도 목사에 대해서 “당국의 압력으로 휴직 및 제명당한 연회원 손정도”라고 기록되어있다. 이를 볼 때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당국에 극심한 사찰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참조, 1919년 제12회 연회록,p234)

    손원일 제독은 “그 무렵 국내외에는 독립운동이 무르익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분주히 오가는 사람을 만나곤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신애(李信愛) 여사는 “대한문(大韓文) 앞의 감격(感激)”이란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님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1918년 봄, 손정도 목사님이 원산에 오셨다. 나는 김확실, 이승은, 김마리아 세 사람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초안한 휴전 조약원칙 가운데서 약소민족을 위해 지하공작에서부터 일할 것을 약속하고 결사 선서하였다”(아아 三月, 여성동아,1971.3월호 부록)

    손정도 목사는 3.1운동 거사 때 33인중에 민족대표로 들어갈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즉, 당시 세계1차 대전 후 전후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 이 회의에 민족대표를 밀사로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을 만천하에 고발하려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손정도 목사사는 먼저 초상복을 입고 상해로 가면 당시 이화학당 총교사이던 하란사(1875-1919) 여사와 의친왕 이강(1883-1955) 공을 상해에서 만나 파리로 밀항시키는 계획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1919년1월 중순 상해로 무사히 빠져갔으나 의친왕과 하란사는 각각 중국 중국 상인으로 변장하고 국경은 넘었으나 안동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바람에 계획은 포기되었고, 그후 하란사 여사만 다시 망명을 기도하다가 1919년1월에 북경까지 갔으나 동료들의 환영만찬 때 먹은 음식 때문에 죽고 말았다. 이는 일제의 간첩 배정자가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설이 있다.

 

5.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과 만주에서의 활동

 

   
▲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돐(1920.9.)-둘째줄 중앙 좌측, 손정도 의장

 

    1919년 3.1독립운동이후 애국지사들은 상해로 모였고, 4월11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이 때 손정도 목사는 이광수와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을 제의하여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내며 임시정부의 일들을 수습키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군 무기기금 모금운동을 하였다. 또한 대한 애국부인회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첫 임시의정원 회의는 29명의 의원이 참여하였고, 의장(議長)에 이동령(李東寧)과 부의장(副議長) 손정도(孫貞道)를 선출하였다. 국호(國號)와 년호(年號)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결정하였고, 관제(管制)는 “국무총리제”(國務總理制)를 채택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조직하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는 실제로 정부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국무총리 이승만을 위시하여 국무위원들이 법무총재 이시영(李始榮)을 제외하고는 상해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무위원들을 선출하여 정부를 조직하였지만 실제로 상해에 없기 때문에 미취임(未就任)의 공백상태가 되었다. 이를 극복키 위해서 확충하고 강화시킨 것이 “의정원”(議政院) 개편이었다.

    임시의정원은 곧 1919년4월13일에 임시위정원법을 수립하여 선거구를 개편하고, 첫 議長에 孫貞道를, 4월25일에는 國務總理 代理로 李東寧을 선출하여 정부기능을 발휘케 하였고, 재원방침(財源方針)을 결의하여 재정 확충하는 일에 착수 하였다. “상해임시정부는 議政院을 중심이 된 議員內閣制라 할 수 있다.(참조:金榮秀: 大韓民國 臨時政府憲法論, 三英社1980.p83-85)

   제3차 회의 때 각 도별 지역별 의원을 선정키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의원수(議員數)는 의정원 법 23조에 의해 국내(國內) 8도 및 중령(中嶺), 노령(露嶺) 미주(美洲) 등 11개 지구의 51명이였다. 각 지구별로 위원을 선출하여 4월30일부터 5월13일까지 임시의정원 제4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때 35명의 의원이 출석하였고, 이 회의는 임시의정원 법 21조에 의해 의장(議長) 손정도(孫貞道), 부의장 신규식(申圭植)을 선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 臨時議政院)을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국민대표기관으로써의 의정기관(議政機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의장인 손정도는 임시의정원을 발의한 분이였고, 처음부터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시의정원 법에 의한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통합수립(1919.9.13.)에도 공헌한 분이다.
 

   
▲ 손정도 목사, 이동영,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김규식 등-이승만 상해임시정부 도착 환영식(1920.12.28.)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사건을 보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인 손정도 목사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평양에서 활동한 비밀결사 대한 애국부인회 활동을 보면, 총재인 오신도(吳信道) 여사는 손정도의 모친이었으며, 평양지회 서기였던 손진실(孫眞實) 여사는 손목사의 장녀였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손정도 목사는 3년간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민족 대동단결과 독립운동 집결지 등을 형성키 위한 계획을 가지고 1921년 만주 길림(吉林)으로 갔다.

