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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베데스다
김기석  |  vorbli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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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년 06월 15일 (금) 03:02:43
최종편집 : 2018년 06월 15일 (금) 03:05:02 [조회수 : 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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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베데스다 

예수는 아름답고 장엄한 성전이 아니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있는 곳, 원망과 절망으로 인해 음산한 그 자리,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그곳을 제일 먼저 찾아가셨다. ‘제일 먼저’라고 적어놓고 보니 가슴이 시리다. 오늘의 교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베드자다 혹은 베데스다는 우리가 맨 마지막에 찾아가는 곳 아니던가? 그것도 마지못해, 체면치레로 말이다. 얼핏 늦은 저녁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을 찾아나서는 예수의 뒷모습이 보인다. 시인 정호승은 교회에서조차 외면당해 갈 곳 없는 서울의 예수를 노래했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발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와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이 시가 발표된 때로부터 벌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겨울비에 젖는 예수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답고 화려한 예배당은 곳곳에 서 있지만, 베데스다의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서른여덟 해 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던 병자가 있었다. 그 긴 세월을 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정보는 그게 전부다. 대체 그는 어떤 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일까?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 나을 수 있는데도 경제적 능력이 없어 치료 받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치료의 여망이 없는 병이었을까? 가족들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 가족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온 식구가 땀 흘려 일해도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병자를 돌보는 책임까지 떠맡아야 했다면 그들의 삶 또한 황폐하게 변했을 터이다. 그는 버림받은 것일까? 용변을 보거나, 음식을 먹기 위해 이동해야 할 때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까? 그는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날을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분노와 원망 그리고 체념 사이를 오갔을 것이다. 자기들을 가난과 질병 속에 살도록 만든 거대한 체제에 대해서는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눈이나 흘기며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자기의 작음을 통렬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는, 힘 있는 이들의 음탕함에 대해서는 분개하지 못한 채 50원짜리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거나 월남파병에 반대하지는 못하고 20원을 받으려 몇 번씩이나 찾아오는 야경꾼만 증오하는 자기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자기가 비겁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사소한 일에만 반항하는 자기를 두고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자조적으로 노래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이렇게 작은 마음들이 모여 경쟁한다. 그것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현실이다. 정말 천사가 와서 물을 휘젓는지, 그 물에 맨 먼저 들어가면 과연 병이 낫는지 묻지 말자. 모두가 절박하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품고 그 자리에 있다. 사연의 경중을 따질 일이 아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비껴선 채 살아야 한다는 것, 죄인으로 규정된 채 일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처럼 힘겨운 것이 또 있을까? 그렇기에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결정적 한 순간을 기다린다. 천사가 물을 휘젓는 시간 말이다. 주위에 있는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감싸줄 이웃이 아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할 경쟁자일 뿐이다.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는 자비가 아니라 경쟁이 지배하는 현장이었다. 승자독식의 세상이 바로 그곳이다.

 

경쟁을 넘어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은 내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다. 이 함축적인 문장은 <존재와 무>에서 제시된 인간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서구적 주체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타자를 객체화하여 격하시키려고 경쟁한다는 것이다. 타자를 지옥으로 경험할 때 세상은 안전한 곳도 지속 가능한 곳도 아니다. 그때 세상은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낯선 곳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외로운 단자처럼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다. 신영복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현실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장기수로 오랫동안 복역했던 그는 겨울 징역살이와 여름 징역살이를 실감나게 대조하고 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이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간다움은 그러한 현실의 질곡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데서 발생한다. 신영복 선생은 어느 날 감옥에서 천사를 보았다고 증언한다. 열대야로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 눈을 떠서 바라보니 한 사람이 잠든 동료들을 위해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더위에 시달리느라 전전반측하다가 문득 곁에 있는 동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졸지에 그 비좁은 감옥을 거룩한 곳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영적 감수성이야말로 이 살풍경한 세상의 희망이 아닌가. 하이데거는 인간을 ‘함께 나란히 있음’(Mit-Einander-Sein)으로 설명했다. ‘너‘를 부정하는 순간 ‘나’도 부정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나의 존재 조건이다. 그것은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왜 또 다른 흙으로 하와를 빚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하셨을까? 인간 존재는 서로에게 속해 있는 생명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까닭은 타자, 특히 약자를 돌보고 지키는 것이 사람됨의 표징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닐까? 타인과 마주 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도덕의 세계가 열린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는 경쟁을 마치 자연 상태인 것처럼 가르친다. 학생들은 점수 경쟁에 내몰리고, 직장인들은 실적 경쟁에 내몰린다. 국제적으로도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살벌한 구호가 사람들을 죄어친다. 사람들은 인격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기 소외는 깊어진다. 이전에 비해 많은 것을 소비하면서도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소외의 산물이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행복은 어쩌면 신기루인지도 모르겠다. 강수돌 교수는 그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진리를 위한 경쟁이 아닌, 타자를 누르기 위한 생존 경쟁, 즉 세계시장을 둘러싼 상품경쟁은 어떤 상품이 승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를 존속시키는 조건이 된다. 내가 시장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그 승패와는 무관하게 경쟁의 희생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켜주게 된다는 것,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예수라는 봄바람

