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임종석 칼럼
‘우리 교회’의 ‘우리’는 누구인가
임종석  |  seok9448@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8년 08월 05일 (일) 21:49:26
최종편집 : 2018년 08월 25일 (토) 00:46:44 [조회수 : 103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우리 교회’의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참 다양하게, 그리고 좀 많이 쓰는 편이다. ‘우리 인류’ ‘우리나라’ ‘우리 민족’처럼 그 범위가 무척 넓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우리 학교’ ‘우리 회사’와 같이 쓰기도 하고, ‘우리 집’ ‘우리 부모님’처럼 그 범위 안에 든 수가 몇 안 되는 일도 있다.

‘우리’란 자기를 포함한, 그리고 자기와 관련이 있는 복수의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쓰는 일이 종종 있다. 무남독녀 외딸이나 무녀독남 외아들도 ‘우리 어머니’라든가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는가. 친형제자매가 있을 리 없으니 자기 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건 자기뿐이므로 어법상으로 보면 ‘내(나의) 어머니’ ‘내(나의) 아버지’라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 해서 ‘우리 어머니’ 또는 ‘우리 아버지’라 부른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니 아무런들 어떠랴.

하지만 말한 그대로 된다면 큰일이 날 경우도 있다. ‘우리 남편’ ‘우리 아내’가 그렇다. 남편이 또는 아내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의 남편이나 아내도 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별 쓰잘머리 없는 말을 다 한다고? 맞다. 설마한들 비싼 밥 먹고 이런 시시껄렁한 말을 하려는 게 글의 목적이 되기야 하겠는가. ‘우리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의 ‘우리’는 누구인가. 자기가 소속되어 있어 자기가 포함된,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교인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뿐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 교회’의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느냐는 말이다.

나와 나의 형제자매를 낳아 주신 부모님을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그 ‘우리’와,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자기 부모님을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가 별로 관계가 없듯이, 내가 다니는 ‘우리 교회’의 ‘우리’와 다른 사람의 ‘우리 교회’의 ‘우리’도 똑같은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다. 우리들의 ‘우리 교회’도 다른 사람들의 ‘우리 교회’도 다 성삼위 하나님의 교회이다. 우리들의 ‘우리 교회’에 소속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소속된 그들의 ‘우리 교회’의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말이다. 그러한데 어떻게 서로 간에 관계가 없다 하겠는가.

아프리카 오지 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우리 교회’의 ‘우리’도, 미국의 잘나가는 대형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우리 교회’의 ‘우리’도 내가 소속된 ‘우리 교회’의 ‘우리’와 형제자매로서의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면 나의 ‘우리 교회’와 남의 ‘우리 교회’는 다 같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이다.

그런데도 타 교회의 교인을 데려다가 자기 교회의 빈자리에 앉혀 놓고 전도를 했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길로 가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는 교회의 교인이, 성경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교회의 교인에게 자기 교회로 와 보기를 권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책망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복신앙으로 세속에 짙게 물이 든 교회의 교인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의 교인을 감언이설로 꾀어 자기교회로 데려 오고는 전도를 했다 한다면 그것을 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이웃 교회를 보면 마음속으로 일망정 축하를 해 주고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지 시샘을 할 일은 아니다. 추월을 하려 경쟁할 일도 아니다. 선의 경쟁 운운하지만 진정한 경쟁은 남이 아닌 나 자신과 하는 것이다.

남과 하는 경쟁에는 1등이 1명뿐이지만, 나와 하는 경쟁은 1등이 10명도 되고 100명도 된다. 수 천, 수 만 명도 되고 그 이상도 된다. 지구촌의 모든 인구수만큼 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1등으로 여기신다.

능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경쟁에서 쌍방이 다 같이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는 빤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한 그것만으로 쌍방 모두에게 1등의 상을 주실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최선을 다한 능력 없는 사람보다 좋은 결과를 냈다면 하나님께서는 1등의 상을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실 것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남만 못한 것은 그 당사자의 책임이 아니다. 시시비비를 꼭 따져야 한다면 그를 그렇게 낳은 부모의 책임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책임이다.

