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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산 사건을 값싼 쇼로 만든 사람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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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8월 30일 (목) 23:58:07
최종편집 : 2018년 11월 10일 (토) 00:49:44 [조회수 : 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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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바조의 '이삭의 희생'(1603년)

아브라함이 늦게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모리아 산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는 사건은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이다. 그런데 그 감동적인 사건을 값싼 쇼로 만든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면 도대체 누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단 말이냐고 발끈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짓을 한 사람이 히브리서 저자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되느냐고, 어떤 근거로 그런 엉뚱한 말을 하느냐고 나를 책망하려 들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먼저 우리가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가를 알아보고 나서, 히브리서 저자가 그 감동적인 사건을 값싼 쇼로 만들었다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드러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한때 이성적인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아브라함 내외는 늙은 사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여러 번 그들의 자손이 창성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믿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라가 웃었다가 하나님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이렇게 그들은 이성적인 논리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때, 그들 내외는 하나님이 이성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경험하고 나서 불합리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했다. 논리적으로 전혀 불합리한 것을 확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신앙은 터무니없는 역설이라고, 신앙은 사고가 멈추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했다.

이제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한 터튤리안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합리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알게 된 것을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사자를 통해서 그가 당신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을 아셨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전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던 아브라함 내외가 불합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그들이 윤리적인 단계에서 신앙적 단계로 도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11장 18절에서 하나님이 이삭의 아들을 통해서 자손을 이어가게 하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창세기 21장 12절을 인용한다. 그러고는 바로 이어서 아브라함은 그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가 이삭을 번제물로 드려도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11:19)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이런 히브리서 저자의 언급은 A를 했으니 다음에는 B가 따를 것이라는 논리적인 발언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그런 논리적인 발언은 아브라함 내외가 신앙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윤리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말 아브라함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했을까? 물론 아브라함은 여성의 생리가 끊긴 사라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만약 그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다 해도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실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생각하고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가 생각한 대로 이삭을 살려 주었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모리아 산 사건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합작하여 연출한 깜짝 쇼에 불과한 것이 된다. 속된 말로 그 사건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짜고 친 고스톱이 된다.

히브리서 저자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들은 19절에 나오는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를 주목하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삭을 바치려는 그 순간에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음성을 듣고 그를 죽이지 않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마치 죽은 아들을 되돌려 받은 것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비유컨대” 이하의 내용이 강조될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문장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한 그 사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삭을 죽이면 그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게 하실 것이라는 논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염두에 없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진해서 이삭을 주고 나서 잔인하게 빼앗아 가겠다는 하나님의 불합리한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곳에서, 이성적 사고가 그치는 곳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모범을 보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히브리서 저자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네가 정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냐?”고 나를 힐문할지 모르겠다. 나는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라고 본다. 그런데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기록은 기록자들이 생존한 시대의 문화·역사적 상황의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문화·역사적 상황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지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글이 될 수 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 19절 같은 글은 저자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구약의 기록을 해석한 글인데, 이러한 인간의 해석은 해석자의 생각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해석 가운데에는 엉뚱한 것도 있을 수 있다. 나는 전에 <당당뉴스>에 올린 ‘바울의 어처구니없는 실수’(2017-09-14)에서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실수했다는 것을 밝힌 일이 있다. 그리고 곁들여서 창세기에는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사라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11:11) 알았기에 이삭을 낳았다는 히브리서 저자의 언급은 분명히 오류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거기서 오류를 범한 히브리서 저자는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도 그 감동적인 드라마를 값씬 쇼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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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47.216.79)
2018-09-01 13:59:42
오호, 통재라! 성경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아는 것이 너무 없습니다!
최재석 선생의 논리는 오로지 文字的으로만 협소하게 성경을 해석하여 전체맥락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취지인데 히브리서 기자의 취재가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이 그러한 잘못된 취재를 용인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데 대한 분석이 없다보니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글을 올리는가?”하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속성을 고의로 曲解했는가? 히브리서 기자의 觀點은 하나님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관점인가? 사랑도 많지만 질투도 많고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함이 전혀 없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하나님을 한쪽 면만으로 보는 遇를 범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부활이 약속된 예수님도 죽기를 두려워하였는데... 죽기를 두려워하는 예수님의 그 모습만을 뚝 잘라내서 ‘부활을 믿지 못해 예수가 죽기를 두려워했다’고 한들 이게 전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모리아 산 사건의 값싼 쇼에 불과한 것인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 조건부 사망’조차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만든 참뜻을 알 수 있는가? ‘예수는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도록 한 하나님의 참뜻은 무엇인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의 뜻은 100%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건 과연 맞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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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섭 (112.186.49.115)
2018-08-31 10:35:56
히브리서를 값싼 쇼로 만든 사람
1.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의 오해
터툴리안의 고백은 불합리를 믿음으로 둔갑시켰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 앞에서의 인간의 무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2. 맹신과 참 신앙의 차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신다. 약속이 있기에 불합리는 불합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합리 한 것을 가능하게 하실 거라는 어이없는 맹신이 아니라 약속과 그것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하는가가 맹신과 참 신앙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3. 히11:19은 히브리서 저자의 생각?
창22:5은 아브라함이 모리아까지 동행했던 종들에게 한 말인데,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는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21:12)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이 히11:19의 근거가 된다.

4. 짜고 친 고스톱?
예수는 3회에 걸쳐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 결국 부활되셨다. 글쓴이의 본 글의 논지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도 짜고 친 고스톱이 된다.
믿음과 그 결과는 어찌보면 짜고 친 고스톱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오해한 것이다.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결과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바라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약속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5. 글쓴이의 의도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천사의 전언에 대해 사라의 첫반응은 불신이었던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이 사라의 초지일관된 태도였을까? 적어도 눈에 띌 정도의 신체 변화가 나타났을 때부터는 사라도 믿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히11:11의 저자의 언급은 오류라고 단정하기엔 성급해보인다.
결국 믿음에 대한 오해로 히브리서를 값싼 쇼로 전락시키고 있는데, 이런 글을 쓰는 목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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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환 (110.47.216.79)
2018-08-31 02:33:11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완전하게 알 수 있도록 다른 시각의 의견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1. 이삭의 죽음 여부에 관계없이 번제물로 바쳤다는 입장
아브라함이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 이삭의 죽음 여부에는 전혀 미련 없이(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무조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정도에까지 믿음이 이르렀다.

2. 이삭의 죽음을 각오하고 번제물로 바쳤다는 입장
아브라함이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 이삭의 죽음을 각오하고(자식을 사랑하여 죽이기 싫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무조건 준수해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3. 이삭의 부활을 믿었기에 번제물로 바쳤다는 입장
오늘의 히브리방송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 인물인 아브라함의 마음속까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인바 아브라함의 행적을 신약시대에 비추어보면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줄로 생각해서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바쳤다”고 보는 것이 新約시대정신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이상 히브리서 기자였습니다.-

※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보아야만 온전한 동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동전에 비유하면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앞면’에 강조점을 두었고, 신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뒷면’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봅니다.

구약의 부족한 부분을 신약에서 보충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하면(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 내가 왔다라고 했으므로) 구약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에 중점을 둔 기술을 하였고, 신약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보다 확장된 신앙(부활)에 중점을 두고 기술하였다고도 볼 여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 본다면 구약과는 달리 다른 각도에서 아브라함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히브리서 기자의 기사를 성경의 전체맥락과 반드시 배치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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