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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최초 청년회인 “엡웟청년회”(의법 청년회),1897년5월5일에 창립 -
노종해  |  ro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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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8월 05일 (일) 21:53:25
최종편집 : 2018년 08월 10일 (금) 20:57:27 [조회수 :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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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1897년)
-최초 청년회인 “엡웟청년회”(의법 청년회),1897년5월5일에 창립 -

 노 종 해(CM리서치)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애국구국 상소운동(1896년)-엡웟청년회(1897년)로 이어져

   한국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 창립“(1897년5월5일)은 한국사회의 최초 청년회이다. 황성기독청년회(皇城基督靑年會,YMCA) 창립은 1903년이고, 한국장로교회의 ”청년 면려회”(靑年勉勵會) 창립이 1917년이며(새문안교회 청년회 창립은 1913년), YWCA인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大韓女子基督敎靑年聯合會) 창립은 1922년이니, 그러므로 한국감리교회의 “엡웟청년회“(의법청년회)는 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이다. ”엡웟”은 한자로 “의법”(懿法)이며, "懿法"은 "올바른 모본“이란 뜻이다.

    한국기독교는 청년들의 교회로 시작되었다. 첫 선교사들이 20대 초반 청년들이었고, 교인들과 교회지도자들도 20-30대 청년들이었다. 더욱이 교육선교(敎育宣敎)로 시작된 한국기독교 선교자체가 개화(開化)와 근대 화(近代化)를 추구하던 한국사회와 직결되게 하였다.

    한국기독교의 주도권이 선교사(宣敎師)들에게 있었지만 실제적인 지도권이 한국인들에게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청일전쟁(淸日戰爭) 이후인 1895년부터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변천된 정치사회 분위기는 전통사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근대시민의식이 싹트고 움터오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1895년 윤치호(尹致昊) 선생이 귀국하였고, 1896년에는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귀국하였다. 윤치호(尹致昊) 선생은 1887년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공부하며 세례 받았고, 1888년 도미유학하여 벤더벨트대학에서 신학(神學)을 공부하였으며, 에모리대학에서 영문학(英文學)을 공부한 분으로 당시 영서 중국어 일어 등을 구사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또한 서재필(徐載弼) 박사는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도미하여 죠지와싱턴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분으로 귀국할 기회를 엿보다가 박영효(朴泳孝)를 통해 국내사정이 변경된 것을 알고 1896년에 귀국한 것이다.

    또한 이때 조선정부(朝鮮政府)에서 1886년9월17일에 개관한 신식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이 1895년 말에 폐교되고 양반지도자급 청년학도들을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보냄으로써 한국기독교는 청년운동(靑年運動)의 산실(産室)이 되었다.

    윤치호 선생과 서재필 박사는 서울정동 배재학당에서 가르쳤으며, 민영환(閔泳煥), 이상재(李商在), 이완용(李完用), 유길준(兪吉濬), 박정양(朴定陽) 등 당시 정치사회 지도급 인사들과 각국 외교관들의 모임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조직키도 하였다.

 

   
▲ 정동교회 건축(1897년)-봉사하는 청년들

    이러한 시의에 힘이어 배재학당에는 학생단체인 “협성회”(協成會)가 1896년에 조직되었고, 정동구락부는 “독립협회”(獨立協會)로 이어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고 독립문(獨立門) 건립을 추진하였다. 협성회와 독립협회는 토론회(討論會)를 개최하여 자유(自由), 평등(平等), 애국사상(愛國思想) 및 근대 시민의식(近代 市民意識)을 고취시키며, 민주(民主),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추진하였다.

 

   
▲ 초기 엡웟청년회-거리 애국 토론회

 

   
▲ 배재학당 협성회, 엡웟청년회

 

    한국기독교의 최초 청년회도 이때 탄생되었다. 당시 정동교회(貞洞敎會)는 협성회와 독립협회의 중심처였고, 집회처였다. 정동교회는 1895년부터 교회건물을 신축키 시작하였고, 1897년에는 준공하고 입주하여 당시로써는 최대 최적의 집회처였다. 바로 이곳에서 기독교회(基督敎會)의 청년회(靑年會)인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가 창립 되었다.

    “엡웟”(의법,Epworth)이란 감리교회 설립자인 죤 웨슬리(J. Wesley)의 출생지명으로써, “엡웟청년회”는 1889년5월15일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시작되어, 미감리교회가 선교된 지역에서도 조직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의법청년회”(懿法靑年會)라 하였다. 한국기독교도 “엡윗청년회”를 “의법청년회”라 명기하기도 하였고, 청년의 영적생활지도와 친교, 봉사자로써 인격도야운동으로 모든 개체교회에 조직토록 하였다.

    한국의 엡웟청년회(의법청년회)는 감리회 제13회 한국선교연회 때, 조이스 감독(Bishop I.W. Joyce)이 조직키로 작정하고, 조원시(G.H. Jones) 선교사를 감회관(監會官)으로 임명하여 각 지방과 개체교회에 조직을 추진시켰다.