 

 

엔도 슈사쿠의 ‘어머니 하나님’

 

날씨가 참 덥다. 덥다는 말을 빼면 인사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살인적 더위가 아니라 살인 더위 그 자체가 돼 버렸다. 더위와 싸워 가며 ‘우리’라는 말을 키워드로 하여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친구 하나가 생각난다. ‘내 친구’의 ‘내’ 대신 ‘우리’를 써서 ‘우리 친구’라 못할 것도 없어서일 것이다.

70대 중반인데도 그는 이 더위에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창작에도 손을 대고 있다. 전화로 들으니 요즈음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전설을 만들고 있다 한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전설이고,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그건 창작인데, 전설을 만든다니 엉뚱한 발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것의 상당 부분은 엉뚱한 발상에 의해 얻어진다. 상식적인 틀에 갇혀 있어서는 상식적인 것 밖에 이룰 수가 없다. 학문도 그렇고 예술도 마찬가지다. 필자에게는 그도 그러리라는 믿음이 있다. 그가 어떠한 결과를 내어놓을지 지금부터 기대가 된다.

필자는 그와는 달리 정년퇴임과 동시에 학문을 놓아 버렸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이다. 믿음의 글을 쓰는 일, 그것을 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현직시절에는 그것을 일종의 로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필자는 자신에게 문재(文才)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글 쓰는 일을 ‘사명’ ‘로망’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임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게 즐겁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둔재이지만, 학자의 반열 말석에라도 든 것은 오로지 그 덕택이었다. 필자는 학문을 취미처럼 즐기며 했다. 논문을 쓸 때면 목에서 신물이 올라온다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그 때가 가장 신이 나고 행복했다. 선행논문을 뒤지거나 할 때는 즐겁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텍스트의 행간을 읽는 일도 재미있지만은 않지만, 집필만은 즐거웠다. 필자와 같은 둔재에게 있어서는 그것만큼 큰 은총도 드물다 할 것이다.

그 덕택으로 영양가라고는 별로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글들을 쓰며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믿음에 대한 일을 그렇게 취미처럼 가볍게 생각하며 해서야 되느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취미처럼 즐기며 하는 건 사실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은 물론이고, 문장 하나를 쓰고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성경말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하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다. 소재는 성경정신을 주축으로 하여 찾는다.

어쨌든 필자도 지금과 같지 않고 앞에서 말한 친구처럼 학문을 계속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하는 일이 가끔 있다. 필자는 일본 근대문학 중 가와바따 야스나리(川端康成)를 연구했지만(그의 이름은 몰라도 노벨문학상 수상작 <눈 고장(雪國)>이라면 대개를 알 것이다), 학문을 계속했다면 아마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로 전공을 바꾸지 않았을까 한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가톨릭 작가로 노벨 문학상 수상후보에도 몇 번인가 오른 바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침묵(沈黙)>과 같은 작품이 번역, 출간되어 많이 읽힌 바 있다. 그런데 그는, 성서가 말하는 예수에게서 사실(事實‧史實) 아닌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한줌의 예수의 족적뿐이라고 말한다. 복음서 등의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는 실제의 예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며 그는 소조(塑造)의 작업이라도 하듯 자의적으로 예수상을 빚어 만들어 형상화했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은 또 있다. 일본은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1%도 안 되지만 기독교 작가나 기독교 문학 연구자가 많다. 그런데 기독교 문학 연구자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 아니거나, 기독교인이라 해도 복음주의 신앙이 아닌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엔도 슈사쿠의 작품 연구자들은 대개가 그의 예수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에서 연구를 한다. 그 같은 연구풍토의 일본에 우리나라에서도 유학을 가 일본 기독교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대부분이 기독교인, 그것도 복음주의 신앙의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주의 신앙의 기독교인인 그들이 일본의 비기독교인 교수들로부터 배워 귀국 후에까지 자기들 스승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가와바타 연구자지만 기독교인인 관계도 있어 엔도에 관한 논문을 몇 편인가 쓰기도 했는데,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주위로부터 떠밀려 한국일본기독교문학회를 창립, 그 초대회장을 맡은 바 있다.

