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성악가 친구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습니다.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의 독창회에 함께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때마침 모 예술 고등학교에 다니는 2학년 여학생이 레슨을 받고 있어서 스승과 학생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참관했습니다. 처음에는 열정적이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노래가 선생님의 학창시절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빠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아이의 깊은 곳이 지금 대학입시라는 장벽 앞에서 불안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어린 성악도는 그 불안을 애써 감추며 싸워내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까치발을 하면서까지 몸을 앞으로 잔뜩 기울이며 열심히 노래를 했습니다. 분명히 밝은 이탈리아 노래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노래가 슬프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 처음 보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이 어린 영혼이 지금 노래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대한민국에서 클래식 노래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이렇게 재능 있는 아이들을 음악의 정글로 던져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물론 스승도 현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레슨실의 벽에는 10계명과도 같은 모양으로 스승의 강조사항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마치 사자성어와 같이 ‘강한멘탈’이라는 문구가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보드랍고 섬세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져야할 음악가들이 음악을 배울 때부터 ‘강한멘탈’을 요구 받아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음악교육의 현실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경쟁률과 고액의 레슨비를 감당해야하는 치열한 대학입시, 서열화 된 대학 구조, 입시 후에도 이어지는 끊임없는 경쟁과 이게 도대체 삶인지 아니면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1막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그들만의 리그, 허영의 세계... 당장 입시에 성공한다 한들 이 아이가 앞으로 이 땅에서 성악가로 살면서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자니 슬프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친구로부터 제자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음악계를 떠나 목사가 되고 나니 음악에 관하여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됨을 발견 할 때가 많습니다. 가장 커다란 발견은 ‘모든 사람의 노래는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연한 것을 왜 몰랐는지 지나간 세월이 억울할 정도입니다.
교회에 다니는지 물어본 후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부모가 자기 아이들의 노래를 가장 좋아하고 기뻐하듯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너의 노래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란다. 머리와 입과 성대에 가득한 노래에 대한 생각들을 마음으로 끌어내려야 한단다. 눈앞의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너의 호흡을 하늘결 세로 방향으로 연결시켜 그 안에서 마음껏 노래하렴!”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갑자기 울기 시작합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며 연신 눈물을 훔칩니다. 아! 이 어린 영혼이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일까요? 다행히 아이는 이내 눈물을 거두고 한층 편안하고 예쁜 표정으로 노래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역시 ‘강한멘탈’만큼은 제대로 배웠나봅니다.
레슨 말미에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말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어른 음악가들이 이렇게 노래 부르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쟁적 입시환경을 만들어 놓아서 미안 하다고, 이렇게 된 상황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결코 함몰되지 말고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겨내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어느 새 가을의 문턱입니다. 예전에는 가을이 되면 많은 분들이 성악가들이 부르는 가곡을 즐겨 들었었지요. 가곡만이 줄 수 있는 멋과 낭만이 있었고 그것을 향유하는 멋쟁이들이 많았었습니다. 요즘에는 연주회장이 음악 하는 사람들만의 사교장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도 성악가들은 대중음악의 득세나 대중의 무지를 탓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혹시, 이 뒤틀린 구조 속에서 ‘강한멘탈’에 집착하느라 잃어버린 무언가 때문은 아닐까요?
이 가을의 문턱에서 문득, 저의 스승님이 부르신 ‘아 가을인가’가 듣고 싶어집니다. 작곡가 나운영과 성악가 김영환의 만남은 한국 가곡 역사의 가장 멋들어진 ‘콜라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적인 풍류를 서양음악에 절묘하게 녹여낸 이 명곡을 이토록 대범한 느린 템포로 한 줄기 가을바람처럼 시원하게 부를 수 있은 성악가는 제 스승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아 가을인가 봐
물동에 떨어진 버들잎보고
물 긷는 아가씨 고개 숙이지
스승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성악가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라! 사람의 진정한 됨됨이는 꾸며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좋은 사람의 노래가 좋은 노래란다” 당시에는 분명 그 말씀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목사가 되어서야 그 말씀을 깨닫다니 저는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