    조선 엡웟청년회 중앙위원으로 노병선(배재학당, 정동교회 대표), 김기범(제물포교회 대표), 이은승(상동교회 대표), 노블(W.A. Noble. 평양교회 대표), 페인(J.O. Paine.)으로 조직하여, 1897년5월5일 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인 “엡웟청년회”(의법청년회)를 탄생시켰다. “엡웟 청년회는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청년”이란 명칭을 사용하였고, 청년회원의 연령은 15세에서 35세 이었으며, 감회관 조원시 선교사는 설립취지와 지회설립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엡웟 청년회-

“청년회라 함른 노인과 상곤 없는 뜻이 아니라 청년들은 무론 남녀 하고 노인에 비교하면 기력이 강건하며 심사가 활발하고 열심도 못할 것이 없는지라 그런고로 노인들은 뒤채를 잘 꼰하고 청년들은 앞채를 잘 메여 교회가 잘 진보가 되기를 위함이오...

대조선에는 일천팔백구십칠년 제 십삼 년환회에 감독 됴이 씨가 설시하기를 작정하였으며 의원들은 목사 됴원시 씨와 로블 씨와 부인 페인 씨로 명하였더라 진실로 이회는 혼자 감당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제물포 전도인 김기범 씨와 배재학당 교관 노병선 씨와 달성회당 전도인 이은성 씨를 주사 합력하게 하셨으며, 한 덩어리가 되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쫏으며 이회가 일증월배 하여 대대로 영광을 주님께 돌려보내기를 성심소원 하노라 감회관 죠원시(“죠선크리스도인회보”, 광무원년 구월십오일)

 

   
▲ 엡웟 청년회-죠선크리스도인회보 광무원년(1897년) 9월15일자


엡웟 청년회 지회(支會)로 확산 되 나아가

    엡웟청년회는 전국연합회 성격인 중앙회를 두고 각 지방과 개체교회에 지회(支會)해 나갔다. 중앙회와 각 지회에는 칠국(七局)을 두었다. 엡웟청년회 중앙회 초대 회장은 조원시 선교사이지만 실제로 전국청년회를 설립하고 지도하며 이끌고 나간 것은 한국인 스스로였다.  초대 중앙회 임원은 통신국장 노병선(정동교회 대표), 학문국장 김기범(제물포교회 대표), 다정국장 이은승(李殷承, 달성교회 대표) 등이다.

    1897년5월5일 창립부터 10월까지는 장정규칙을 번역출판 하는 일과 회표를 제조하여 분송하는 일을 하였고, 이에따라 서울, 평양, 인천에 5개 지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각 지회의 명칭은 교회의 유명한 이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이 풍속이므로 새로이 조직되는 각 지회명칭을 한국에 다녀간 감독(Bishop) 이름을 따서 짓기로 하였다.

 

   
▲ 엡웟 청년회 첫 번째로 설립(1897년8월 경)한, 인천 제물포 내리교회(1895년)

    엡웟청년회 중앙회 조직에 이어 지회가 설립된 곳은 인천을 시작으로, 평양, 서울의 3개 처로 설립되었다. 서울의 3개 처는 정동교회의 남.녀 청년회와 달성교회(현,상동교회)청년회였다.

    인천지회는 조원시 선교사와 김기범 씨가 중심이 되어 28명의 회원으로 창립 조직하였는데, 그 명칭은 “나인데회”(Ninde)라 하였다. 달성지회는 이은승을 중심으로 조직하였고, 그 명칭은 “말리유회”(Mallaiew)라 하였다.

    달성지회(현, 상동교회)는 1897년9월5일 오후2시에 44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다. 당시 “죠선크리스도인 회보“에는 각 지회 창립소식을 전하며, ”달성지회 청년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죠선크스도인회보, 광무원년9월8일)

-청년회-

“구월 오일은 례배일 인데 하오 두뎜죵에 남대문 안 달성회당에서 모여 청년회를 설시하는데 제물포목사 조원시 씨가 사무를 주장하여 회중에 인원을 책정하고 여러 사람을 모아 청년회 규칙을 읽어 드리고 회원은 교회 중 사람으로 받으되 년세는 십오세로부터 삼십오세까지 허입하고 사무는 매 주일에 한번씩 모여 의론하되 례배 사일로 작정하니 달성회당 교우 중에 우선 입참한 회원이 사십사인 이오 인천 제물포 교회에서도 또한 청년회를 설시 하였는데 회원이 이십팔인이오 정동 교중에서도 장차 설시한다 더라“(죠선크리스도인회보, 광무원년(1897년)9월8일 제1권32호)

    평양청년회는 “굿셀회”로, 1897년9월21일 오후3시에 조직되었다. 평양지회 회원은 42명의 창립회원으로 노블 선교사의 주선으로 조직되었고, 매주 금요일을 집회일로 정하였다.

