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스타프 융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심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인들은 프로이트가 인간의 종교심과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심리학 자체를 불신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는 인간의 정신을 통합하고, 모든 창조성의 원천인 집단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주장했다.

집단 무의식은 지극히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체험들이 침전되어 생긴 것 그리고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인류가 그들의 삶에서 경험해 온 것들이 집단적 무의식의 정신적 요소를 형성하는데, 특히 원시사회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종교심이 신화와 제의를 만들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융에 따르면 집단무의식은 먼 옛날부터 우리 안에서 수많은 신을 만들어낸 모태이다.

여기서 필자는 융의 심리학이 신학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짧은 글은 융의 심리학이 신학에 미친 영향 외에도 정통주의 신학과 현대 신학의 차이, 인문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어림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대부분 김성민의 『분석심리학과 기독교』(학지사)를 참조해서 작성되었다.

융은 인간의 정신에서 종교의 기반을 찾아내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 정신의 심층에는 초월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려는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성향이 있으며 이 성향이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본성적으로 종교적인 존재로 본 융의 심리학은 ‘신의 죽음’이 선포되면서 기독교의 위상이 약화되고 그 결과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에 생기를 불어넣는 기틀을 마련했다. 따라서 융의 심리학은 신학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까지 신학 연구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초점을 맞춘 신정통주의 신학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은 신의 계시를 중시했다. 그런데 천문학이 발달하고 실존철학이 주도하는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체험하기 어려워했다. 과학과 이성적인 사고가 손잡고 발달하면서 초월적인 존재를 외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무신론자들에 의해서 ‘신의 죽음’이 선포되고,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나 까뮈의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이 무신론의 세대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 신 죽음의 신학, 종교 없는 기독교, 세속화 신학이었다. 결국 기독교의 위상이 약화되면서 교회가 비어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태에 반대해서 신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고, 인간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이 그런 신학을 정립하는 데에는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보는 캠벨 같은 신화학자, 융을 비롯한 분석심리학자, 오토, 엘리아데 등의 종교 현상학자들의 뒷받침이 있었다. 그들의 신화 연구를 통해서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는 것, 인간의 무의식의 저변에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현대인의 문제는 그런 원천으로부터 이탈한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융의 심리학은 신이 살아있음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에 힘을 실어주었다. 융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때,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집단 무의식과 원형 개념은 신학자들이 내재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인식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세대에게 하나님은 초월적일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통적인 신학에서 내세우는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생각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실상 신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고, 요한복음에서는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17:23)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내주’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는 성령을 받는 것(요 7:39, 행 10:47),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것(갈 3:2), 예수를 영접하는 것(요 1:12)에 관한 구절들이 나온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 것이나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단지 외적으로 어떤 물건을 받아들이는 것과 달리 예수나 성령을 자기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을 자기 안으로 모셔 들이면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

이렇게 성경은 초월적인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다. 정통적인 신학에서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치중했지만, 현대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 뿐 아니라 내재성도 인정한다. 오히려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심을 기울인 융의 심리학은 내재성을 중시하는 현대 신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인간 정신의 깊은 층에서 종교적인 기반을 찾아내고, 그것이 구체적인 종교사상이나 제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탐구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집트, 인도, 중국의 신화는 물론 기독교, 영지주의, 연금술 등에서 발견되는 여러 종교의 교리 속에서 원형적인 구조를 찾아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여러 가지 종교의 교의 속에서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구를 담고 있는 종교적 상징들을 찾아내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인간의 본성과 결부시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그는 인간에게 종교는 본질적인 것이며, 종교적 상징을 통해서 인간의 무의식적 욕구가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욕구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다. 과거의 신의 모습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영감을 주었지만,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이런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종교의 교의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지 말고 그 교의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서 주어진 시대에 맞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융은 이것을 그의 원형 이론으로 설명했다.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는 원형(archetype)이다. 원형이란 사람들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내용을 만들어내는 그릇이다. 집단 무의식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유전되는 것은 표현물이 아니라 틀이다. 이 틀은 육체적인 본능처럼 사람들에게 커다란 틀로만 전수된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여러 시대 동안 고난을 당할 때, 구세주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을 구원해 주었던 구세주라는 커다란 틀이 무의식 속에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구세주의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융은 틀인 원형과 내용물인 원형의 상(image of archetype)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원형은 집단적 무의식에 속한 것이지만, 원형의 상은 시대마다 사람들의 욕구 혹은 의식에 따라서 다르게 결정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의는 커다란 원형 안에 그 시대에 맞는 원형의 상을 채워 넣어야 한다. 주어진 시대에 맞는 원형의 상을 원형 안에 채워 넣는다는 말은 기존의 교의에서 종교적 상징을 찾아내서 그 시대에 맞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시대에 맞지 않는 원형의 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데, 그 시대에 맞지 않는 그 원형의 상이 강요되는 경우에는 그들의 신앙은 기형적인 것이 되고 만다.

융에 따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하나님 상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하나님의 상과 교회에서 제공하는 하나님의 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융은 현대 교회는 과거 교회에서 설정한 교의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상을 찾아서 그들이 그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형의 상에 대한 이러한 융의 주장은 실존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불트만이나 문화의 신학을 내세운 틸리히의 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