필자는 가끔 회원들에게,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은 국내자(Insider)이고, 비기독교인은 국외자(Outsider)인데, 국내자가 국외자 입장에서 연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믿지 않은 사람처럼 성서의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라 한다면 불신자인 스승을 따라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다고 엔도가 불신자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비록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면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만은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어머니를 통하여 내가 단 하나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온기였”는데, 하나님은 그 온기의 가장 강한 덩어리, 다시 말해서 사랑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는 또 하나님을 “사랑이 활동하는 덩어리”라고도 하는데,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엄격한 가부장적 아버지 하나님(父なる神)이 아니라, 자애로운 어머니 하나님(母なる神)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엄격이 아닌 자애롭다는 데에 공감이 되지 않는가. 일상에서, 또는 기도 중에 만난 하나님은 무섭도록 엄격하기보다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아는데, 아닌가.

 

 

하나님의 교회의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들은 또 있다.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이다. 그들은 육의 가족에 아버지와 아들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도 있는 것처럼 영의 가족에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도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며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한 갈4:26의 말씀을 들이댄다. 여기에서의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한 표현은 하갈과 사라의 신분이 그 자손에게 이어진 것을 말하며 사라의 신분을 성도들의 생활에 적용시켜 한 것인데, 이것이 하늘에 우리 어머니께서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1:27)하셨는데, 아담이 하나님의 남성적 형상대로 지은 사람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이고, 하와가 하나님의 여성적 형상대로 지은 사람으로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라 한다.

그런가 하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리라” 한 계22:17을 들어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고, ‘신부’는 어머니 하나님을 말하는데 그 사이에서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성령’은 보혜사 성령이고, ‘신부’는 교회를 의미한다. 맞는 건 ‘생명수’를 ‘영생’이라 한 것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의 자녀처럼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성삼위 하나님을 믿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성경의 맨 처음과 맨 나중에도 이와 같이 어머니 하나님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데, 어떤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설득력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말에 귀를 막을 것이다. 어떠한 말도 듣기를 거부할 것이다. 어떠한 논증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귀로는 듣는 척한다 해도 마음에는 빗장을 걸어놓는 게 이단들의 행태이니 말이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이 옳다고 억지를 부릴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이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정치논쟁과 종교논쟁을 가리켜 무의미한 것이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무튼 필자로서는 이런 허술한 이론에 현혹되어 안상홍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만 균형감감을 유지한 채 성경을 살펴본다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인데, 그들이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몇 마디 더하는 것으로 글을 매듭짓고자 한다. 엔도 슈사쿠가 말한 ‘어머니 하나님’은 그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같지 않다. 엔도는 엄격한 부성으로서의 하나님이라기보다 자애로운 모성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호칭까지 허용해도 좋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는데, 그런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달리 부를 수가 있겠는가.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지체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다. 내가 다니는 ‘우리 교회’도 그렇고, 네가 다니는 너의 ‘우리 교회’도 그렇다. 지구촌의 모든 믿는 사람들의 ‘우리 교회’가 다 그렇다. 그러므로 모두가 나 자신의 ‘우리 교회’의 ‘우리’와 무관치 않다. 아니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니 다 한 형제요 자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나 신천지 같은 이단도 우리의 ‘우리’인가. 형제자매인가 말이다.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멋대로 빚어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성경도 다른 성경을 쓴다. 외형적으로는 같고 인쇄된 글자도 같지만,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말씀과 다르게 자기들의 입맛에 맞춰 변조하여 해석한다.

지구촌의 모든 교회, 모든 크리스천들의 ‘우리 교회’는 나의 ‘우리 교회’도 된다. 그러니 있어서는 안 될 교회간의 높은 담을 헐어내야 한다. 그러나 이단과의 담은 더 높고 견고하게 해야 한다. 대화? 그런 것을 가지고는 그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전술한대로 그들은 이미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단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다. 말로는 안 된다. 완력이나 잔꾀로는 더더욱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수밖에 없다. 손양원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구약 66권으로 성경을 읽지만 불신자들은 신자인 우리의 행실을 보고 성경을 읽’는다고 말한다.

나의 ‘우리 교회’나 너의 ‘우리 교회’의 ‘우리’가 다 같이 성경에 따라 살아가려 애를 쓴다면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나고 향기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 빛과 향기는 저들의 어둠을 이기고 악취를 정화시킬 것이다.

임종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2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