    정동교회(貞洞敎會)의 청년회는 1897년10월31일 오후7시30분에, 남자청년회는 배재학당 25명의 청년교인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고, 여지청년회는 이화학당의 11명 교인들을 중심으로 창립 조직되었다. 정동교회 남자청년회 명칭은 “와렌회“(Warren)로 회장은 노병선었고, 여자청년회 명칭은 ”조이스회“(Joyce)로 초대임원은 회장 프라이(Frey)와 황메례 등이었다.

    1897년10월까지 조직된 엡웟 청년회의 5개 지회의 창립 총회원 수는 150명이었다. 엡웟 청년회는 배재학당의 협성회(協成會와)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연관단체로써 복음전도(福音傳道) 뿐아니라, 자주(自主), 자립(自立), 평등(平等), 자유(自由)의 애국운동(愛國運動)과 사회개혁운동(社會改革運動)의 핵심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조직망이 되었다.

    엡웟 청년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토론회(討論會)를 매주 실시하였으며, 교육운동(敎育運動)으로 “매일학교“(每日學校)를 각 처 교회 옆에 세웠으며, 근로사상(勤勞思想) 고취, 한글전용운동, 사회봉사운동,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집회개최 등 주도하였다. 또한 복음전도운동을 통하여 한국인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키도 하였다.

    엡웟청년회는 한국 최초 기독교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의 회보”에 활동소식을 게재하며 확장 실현시켜 나갔다. 창립당시 엡웟 청년회의 주요 회원들은 윤치호, 서재필, 남궁원, 노병선, 김기범, 김창식, 이은승 등을 위시하며 최병헌, 문경호, 송귀용, 주시경, 전덕기, 이경숙, 하란사, 황메례 등이다. 더욱이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해산되었을 때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유일한 청년회로써 감옥전도(監獄傳道)하였으며, 이들 인사들이 대거 엡웟청년회로 들어왔고, 기독교인이 되어 민족국구운동(民族救國運動)과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의 주축을 이루게 하였다.

 

   
▲ 엡웟청년회 연합, 을사보호 조약 무효 상소운동-대한문에서(1905년)

    이러한 모습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을 전국 엡웟청년회가 즉시모여 대한문 앞에서 전개시키고 도끼를 메고 투쟁한 것을 보아서도 그 열기를 알 수 있다.

    엡웟청년회는 친일감독 해리스(M.C. Harris)에 의해 1905년에 해산 당하였으나, 각 지회의 한국인 청년회는 유지하고 있었다. 최병헌 목사는 “정동 의법 매일학교“를 마포 서강교회(西江敎會)로 옮겨,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를 설립하였으며, 제1회 졸업생으로 김윤경 선생으로 한글교육과 애국교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참조:문효근, ”주시경 선생의 후계자 김윤경선생“, 나라사랑 제4집 1971.p157) 당시 서강에는 현재 광흥창 전철역 부근에 ”서강감리교회“(西江監理敎會) 병설로 “서강의법학교”와 “서강여학교“(西江女學校)도 설립운영 되고 있었으며, 일제말 폐교 되었다가, 와우산 언덕에 ”서강초등학교“(西江國民學校)로 재건되어 이어지고 있다.(참조:"梨花八十年史",p73,89. 노종해, "서강교회100년사",2002.p121)

   의법학교 초창기에 대해 최석주 목사(4회 졸업생)는 “서강교회는 그 당시 모든 교회들이 그랬듯이 교육사업을 잊지 않았다. 서강에 의법학교는 바로 서강교회의 중대한 사업이었다. 이 학교는 나에게 유일한 모교라 할 것이다.”(崔錫柱,“은총은 강물같이”서울,CLSK1975.p43-46)

 

   
▲ 서강의 경성사립의법학교(京城私立懿法學校)-교장: 최희명(1940년)

    엡웟청년회는 1916년 손정도 이익모  이하영 김유순 등 한국인 연회원들의 청원으로 재조직케 되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 통합되며 총리원 산하에 두었고, 일제 말 총회 교육부 총무이 공고로, 1938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엡웟청년회 현하 비상시국에 감(鑑)하여, 지난 제3회 총회에서 엡웟청년회는 정지하옵. 소화13년(1938년) 10월27일 교육부 총무 유형기”(참조:조선감리회보,1938년11월1일자)

    일제하의 엡웟청년회는 극심한 경계와 탄압을 받았고, 회유와 변질 속에서 명맥만은 이어졌으나, 이방면의 심층역구로 재조명 되고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감리교 청년회”(M.Y.F)로 재조직,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수님은 나인성의 과부 아들의 상여를 세우고, “청년아 일어나라”(눅7:11-17) 명하셨음을 기억하고, 오늘의 교회들은 청년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하고, 청년들을 일으켜, 나라와 민족, 세계를 위해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향해 매진해야 한다.(rch)


*서강의 경성사립의법학교(京城私立懿法學校)-화보
(위치-현, 광흥창 역 부근. 서강감리교회 병설로, “西江女學校”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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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의 경성사립의법학교 31회 졸업기념(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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