싸늘한 경쟁의 논리만 남아 있는 베데스다에 가신 예수는 그곳에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을 고쳐주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뜬금없는 질문에 그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누구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여 아무도 묻지 않는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서른여덟 해나 병자로 살아온 이의 가슴 깊은 곳에서 마치 울혈처럼 맺혀 있던 원망이 그 질문에 이끌리듯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요5:7). 단순하게 ‘예’라고 답하면 될 일인데, 그는 왜 이리 장황하게 대답을 한 것일까? 원망병이 고황에까지 미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 가운데 우리가 끝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상상력이다.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헝가리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Imre Kertesz)는 15세이던 1944년에 나찌의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종전과 더불어 생환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경험을 담아 수용소 삼부작을 썼는데 그 첫 권이 <운명>이다. 그 책에서 작가는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탈출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둘째는 자살이다. 수용소에서는 누구라도 한번쯤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죽어서라도 수용소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치욕스러운 삶을 견디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가 흥미로운데 그것은 상상력의 힘에 기대는 것이다. 임레 케르테스는 제 아무리 엄격한 감시자들도 상상력만은 통제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상상을 통해 그는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며 담소하는 자기 가족들 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벗들과 어울려 담소하는 자리에 가기도 했던 것이다. 상상력을 잃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 중근동 지역이 정복전쟁의 광기에 휩쓸리고 있던 주전 8세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는(사11:6) 세상을 꿈꿨다. 어처구니없는 꿈이지만 그 꿈조차 없었다면 삶은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정착촌 보호라는 명분으로 이스라엘이 세운 높이 6미터의 분리장벽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감옥에 갇힌 꼴이 되었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그곳에서 사람들은 장벽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벽 꼭대기에 닿는 사다리도 그리고,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창문도 그리고, 줄을 잡고 하늘에 오르는 그림도 그렸다. 그 그림들은 비록 현실의 암담함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기들의 영혼을 끌어올리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

오랫동안 타자에 대한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살다보면 다른 삶의 가능성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법이다. 운명의 타격으로 곱드러진 인생은 좀처럼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존재의 퇴락(頹落, Verfallenheit)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그 사람의 경우 타자에 대한 원망 혹은 자기 운명에 대한 탄식이 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을 앞질렀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득이 아니라 존재에 가해지는 타격이다. 예수는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말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어떤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던 것일까?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명령과 실행 사이에 조금의 간격도 없다. 38년 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던 부자유가 일순 해소되었다.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려 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풀어야 하는 법.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프란체스코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겨울에 아몬드나무에 꽃이 만발하자 주변의 나무들이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허영이람’ 하고 흉을 봤습니다. ‘저렇게 교만할 수가! 생각해 바, 저 나무는 저렇게 해서 자기가 봄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아몬드나무 꽃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자매님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 가슴속에서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났던 일도 그러한 것이었으리라. 암울하고 긴 겨울 추위에 몰려 께느른하게 지내던 그가 예수라는 봄바람과 만나 새롭게 깨어났다. 그는 자신의 몸과 일체를 이루었던 자리를 들고 일어섰다. 중력에 이끌리듯 수평으로 늘어졌던 삶에 수직의 중심이 생긴 것이다.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숙명론이 물러가자, 은총 속에 살아갈 새 삶의 문이 열렸다.

 

지금은 일어서야 할 때

그러나 그가 살아갈 새 삶이 아름다웠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현실은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다. 오랜 세월 병에 짓눌려 살던 그가 자리를 들고 일어섰다는 사실을 보고도 사람들은 흔쾌하게 기뻐하지 않는다. 유다인들은 그를 나무란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이동했다고.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요5:10). 그를 괴롭히던 질병이 물러가자 율법 규정이 그에게 또 다른 올가미를 씌우려 한다. 율법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율법주의는 위험하다. 모든 것을 율법의 규정에 따라 판단하려는 이들은 세상을 매우 단순하게 바라본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율법을 알고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 둘 사이는 없다. 부득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른여덟 해나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섰다는 그 놀라운 사실 앞에서 유다인들은 경탄하지 않는다. 율법의 잣대를 들이댈 뿐이다. 이 완고하고도 단순한 율법주의 앞에서 인간다운 따스함은 사라진다. 한 인간의 존재 회복에 대한 내러티브는 경청되지 않고, 공존의 아름다움 또한 탄생하지 않는다. 진정한 안식일은 어떤 것일까? 아브라함 헤셸은 말한다.

“일곱째 날은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을 일시적으로 그치고, 개인적 갈등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는 날이다. 또한 일곱째 날은,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사람의 내면에 평화를 이루는 날이다. 그날은 화폐 사용을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세계 최고의 우상인 돈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맹세하는 날이다. 일곱째 날은 긴장으로부터 탈출하는 날, 사람이 진창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시간이라는 세계의 군주로 취임하는 날이다. 광포한 시간의 대양, 격렬한 수고의 대양 한가운데 고요의 섬이 떠 있다. 우리는 그 섬의 항구로 들어가서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한다. 그 섬은 일곱째 날이자 안식일이며, 사물과 도구와 실용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영을 사모하는 날이다.”

안식일이 이렇게 이해되지 않을 때 그것은 제도화된 인간의 잔혹성으로 전락하기 쉽다. 유감스럽지만 베데스다, 그곳은 자비의 집이 아니었다. ‘거룩’이라는 척도를 내세우며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던 유대교 세계에 예수가 가져온 것이 바로 ‘자비’였다. 자비란 타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슬퍼하는 이들의 슬픔을 부둥켜안는 마음이 아니던가? 자비의 집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실상 그곳은 자비의 무덤이었다.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고, 타인들에 대한 원망과 질시와 미움이 짙은 안개처럼 고여 있던 곳, 몰강스러운 율법주의가 사람들을 억압하는 곳, 허위로 가득 찬 현장이었다. 그곳에 오신 예수는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사람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이르신다. 지금 우리 삶의 자리는 어떠한가? 오늘의 교회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교회의 현실이 베데스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제는 일어서야 할 때이다. 예수라는 봄바람과 만나 내면의 꽃을 피워야 한다. 사방에서 살천스러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일어나 걸어가라’는 그 명령에 따를 때 우리는 비로소 무기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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