    손정도 목사는 실제적이며 투쟁적인 민족 독립운동을 기하기 위해,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 노병회”(韓國勞兵會)를 1922년10월28일에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교육회(상해)를 1919년11월24일에 박은식과 함께 조직하였고,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부를 상해(上海)에 1920년에 조직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1920년 이후에는 길림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농민합작사(農民合作社)를 설립하여 굳건한 독립운동 투쟁 기반과 민족 대단결을 기하는데 총력을 다 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우선 길림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벽돌건물에 내부가 50평쯤 되는 건물을 세우고, 목사관과 함께 건축하였다. 신도는 200여 명이 되었고, 의지할 곳 없고 아무 힘없는 이주민들의 구심점을 이루었으며, 떠돌아다니는 독립투사들, 일경에 쫓겨 다니는 독립투사들의 투숙처와 연락처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동포들을 신앙으로 뭉치게 하였고, 억울한 사람들을 해결해 주는 목회활동도 하였으며, 필생의 사업으로 간도에서 약간 떨어진 액목현(額穆縣)에 3천일경(日耕) 되는 농토를 구입하였다. 농부 한 사람이 하루 동안 일할 수 있는 넓이의 땅이 1일경이므로 대단한 땅임을 알 수 있다.

    손정도 목사는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 고향 강서의 유산을 모두 처분하였고, 만주일대의 애국지사와 농민을 상대로 주식까지 발행하여 구입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만주에 흩어진 동포들을 한 곳에 정착시키고 독립운동을 기하려 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교회에 학교도 세워 교육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만주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일제는 만주 침략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손정도 목사는 최후까지 굽히지 않고 이를 정리하여 북경으로 가서 계속 투쟁하려 하였다. 그 당신 손목사의 가족들은 1929년 성실(誠實)의 신병과 유학으로 봉천에 있었고 손목사는 단신으로 길림에 남아 있었다.

    손정도 목사는 1931년2월19일 길림에서 50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그가 바라고 기도하며 외치고 힘썼던 조국광복은 보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가신 것이다. 손원일 제독은 “그곳 액목현의 한 동포집에서 저녁을 드신 후 갑자기 피를 토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이 나중에 들은 아버지의 최후이다”고 통곡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지병인 위궤양으로 병사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1931년2월21일자 동아일보 신문에는 간단한 별세 보도가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손정도 목사는 1962년 건국 대 공로 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동작동 국립묘역으로 이장 되었다.

    손목사의 가족은 2남3녀로 부인 박신일(朴信一) 여사와 장녀 진실(眞實), 차녀 성실(誠實), 장남 원일(元一, 초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 차남 원태(元泰, 의학박사), 3녀 인실(仁實. 이대교수, 한국여성단체 협의회 회장, 한국YWCA회장)이시다.

 

6. 손정도 목사의 조직, 활동에 대한 정리


    손정도 목사님이 힘써 조직 활동하신 민족 독립투쟁을 정리하여 소개하면서 마치려 한다. 앞으로 이방면의 연구가 계속 활발히 진행되기를 바라면서 간략히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려 한다.

1) 상해 임시정부 활동-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임시정부 최고지도자 중 한 분으로 참여하셨다. 특히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셨고 독립군 무기를 지원하는 군자금을 위해 활동하셨다.

2) 대한적십자회 총재-1919년10월1일 상해에서 조직할 때 상임의원으로 활동하시며 회장으로 봉직하였다. 감리교 현순 목사, 장로교 김병조 목사도 의원이었다.

3) 흥사단 극동임시위원부- 미주에 있는 흥사단의 지부로 1920년 안창호와 함께 설립하였다. 당시위원:안창호, 손정도, 이광수, 차이석, 주요한, 이규서 등

4)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1919년11월24일  상해에서 조직 되었다. 회장은 박은식 선생이었고, 손정도 목사는 서무로 활동하시었다.

5)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독립군 양성과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본부는 상해에 두었고 조국광복에 공헌하기 위해 7년 동안 1만 명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100만원 이상의 전비(戰費)를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이전에라도 독립전쟁을 개진할 때에는 이사회 결의로 참가 출전한다고 했다.

    勞兵會는 1922년10월1일 상해 佛祖界에서 金九, 孫貞道, 趙尙燮, 金仁全, 李裕弼, 呂運亨 등 7인이 발기에 관하여 협의하였고, 동년 10월28일에 같은 장소에서 발기총회를 열었다. 보통회원 17명, 특별회원 4명이었고, 7년 동안 1만 명의 老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을 전개할 것과 100만원 이상의 戰費를 마련한다는 내용의 회칙을 통과시켰다.(이하, 國史編纂委員會:日帝侵略下韓國三十年史 六券, 探究당 1971. pp882ff. 참조)

    노병회 제1회 이사회는 11월2일에 열렸고, 이사장에 김구, 군인양성의 勞工部長에는 손정도, 부원은 여운형, 최준 이었다. 勞兵會는 1922년12월에 이동건을 하남성 감전군사강습소에, 백운서를 북경 학생단에, 주무원, 윤광원을 병기학교인 개봉병공국에 파견 유학시켰고, 吳冕稙을 개봉의 군관학교에 유학시켰다. 또한 1932년1월5일 제4회 정기총회때 孔國宣은 북경 학생단에, 정국진을 감전군사 강습소에, 崔天浩, 蔡君仙, 朴熙坤 등을 洛陽학병단에 유학시켰으며, 1923년5월6일 제9회 이사회때 河南省 낙양에 여운형을 파견하여 장교, 병사, 기술자의 양성을 부탁토록 하였다.

    1923년에 보통회원 19명, 특별회원 9명에 불과했으나, 임시정부 간부들로 조직된 까닭에 기반이 튼든든하였고, 1924년에는 회원이 43명으로 증가하였다. 1924년1월에 공국선과 백운서가 졸업하여 우수한 장교가 되어 상해로 돌아왔으며, 1924년4월에는 勞兵會 파견으로 군사교육 받는 자가 7명, 兵工학습자가 2명, 군사 학습자가 3명이었고, 전비조성비는 369원이었다.

    1925년4월에는 전비조성비는 388원이 되었고, 회원도 51명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1926년4월 김구가 이사장직을 사임한 후 勞兵會임원들이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고 불경기로 회비도 잘 모금되지 않았다. 1928년부터는 중국정세 변동으로 특별회원으로 군사학교 입교자가 불가능케 되어, 1930년2월 회원이 31명으로 감소되고, 전비는 710원을 조성하다가 1932년10월8일 10년 만기를 채우고 해산하였다.

6). 농민합작사 운동(앞에서 기술하였으므로 생략함)

 

7. 맺는말


    필자는 손정도 목사님의 막내따님 되시는 손인실(孫仁實, 梨花女大교수,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장로와 한국YWCA 회장실에서 대담한 내용(1982.3.17.)을 정리하며 마치려 한다. 이때 손인실 회장은 부친의 좌우명을 말씀하면서, 아버님(손정도)의 생활과 모습을 밝혀 주었다.

    첫째는 걸레 같이 살라는 것이다. 비단 옷은 특별한 때만 입고 보통 장롱 속에 넣어 두지만, 걸레는 항상 필요하면서도 하찮게 여김 당해도 요긴한 것처럼 걸레처럼 살라는 것이다.

    둘째는 돈은 받을 생각 말고 주라는 것이다. 아버님의 주머니에는 있는 돈은 늘 독립운동을 위해 다니는 사람들과 동포들에게 주고 가정을 위해서는 내놓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가정살림은 모친이 평소에 나가 일하여 받은 것으로 근근이 이어 왔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며 어머니의 고생을 말씀하셨다.

    셋째는 파벌싸움, 고향, 지연 등으로 분열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대동단결을 늘 주장하며 실천하셨다.

    넷째는 장례를 준비하는 자세를 지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므로 해군의 중요성을 말씀하셨고, 장남 손원일 제독은 이를 기억하고 실천하여 해군이 되었고, 바다를 지키고 개발해야함을 주장했다고 술회하였다.

    다섯째는 실제적인 문제도 중요시한 점이라 했다. 우선 먹고 살아야 독립운동 할 수 있다고 하셨으며, 이에 길림에 농토를 구입하여 정착시키는 운동을 하셨다고 회고하며 술회하시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민족사와 세계의 변천에 대하여 어떠한 신앙적 결단과 의식이 있는가? 도대체 기독교신앙이 역사적 현실과 유리되어 잇을 수 있는가? 한국감리교회의 자랑스런 목회자요, 한국기독교와 민족의 지도자이신 해석 손정도 목사의 생애와 활동은 우리 가운데 이어져 살아 있어야 한다. 그분의 신앙이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교단의 차원도 넘고, 민족사회 차원으로 나갔으며, 그의 신앙은 이념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역사적 현실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 역사에 참여하였다. 바로 이 길이 한국기독교의 부흥과 성장의 요인이요 방향인 것이다.(rch)

 

   
▲ 손정도 목사 묘역(국립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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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조선 예수교감리회연회일기(1910-1929)
-孫元一: 나의 履歷書. 한국일보, 1976.9.29.-12.21.
-國史編纂委員會편: 日帝侵略下36年史,제6권. 서울, 探究堂 1971.
-金厚卿:, 신재홍: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한국민족운동연구소편. 1971.
-神學世界 第三第三號
-韓國獨立運動史. 社團法人 애국동지 후원회 발행. 1956.
-申洪植: 仁川內里敎會略史. 1922.
-宋吉燮: 정동제일교회 구십년사. 1977
-金榮秀: 大韓民國 臨時政府憲法論, 三英社1980.
-姜萬吉:韓國現代史, 創作과批評社,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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